혹자가 말하길 '집 떠나면 고생'이랬다. 물론 그 고생할 것도 감수하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이 정도로 고생할 일이 있을 줄은 그도 몰랐다.
"...와씨, 오늘 밥값 한 번 빡세게 하네."
강산은 봉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계속해서 마도 술식을 외었다. 밖에서는 벌레 떼의 날개소리가 범 울음소리처럼 퍼지고 있었고, 안에서는 그의 안에 쌓인 망념이 그를 찌르고 있었다. 이따금 그 중 몇몇이 상처의 피냄새라도 맡았는지, 고집스럽게 그가 두른 맞바람을 뚫고 그의 쪽으로 넘어오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 되었다. 그 날 그는 문지기였다. 그 자신이 쏘이더라도 그가 지키고 있는 마을회관 건물로는 한 녀석도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 안에는 각성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대피해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냥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저 벌떼와 맞서 싸우는 것은 그 혼자가 아니었기에, 마을회관을 저 외래종 말벌 떼로부터 지키고 서 있는 일은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벌레 떼 사이사이로 불꽃이, 또는 번개가, 또는 터지는 소리나 베고 후려치는 소리 같은 것들이 이따금씩 섞였다. 처음보다 벌 떼의 기세와 머릿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을 보니 전투원들이 잘 싸우고 있는 듯 했다.
"잘한다."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며 강산은, 마도를 유지하며 버텨나갔다.
자캐의_유언은 - 이거 전에 했던가 잘 모르겠네요.... 가족들이랑 친구들한테 고맙다고 하고, 부모님한테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하고... 또 지한이나 화엔 같은 몇몇 특별반 급우들에게는 꼭 꿈을 찾길 바란다고 할 것 같아요.
자캐의_주마등 - 어릴적 가족들이랑 함께했던 기억이나, 무전여행 중일 때의 기억, 그리고 미리내고에서의 일들이 스쳐지나가지 않을까요...?
빈센트는 여러가지 알아봐야 할 것이 많아서, 메모를 해놨다. 일단은 강들의 정보를 알아야 했고, 강들의 정보를 안 다음에는 위험 정보를 알아야했고, 그 외에도 자재와 공구를 알아봐야 하는 등 알아봐야 할 것 구해야 할 것이 참 많았다. 빈센트는 무엇부터 알아봐야 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익숙한 사람을 보아서, 손바닥을 펼쳐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요."
영월 작전 이후에 대운동회까지, 바쁘게 보내고 난 후 한동안 쉬느라 그 사람의 얼굴을 못 본 것 같았다. //1
그런 말도, 나쁘지는 않군. 빈센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과 단절된 이후로, 계속 갈아치운 후견인들을 제외하면 깊은 관계라는 것을 맺어본 적이 없었다.(베로니카는 반강제로 붙어있는 것이니 제외해야 한다는 게 빈센트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형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주는 것이, 귀찮기보다는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지냈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저는 그냥 산책 나왔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라면, 어디 물놀이라도 가실 생각이십니까?"
강에 뜨는 배라니 자연스레 모터보트나 요트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슬며시 기울인다. 불 속성이라 물놀이는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았는데 조금 의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불속성이 물놀이 좋아할 수도 있지!하는 셀프 반박이 떠올라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빈센트의 미소에 씁쓸함이 서렸다. 빈센트의 명령(또는 명령조차도 못 되는 부탁)이 곧 자신의 행동 방침이었고, 빈센트의 삶이 곧 자신의 존재 이유이며, 빈센트의 의견이 곧 자신의 신념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염원을 말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그녀의 염원을 들어주고 싶어서였다.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강산에게 말했다.
"혹시 서점에 같이 갈 일 있으십니까? 지리지부터, 수문학 서적까지 좀 사야 할 게 있어서요."
지리지는 유역의 위험함을 가늠하기 위해, 수문학 서적은 혹시 강에 배의 통행을 방해하는 보가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5
강산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만 듣고서 데이트 가냐고 놀릴만큼 눈치없는 사람으로 자라나진 않았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단순한 이성과의 데이트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그에게 의미있는 장소를 찾아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는 없었습니다만, 딱히 급한 일정도 없습니다."
강산은 흔쾌히 빈센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대형 서점 건물을 향해 눈짓한다.
"지리지라면 몰라도 수문학 서적을 구하려면 좀 큰 곳에 가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책일테니까요."
"...확실히, 학술 서적이면 상당히 큰 곳이 필요하겠습니다. 아니면 학술기관 근처, 최소한 대학교 근처 책방을 알아보거나..."
빈센트는 강산이 눈짓하는 서점으로 들어간다. 수많은 책들이 줄줄이 쌓여 있고, 책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팻말만 모아도 책장 다섯개는 채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그것을 보더니, 자신이 원하는 책들을 찾으면서 강산에게 묻는다. 그래도 자신에게 어울려서 이리저리 따라다니는데, 빈센트 자기 일만 묵묵히 하기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산 씨는 요즘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 기습작전 때 다친 걸 지금에야 요양을 끝내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테토스의 경단이라는 걸 먹었는데, 다시는 먹고 싶지 않더군요."
라고 말한다. 그 때, 다음번에는 조심하라며 빈센트의 몸을 비틀어버리던 그 우악스러운 손길을 생각하면, 무심한 빈센트의 얼굴에도 불쾌감이 비쳤다. //7
강산은 빈센트를 따라 대형 서점에 들어가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딱히 당장 필요한 책은 없긴 하지만, 강산은 운명이라든가 인연 같은 것을 반쯤 믿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우연히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이나 어릴 적 사고 싶었으나 못 샀던 책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라든가. 빈센트가 그에게 말을 걸기 직전까지 그런 생각으로,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 그 경단 말이죠...이야, 저도 그거 가지고 있었는데...하하. 제가 스스로에게 써본 적은 없어서 몰랐는데, 맛이 끔찍하던가요? 아니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라도?"
빈센트가 말을 걸자 칼같이 빈센트 쪽을 돌아본 강산은,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이며 되묻고는, 빈센트가 그에게 한 질문에 조금 뒤늦게 답한다.
"저는 좀 쉬고 지리산에 갔습니다. 거기서 어떤 특이하신 어르신을 만났죠."
물론 어르신이라는 것도 언행으로 추정한 것이지만, 강산은 그 지리산의 남자가 그의 대선배뻘 되는 각성자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맛이 끔찍한 정도였으면 내색도 안 했을 겁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걸 먹고 정신을 차려보니... 알 수 없는 근육질 거인에게 붙잡혀서 부러진 온 몸을 강제로 맞췄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사지를 여러 개로 찢었다가 다시 봉합하면 그런 느낌일 것 같았습니다."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부작용... 이라기에는, 어쨌든 빈센트의 신체는 완벽한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신체 관련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은 빈센트의 기억에 흉터처럼 남아서, 생각할 대마다 온 몸에 그 때의 느낌이 불쾌감이 되어 스멀스멀 달라붙었다. 빈센튼느 그 때의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강산의 말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역사적 맥락이 많이 엮인 산에 특이한 노인이 있다... 적어도 약자 범주에 들 사람은 아니겠군요. 아, 찾았습니다."
빈센트는 두 책을 본다. 하나는 <대한민국 지리편람 최신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한반도의 실정에 맞춘 개정 수문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