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거, 거 참 우습네 산다는 거, 구역질이 나 산다는 거, 짐승과 내가 뭐가 달라 결국 죽으면 땅에 묻혀 썩을텐데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자신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무슨 이유 때문에 이곳에 있었는지 어느것 하나 뚜렷한 기억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뭔가가 변해도 단단히 변해버린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뭔가 큰 사고가 있었나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계절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자신은 줄곧 이 모습 그대로인데, 어느 누가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렇기에 때때로는 타인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들 때가 있었다. 딱히 도망자의 처지인 것도 아님에도 그녀에 대한 도시의 예우는 딱히 유쾌하지 않은 일들 천지였으니까,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익숙한 시야가 눈을 어지럽힌다. 어느 것 하나 초점이 잡히지 않는 구름 한가운데의 세계,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마주보려 하자 그때서야 무언가 깨달은듯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비가... 오고 있네요..."
어쩐지 방금 전부터 귀를 간질이는 경보음이 들렸는데도 망상 속에 있었던터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며 동공에 닿아 가볍게 찰박이다가도 이내 눈물인것처럼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불현듯 든 생각은 그 이후였을까?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들고다니는 짐들이 비에 젖거나 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일이 되었기에 그녀는 어딘가 비를 피할만한 장소를 살펴보기로 했다.
찰박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져서 발목을 서서히 적셔갔고 머리카락도 물기를 머금어 힘없이 늘어질즈음, 마치 그때가 아니면 보기 힘들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알수 없는 섬찟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건물에 도착하게 되었다.
옷이야 좀 젖었을진 몰라도 짐들은 무사하다는걸 뒤늦게나마 확인한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한층 차분해진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때서야 왜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는지 깨닫게 되었다. 익숙한 건물의 외관, 그러면서도 수상하게 많을 자재들, 일단 이름부터가 서슬퍼런 쇠붙이들을 취급할것만 같은 가게였을까? 그 내부를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 가게에 딸려있는 다른 건물은 누가 봐도 고물상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아니, 고물상에 가게가 딸려있는 걸까?
"주인분이 계시거나 하면 좋을텐데 말이죠..."
라고 혼잣말 하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자신의 상황을 깨닿고 조금은 서글픈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적어도, 비를 피할수 있을만큼의 시간동안은 머물러있으면 좋겠다만...
무슨 생각에서인진 몰라도 그녀는 어떤 지역에서 비오는 날 천인형을 걸어두는 묘한 풍습이 있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놓고서 맑게 개인 주변경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 밑으로 들어온 어떤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악마같은 부정한 것들을 수놓은 초커, 피어싱, 그리고 붕대…? 붕대를 감은 소녀가. 외투나 스커트도 고딕한 분위기다. 고스족 코스프레같은건가?
"…" 게다가 움직일때마다 묘하게 쩔그럭거리는 저 품속의 무언가. 대체 뭘 저렇게 바리바리 싸온거지? 부모님 심부름이라도 나왔나.
"…아, 이거." 조금 생각하느라 넋 놓고있다, 몇 초 뒤 아저씨에게 나이프 두 자루를 건넸다. 여전히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크레딧 카드와 함께. "…안 돼." 그리고 돌아오는 아저씨의 단호한 목소리. 젠장. 빠르게 노란 보호복 주머니를 뒤적거려본다. 없다. 어디에도 없다. 현금이. 집까지 오르락 내리락 반복하기도 귀찮다. 한번 말을 걸어볼까.
나는 내 밑에 위치한… 그러니까 대략 60cm 가량 밑에 위치한 꼬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려보았다. "저기… 그, 돈좀 혹시." "…" "있… 아니, 빌릴 수 있을까."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일런진 모르겠지만. 방독면 너머로 기계음 섞인 음성이 나직이 퍼져나간다.
통증. 그리고 붉은 것이 뺨 타고 흐른다. 그리고 발렌타인과 대조되는 새된, 진실된 웃음이 방에 울려퍼졌다. 벌레가 웃는 꼴은 처음 보니? 봐두렴, 꽤나 재밌는 꼴이란다.
"아, 미스터 발렌타인. 친애하는 미스터 발렌타인."
팔 뻗어 제롬이 총 쥐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밀어내기 위함이 아닌 고정시키기 위함이다. 손끝이 퍽 따뜻하고 다정스럽다. 어린 동물 대하는 손길이다. 고해하자면 밀어내고 싶은 충동도 없잖아 존재했으나 억눌렀다. 이마에 총을 맞는다면 지나치게 깔끔하게 끝나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래선 곤란하다. 아주 곤란하다.
"나는 내 뒤에 아무것도 없고, 오직 나 자신만을 믿는답니다."
공포를 느낀다 이야기하면서 제 조사 하나도 안 한 꼴이 퍽 우스워지기도 했다.
"내 조사를 맡은 이가 그런 것 안 알려주던? 이상하네, 3분만 투자하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다 알아낼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사내를 곤충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선 제롬 발렌타인이 그 누구보다 가장 진실에 가깝게 다가갔다 말하는 것이 옳다. 인간과 가장 공통점이 적은 생물, 그래서 가장 혐오스러운 족속들. 인간이 벌레를 닮았다 이야기하는 것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모욕으로 통했다.
"하나 충고를 해주자면, 미스터 발렌타인.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숨기지 않는 편이 좋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려보다, 두 눈을 찌푸리며 인상 쓴 얼굴로 시안은 잠시 거울을 노려다 본다. 그리고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어본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선글라스를 쓴다. 그러는 모습이 마치 무대에 나서기 전 표정 연기를 해보는 배우 같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하는 웃으며 툭 말을 던진다.
"사장. 그래봐야 사장은 귀엽게 보일 뿐이라니까." "시끄러워."
곁눈질하며 시안은 나지막한 어조로 말한다. 화를 억누르는듯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에 괘념치 않은 듯 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안의 뒤에 서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이며 쓰다듬자, 거울에 비치는 시안의 얼굴은 정말 화가 난 얼굴로 바뀐다.
"무섭게 보이려면 일단 그 체격부터 키워야지."
부하가 말하면 시안은 으르렁거리는 음성과 함께 돌아선다. 날려대는 주먹은 전혀 아프지 않지만, 시안이 집요하게 무릎을 차고 늘어지는 탓에 버티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부하는 웃으며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선다. 그런 도망치는 부하의 뒤통수에 대고 시안 씩씩거리다, 지친 듯 다시 거울을 본다.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지만. 전혀 그런 인상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앳된 얼굴.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시안은 한숨을 내쉰다.
사내는 속으로 비웃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왜 이 곳까지 직접 오셨겠어. 이어지는 말엔 이게 집안 문제로 들릴 만한 어조가 내포되어 있었다. 좋지 않다. 내부 싸움에 휘말리면 이래저래 귀찮아진다. 이것 재고, 저것 편 가르고, 그 와중에 자기 목숨 염려까지 해야 하지. 성가실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니 저 여자가 어느 정도 못마땅해하는 걸 감안해서라도 발을 빼는 편이 낫다. 애초에 사내는 기계를 자처한 처지다. 시체를 받고, 처리해서, 가격을 매기고, 그 대가로 일정량의 연료를 공급받는다. 누군가가 분쇄기가 자신이 파쇄해서는 안 되는 종이를 알아본다든가, 사용자를 알아본다는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다면, 기계가 고장났거나, 그 작자가 광인인 것이 틀림없다.
"짐작하다시피, 미안하지만 기억나지 않는걸, 미스 아슬란."
남자일수도, 여자일수도. 노인, 어린아이, 청년, 갓난아기. 코트를 입었던가? 아니면 밍크? 중절모를 썼던가? 그것도 아니면 야구모자? 아니, 모자를 쓰긴 했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걸.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내는 구겨진 서류를 반듯이 펴서 파일 안에 넣었다. 이미 구겨졌던 탓에 약간 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미안하지만,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걸."
피피 프로스페로의 장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가 하등 중요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에 있었다. 사람들은 중요치 않은 인물에게 신경을 쏟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따금 그에게도 입이 있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따라서 그는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불행히도 알아버릴 때가 꽤 잦았다. 두 번째 장점으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반응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기계의 역할만 수행했다. 제 주제를 알았다.
"유감이야. 알다시피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끔이라면 그런 것도 좋지 않겠어." 클래식 칵테일의 알코올이 향취 뒤로 느긋하게 퍼진다. "평소 마시지 않던 상큼한 칵테일을 마셔보거나, 평소 피던 것과 다른 담배를 태워보거나 하는 리스크 작은 모험들 있잖아. 그러다 보면 새로운 걸 발견할 수도 있고." 달콤한 담배연기를 바 너머의 허공으로 길게 내뿜고 페로사가 다시 에만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에만의 얼굴 위로 에만의 눈처럼 투명하고 말간 미소가 알코올 기운에 섞여 한가득 피어오르는 모습이 페로사의 눈 위에 맺힌다. 그 말간 미소에 페로사는 바텐더로서의 자신의 한 잔이 손님에게 인정받았을 때의 뿌듯함을 넘어선 어떤 감정이 마음속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보드카 위에 그레나딘 시럽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 웃음을 자기 색으로 칠해보고 싶다고. 자신의 손으로 취하게 만들었고, 자신과 이야기하면서 피워낸 웃음인데도 그 이상을 원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취한 걸까. 겨우 마티니 한 잔과 블러디 메리 한 모금에.
"내가 푸른색 칵테일들을 좋아하거든. 내 최애 중 하나를 추천해준 건데 입맛에 맞다니 기쁘네." 페로사는 찬장에서 아끼는 새파란 샷글라스와 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있는 그것에는 낯선 상표와 선인장이 자라있는 사막의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혼자서 심심하거나 단골들과 대작할 때 가끔 꺼내먹는 것이었다. "내가 좀더 어렸을 때, 지하투기장에서 일하게 됐던 적도 있어. 힘들다는 수준을 넘어서 매 순간이 목숨을 건 모험이지. 경기장에서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순간이. 그런데 그 지옥 한가운데에서도 한 할아버지는 계속 그런 이야기를 했어. 이 세상 어디엔가는 파란 하늘이 있다고. 파랗게 달아올라 군청색으로 저물어가는 하늘 위에 푸르른 수평선이 펼쳐진 낙원이 있다고. 그래서, 그 모든 게 끝나고 나서도 난 푸른 칵테일에 그렇게 마음이 가더라." 그리고 그녀는 샷글라스에 그것을 따랐다. 특유의 독특한 정취가 있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향기. 데킬라 향기라는 말로만 설명되는 그런 향기였다. "더 어렸을 때 분명 그런 하늘을 본 기억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붉은 하늘 아래 지옥 변두리에서 사는 게 너무 익숙해졌고, 그 때처럼 과감한 모험을 하는 것도 겁이 나. 그런데 아직도 나는 미련이 있나 봐- 그래서 파랗고 말간 것들에 계속 마음이 가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고."
페로사는 바 위에 놓여있던 것을 집었다. 아까 애비에이션 안에 짜넣고 남은 레몬 조각이었다. 그걸 집어서, 그녀는 자기 입이나 잔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에만에게로 들이밀었다. 상큼한 향기와 함께 에만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이 선득하다. 에만의 목 한쪽에 레몬즙이 가득 묻었다. 놀라거나 항의할 틈도 없이, 페로사는 통에서 입자가 가는 소금을 한 줌 집어들고 레몬즙 위에 뿌렸다. "그렇지만, 가끔이라면 그런 것도 좋으니까..." 이 정도만, 딱 이 정도만은 괜찮잖아. 에만을 바라보며 페로사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샷글라스에 따랐던 데킬라를 입에 탁 던져넣듯이 털어넣었다.
"그러니까 나도 하지 않던 짓 하나 해볼까?"
데킬라 냄새가, 눈웃음을 가득 짓고 있는 푸르른 눈동자가, 옅은 시트러스 냄새가, 바의 조명 아래에서 물결치는 금발머리가 흐릿하게 울리며 다가온다. 에만의 목에, 방금 스쳐갔던 차가운 감촉과 까슬까슬한 감촉과는 또다른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 에만의 목 한쪽을 느릿하게 감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데킬라 냄새가 어지러이 풍긴다.
농담이지? 제롬이 물었고 여인은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만 있었다. 당혹스럽고 당황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더 끌어가기만 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건 장난일까. 아닐까.
바늘로 콕 찍듯이 귓볼을 깨문 여인의 행동 때문에 작은 신음이 들리고 여인을 안은 제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옷, 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옷 덕분에 참 생생히도 느껴졌다. 그 힘으로 밀어냈으면 여인은 그대로 떨어져 주었을 텐데. 제롬은 그러지 않았다.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도 날 선 소리는 하지 않아서. 그런 부분이 제롬 답다고 해야 할지.
"그러니까, 아니래도."
여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되려 얼굴을 제롬의 목덜미로 가까이 하며 푸흐흐, 하고 웃었다. 짧게 웃음을 흘리고 여인에게 기대는 제롬의 등을 쓸어내렸다. 피곤하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지만 귀여워서 조금만 더 밀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키득. 비눗방울이 터지듯 웃은 여인이 제롬의 귓가에 세상 다정하게 소곤거렸다.
"해줄 생각이 없길 바라는 거니. 있길 바라니. 장난 아니라고. 나는 분명히 말했는데. 농담 같았을까."
그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누구나 농담이나 장난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일게 뻔하지 않은가. 사실 여인도 알면서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일부러 대답을 안 하고 살살 약올리듯 건드려대는 언행들이 그러했다. 여인의 손이 제롬의 뒷목을 살며시 그러쥐었고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나였어. 조금 뻔뻔하게 굴었다고 내가 아닌 건 아니잖아."
가면을 쓴 것도, 흉내를 낸 것도 아니라, 그저 조금 뻔뻔하게 굴었을 뿐이라는 여인의 말이 이해가 되었는지 모른다. 말도 행동도 친절하지 않은 채로 여인이 물음을 던졌다.
마치 스프링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고양이가 오이를 볼 때처럼, 소녀는 건드리자자자 바르르 떨었다. 애처롭게도. 제법 자기주장이 강한 복장 치곤 그렇지 못하게 앳된 얼굴과 성격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 뭐. 때리진 않을거니까." 그러다 문득 소녀가 자신의 나이프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대거형 칼날에 밑단에 톱날을 지니고 있는, 길이 30cm 가량의 컴뱃나이프였다. 아름다운 검은 코팅이 새겨져있는 무광의 날 아래로 카키색의 쉬스와 손잡이가 위치한다.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썩 괜찮은 편임은 스스로도 자부하는 바이다.
그리고 "저의 칼들만은…" 이라고? 이녀석, 제법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 나는 조금 친근감이 들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만져봐도 된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조금은 가엾게도 느껴져서 그런지, 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너무 시원해!' 칼갈이 쪽에서 뭔가 소리가 난다. '그래, 거기야 거기! 손잡이랑 날이 맞닿은 그 부분!' 나는 경악했다. 여기서 갑자기? 이렇게 개방된 공간에서, 동네 사람들 다 듣는데 소리를 낸다니? 이 무슨 교양없는 물건이란 말인가? "이런 씨…" 나는 재빠르게 달려가서 나이프를 홱 낚아챘다.
다행히도 내가 힘을 줘서 만지자, 조금 아팠는지 소리내는 것을 멈췄다. 휴, 십년감수했다. 하지만 옆에서 혹여 이상하게 보진 않을지? 나는 소녀의 두 눈을 잘 관찰한다.
붉은 하늘의 도시에도 비는 내린다. 아니, 사실은 언제라도 쏟아부을듯이 위태위태한 하늘이다. 구름은 천둥을 몰고다니며 으르렁거리고, 그 사나운 기상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 하듯이 르메인의 마천루는 떳떳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연고도 없이 흐르는 피는 곧,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 붉은 적운을 이루어, 언제라도 피의 빗물을 이루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뉴 베르셰바의 하늘은 위태로운 하늘이었다. 언제 비가 내릴까? 언제 비가 멎을까? 언제 하늘이 개일까?
"오~ 좋은 그림솜씨잖아~"
...따위의 감상같은 것은 어찌되도 좋은 것처럼, 이 세상의 속세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듯 무구하면서도 아주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쥬의 어깨 너머, 그 등 뒤.
"헤, 이쁜 화백 누님. 여기서 뭐해?"
돌아보면 거기엔,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팔짱을 낀채로 가게의 쇼윈도에 기대어 늘어지는 입꼬리로 시덕거리는 웃음을 짓고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바로 쥬가 비를 피하고 있는 이 천막의 주인... 이면서, 동시에 그 천막이 달려있는 가게, 그리고 그 옆에 고스란히 연결된 서슬퍼런 고물상의 소유자인- 괴짜 천재 무기 기술자 로미 카나운트였다. 그녀는 반정도 감긴 그 눈으로 실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훑더니 의아하다는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으응~? 뭐야아~ 계속 그렇게 비 맞고 다닌 거야? 헤, 어쩔 수 없구마안- 서비스다. 비도 피할겸 안에 들어와서 둘러보고 가시는건 어떠셔~? 마침 지금 이 로미님이 직접 재설계한 슈퍼-핫-뜨거 난방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거든~"
그러면서 발만을 움직여 신발의 뒷면와 앞코 만으로 문을 열어보였다. '띠링띠링- 이랏샤이마세에-'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여 귀엽지도 않게 울리는 것은 그 가게의 도어벨소리였다.
읽힌 마음에 놀란듯, 소녀의 허리가 쭉 펴진다. 하지만 읽혔다고 할 것도 없겠지. 소녀의 마음은 누가 보아도 페퍼의 나이프에 온전히 사로잡힌듯한 모습이었으니. 거기에 주인의 허락까지 있었다. '마, 만져봐도 된다, 고...' 소녀는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천천히- 손을-
"...!!"
페퍼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나이프를 낚아채는 모습에 칼갈이가 벙찐 것은 물론, 소녀 또한 그대로 굳게 되었다. 페퍼는 그런 소녀의 눈을 살핀다.
"...그 칼..."
하지만, 소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고-
"이, 이 부분이... 조금, 약한 것 같은, ...데요..."
오히려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품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가리키며 첨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이프가 페퍼의 뇌에 말을 걸었던 것과 똑같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