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힘들게 노력했고 멀리까지 도달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나는 몰락해야만 했고 내가 가진 걸 전부 잃었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우와, 여러개가 있는 모양이구나~" 마치, 자신이 원한 술의 종류가 다양할 줄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재잘거리기 시작하는 이리스였다. 꽃받침을 하곤 방긋 방긋 웃어보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장난기가 샘솟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페로사의 시선이 느껴지자 '히히' 하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덤이었다."아얏! 언니 너무해에~" 오른손을 들어 딱밤을 먹이는 페로사에게 엄살 섞인 소리를 내곤 가볍게 울상을 지어보인다. 물론 이전에 페로사와 열심히 즐겼던 기억이 있긴 했지만, 이리스에겐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언니, 언니. 오늘은 이리스 완전 준비만전이거든~ 걱정할 것 하나도 없거든~"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이는 페로사에게 지난번과는 다를거라며 자신만만하게 다시 턱받침을 하고선 페로사를 바라본다. 물론 다를거라곤 하나도 없지만, 아무튼 지난번과는 다를거라 주장한 이리스는 위스키병을 고르는 페로사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본다. 저번에도 페로사가 골라준 술들이 꽤나 이리스의 입을 즐겁게 해줬기에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확신을 하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채워지는 글라스를 응시하던 이리스는 잔이 채워지자 망설임없이 그것을 집어들어 입에 털어넣는다. 첫잔은 원샷, 그건 이리스의 규칙 아닌 규칙이었다. 단숨에 입안으로 삼키자, 입안 가득히 퍼져나가는 묵직한 향에 게슴츠레 반쯤 감겨있던 이리스의 눈이 커진다. 입안을 휘젓고 천천히 목으로 쓸려내려가며 화끈한 열기가 목을 휩쓸고 지나 내려가자 이리스의 입술 사이에서 '크으' 하는 만족스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 ....진짜, 내가 원하던게 이거야, 언니. 진짜..와, 진짜 너무 좋다...크으...이거지이~ " 페로사에겐 아쉽게도 더욱 더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여전히 남아있는 알코올의 여운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이리스였다. 몸으로 어느정도 뜨거운 알코올이 퍼져나가는 듯 하자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입안에 남은 향을 즐기곤, 들려오는 질문에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 눈이 와서 그런가, 오늘 일은 별거 없더라구. 별탈 없이 마무리 해서 서류 작업은 부하들한테 넘겨두고 바로 퇴근했지~ 근데 퇴근할 때 언니 생각이 빳~! 하구 나버려서 이렇게 와버렸지. 헤헤. "
베시시 웃는 얼굴로 ' 나 잘했지? ' 하고 묻는 듯 바라보는 이리스. '아, 나 이걸로 한잔만 더 줘~ 이번엔 조금씩 음미해볼래~. ' 이리스는 가볍게 말을 벗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무래도 'NO REMORSE'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언니는 별일 없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리 언니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라던가?" 이리스는 '바로 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1분을 쪼개면 60초가 되고, 그 60을 세는 시간조차 길다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4년을 넘어 5년을 바라본다면, 그걸 초로 센다면 길고도 영겁 같을 것이다. 에만은 가진 것은 연락처 몇 개인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열다섯의 패기가 넘치던 소년. 서로 낮은 곳에서 시작하던 동업자. 지금은 서로 각자의 위치에 선 친구.
아, 이 앙큼한 친구야. 에만은 자신을 향한 뒷조사를 알았을 때 머리가 차게 식었다. 오래간 만난 친구라 벽이 허물어졌긴 했지만 다시금 벽을 쌓는 느낌이었다. 하물며 오지도 않았을 때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온 건지 속으로 원망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차분히 생각했을 때, 서로를 몰랐다는 것을 떠올리곤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많아.
에만은 용왕과의 만남을 이후로 방에 돌아와 상념에 잠겨있었다. 거진 7년이었나? 오래간만에 만난 상봉인데도 그렇게 감회가 새롭지는 않다. 참 웃긴 일이다. 5년을 초로 쪼개면 오랜 기간인데, 7년을 초로 쪼개도 오랜 시간인데. 느끼는 점이 너무나도 달랐다. 침대에 누워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의뢰인 줄 알았다. 아니면 하멜슨 씨가 호의를 베풀어 온 룸서비스거나. 에만은 가면을 뒤집어쓰며 몸을 일으키다 멈칫했다. 너구나.
에만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맞서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신뢰 관계를 위한 거야, 감정에 휘말리지 마. 작은 불신은 에만에게 속삭였다. 명심해, 절대 휘말리지 마. 에만은 문을 열었다. 여전할 정도로 잘 지내는 내 친구. 에만은 "들어와." 하고 짧게 말했다.
에만은 늘 그렇듯 맨발이다. 후드를 쓰고, 머리는 부스스하며, 가면을 쓰고 있다. 에만 너머의 방은 깔끔하며, 다른 점이라면 책상 위에 새로 놓인 목갑이다. 아, 하나 더. 현관이다. 어디 밖에 나갔다 왔기라도 했는지 신발이 현관에 나와 있었다. 늘 신던 낡은 신발이 아닌 흰색 캔버스화. 이질적인 붉은색. 이제 마르기 시작했지만 분명히 저건, 피다. 아랫단을 전부 적시고 앞코까지 선명하게 굳어있다. 크고 선명한 지문도 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른다. 신겨주기라도 했는지, 붙잡히기라도 했는지. 피가 부자연스럽게 묻어있다. 에만은 신발에 신경을 쓰지 않고 터덜터덜 뒤로 돌았다. 늘 그렇듯 의자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그 준비만전이라는 게 안 가고 뻗댈 준비면 일주일 출입금지니까 그렇게 알아, 요 녀석아." 페로사의 얼굴이 꼬깃꼬깃 구겨졌다. 열심히 즐긴 기억이라고 해도 이리스 입장에서나 열심히 즐긴 기억이지, 바 문 닫을 시간이니 나가라고 해도 요지부동,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라 그야말로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뉴 베르셰바에서 사귄 몇 안 되는 절친한 친구의 부하이니 망정이지 안면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어오면 진상이라고 해도 할 말 없었다. 그러나 페로사는 안면 있는 사람한테는 그렇게까지 모질지 못했고, 찌푸렸던 인상도 조심스레 피고는 이리스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잘됐네 그래, 이 그지깽깽이 같은 동네도 하루 정도는 평화로운 날이 있어야지."
다만, 그러자마자 우리 언니 귀찮게 구는 녀석들- 하는 이야기를 이리스가 꺼내는 바람에, 페로사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슬슬 해탈의 지경에 드는 미소를 얼굴에 은은히 거는 것으로,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도 '할 말은 많으나 하지는 않겠다'라는 말을 완벽히 표현해보였다. 페로사는 찬장으로 손을 뻗어 위스키 글라스를 꺼내고는 냉동실 문을 열고 수건으로 얼음을 거머쥐어 꺼냈다. 그리곤 카빙 나이프를 쥐고 경쾌한 손놀림으로 얼음을 손질하기 시작한다. "이건 샷으로 마시는 게 제일 좋지만... 니트로도 못 먹을 건 없지. 먹어보고 별로면 말해, 드람뷔 부어줄게."
특이하게도 십이면체 모양으로 깎인 얼음공이 잔 안에 떨룽 떨어졌고, 그 위에 주홍빛을 띈 금색 액체가 다시 한 번 따라졌다. 두 번째 잔이 이리스에게로 내밀어졌다.
"뭐, 내 바에 오는 손놈들은 내가 손봐줄 수 있으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마셔보면 확실히 아까의 그 모닥불의 느낌이 변한다. 옅어진다? 옅어진다기보다는, 불이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모닥불 같다. 알싸한 알코올향과 풍부한 나무향 뒤에 숨어있던 훈연향이 고개를 드는 묘한 변화였다.
"얼마 전에도 열두 놈 정도 손봐줬으니까."
페로사는 마땅찮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 특유의 우거지상 웃음을 지었다. 펄펄 내리는 눈에 덮여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만일 맑은 날에 왔더라면 이리스는 앤빌로 들어오는 길목이 수상할 정도로 반짝반짝하게 잘 청소되어 있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