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힘들게 노력했고 멀리까지 도달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나는 몰락해야만 했고 내가 가진 걸 전부 잃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잡화점은 평소와 같다. 가게라기보단, 저기 저 자리에 편히 앉아 있는 여자 소유의 개인 방을 연상시킨다. 하기야, 무늬만 잡화점일 뿐 실질적인 기능을 그 곳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가게 디스플레이를 이렇게 하고도 괜찮은 거겠지. 피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선반 위의 물건 하나를 바라보았다. 저건 저번에 왔을 때 없었는데, 아닌가. 다시 시선을 여자에게로 돌렸다. 뻔뻔스럽게 시치미 뚝 떼기는.
"아, 내 시간은 조금 비싸서. 사탕 한 병 가지고는 모자랄텐데."
뻔뻔함에는 뻔뻔함으로 맞대응했다. 손끝으로 입꼬리 문질러 어거지로 잡아 내렸다. 아무리 둘만 있다 해도 습관적으로 조심하게 되었다. 오래된 강박 중 하나다.
"사과 사탕 하나가 너무 비싼걸."
작게, 그리고 장난스럽게 투덜대며 옆에 털썩 앉았다. 옆모습으로 바라보아야만, 그제야 손가락 틈새로 올라간 입꼬리를 볼 수 있다. 작게 속삭이듯 반갑다 인사했다. 시선을 한 바퀴 돌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재확인했다. 사내는 기이한 지점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남의 시선이 있다. 확인에 확인을 한 뒤에야 긴장을 풀고 손을 입에서 뗐다. 가볍게 양 팔을 벌렸다. 간만에 포옹이나 해보자고.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입매만. 천천히 자신의 친우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가면 너머의 모습은, 말하기는 조금 이상하지만, 아름다웠다. 중성적인 미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선이 얇은 남성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여성같기도 한 얼굴에 그는 잠시나마 흥미를 가졌다. 아, 참. 목소리. 목소리도 이번이 처음 듣는 거였던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충격 때문인지 눈물이 맺힌 눈가를 한번 바라보았다. 울면 곤란한데... 같은 생각을 할 때 즈음, 에만이 입매를 말아올렸다. 갑자기 눈가를 휘고, 뺨도 달아오르며 키득키득 웃는 모습에 제롬은 순간 당황한 듯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너, 말하는 거랑 표정이 전혀 안 어울리는 거 알지?"
말만 들어보면 제롬 자신을 향해 에만이 빌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얼굴을 보면 다르다. 저 웃음은 가면이 아니라는 것을, 제롬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차갑게 내려다보던 시선을 잠깐 감고는, 원래의 표정으로 에만을 바라본다. 뭔진 모르겠어도 그의 화는 풀렸다. 아니, 오히려 황홀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오히려 풀리지 않은 쪽은 내 쪽인가.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제멋대로 화내고, 제멋대로 풀리기는. 자신은 아직 제대로 답을 들은 것도 없는데,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뭐든 말하면 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다 싱긋 웃었다. "좋아. 뭐든 말한다 했어." 그는 가볍게 중얼거리고는 잡은 멱살을 들어올리더니 에만을 침대로 던졌다. 말만 던졌다는 표현을 썼을 뿐, 던지듯 내려놓았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매트리스 덕분에 아마 아프지도 않았으리라.
"내 친우 에만. 일단, 네 정체가 뭔지부터 말해."
침대 위로 던져져 누워있을 그의 옆으로, 제롬이 따라 앉았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모양새로 고개만 돌려 에만을 바라보았다. 하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무라사키도, 그 피피라는 놈과 레스터도, 지금 있는 에만도- 왜 내 '친구'들은 내 머리를 이렇게 아프게 만드는지. 하지만 덕분에 뭘 질문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것을 물으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암살자를 고용했던 그로스만인지 그로테스크인지 하는 놈들도 너랑 뭔 관련이 있는지도."
이거면 충분하다. 넌, 아마 내가 친구라는 사실을 확인한 모양이지? 그렇다면 이젠 내 차례였다.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줘.
"그러냐." 이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건 어쩌면 엄청난 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페로사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았다. 당장 자신은 르메인 배틀리언에서 은퇴했지 않은가. 라 베르토는 르메인 배틀리언보다도 훨씬 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고, 아스타로테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해줄지언정 막지는 않을 성격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사람이 강하더라도 이 뉴 베르셰바에서 암살자로서 홀로서기는... 고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홀로 우뚝 선 단 하나의 성공사례는, 25년 전의 더 퍼스트 한 사람뿐이니까.
"떠나기 전에 여행 준비를 최대한 하도록 해. 러시아에는 그런 말이 있더라. 한나절 여행에 일주일치 빵을 준비해두라고." 페로사 역시도 르메인 배틀리언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진로와 직장 등을 상당히 세밀하게 고민하고 따진 끝에 지금의 앤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빵도 빵이고 계획도 잘 준비해둬야지." 이건 바텐더가 손님에게 해주는 걱정보다, 손위의 언니가 동생에게 해주는 걱정에 더 가까웠다. 지금 이 자리에 만일 아스타로테가 같이 있었더라도, 아스타로테도 페로사의 말에 맞장구쳐주지 않았을까? "말은 고맙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요~ 여차하면 다른 예비품이 있으니까." 그러나 웃는 얼굴이 곧 짜게 식는다. 짜게 식은 얼굴로 페로사는 이리스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뭐 귀엽긴 하고, 재롱도 귀엽고. 근데 그 포즈는 이상해 욘석아." 당사자들은 모를 사실이지만, 피피에 이어 이리스도 일일 도전과제 '페로사 얼굴 짜게식도록 만들기'를 달성했다.
"최악의 지옥에 굴러떨어져 보면 어딜 가더라도 천국처럼 느껴지는 법이니까." 이리스를 바라보고 있던 페로사의 미소가 문득 그 미소의 형체만 남기고 빛을 잃는 것 같다. 페로사에게 순간적으로 드리운 그 그늘은 이리스에게도 대단히 익숙한 채도를 띄고 있었다. 그 그늘이 스쳐지나간 것은 잠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리스에게 내어보인 그 미소마저도 완전한 행복에서 스스로 이루어낸 미소가 아니라 누군가의 것을 보고 모방한 미소라는 듯이.
전쟁이 끝났다고, 그 폐허가 원래대로 돌아오던가?
그러나 이내 자신도 바텐더를 해보겠다는 이리스의 말에, 페로사의 얼굴에 서린 쾌활하게 반색하는 기색은 확실히 그녀의 것이 맞아 보인다. "걱정 마, 이리스. 나도 술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 이렇게 바텐더로 벌어먹고 살고 있는 거니까. 내가 좋은 스승은 못 되어주겠지만, 그거라면 널 조금 도와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