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순 없지 않았을까? 죽을 것만 같은 꿈결에 이토록 사랑받는 느낌이 들고있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흐흥, 아줌마 말에 부끄럼타기는." 페로사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에만의 코끝을 살짝 꼭 눌렀다 떼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마음껏 부끄럼타도 돼. 여기에서는." 하고 덧붙였다. 종종 장난스럽지만, 그럼에도 배려심이 그 바탕이 되는 것. 그 기질에 대해 그녀는 경호원 노릇 하면서 얻은 습성이니 직업병이니 하는 말을 덧붙여서 둘러대곤 했지만, 그것은 역시나 그녀의 천성인 모양이었다. "내 추천이라. 마침 전부터 추천해주고 싶은 게 있었어. 어디-" 페로사는 랙에 손을 뻗어 탱커레이를 꺼냈다. 그리고 비피터까지 꺼내서 탱커레이와 비피터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무엇을 만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탱커레이가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비피터를 원래 자리에 되돌렸다.
페로사는 현재를 살았다.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쟁취한 끝에, 그녀는 그녀가 바라는 현재를, 낙원까진 아니지만 안식처라고는 해줄 수 있는 현재를 손에 넣었고, 그것은 이 바에 고스란히 펼쳐져 바에 찾아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만에게도 평등하게. 잔 안에도 잔 밖에도 폭군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에만에게 묘한 방향으로 상냥했다. "그래서 좋다면, 까짓것 언제라도 준비해둘 수 있지." 하며 페로사는 사용한 집기들을 싱크대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리큐르들을 꺼내려던 찰나, 에만이 마음 속으로 열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며 꺼낸 말에 에만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래?"
문득 좀전에 트톡에서 돛대를 뺏겼다고 칭얼대던 이름모를 사람이 떠올라서 페로사는 가볍게 웃었다. 그 사람과 에만을 동일시하는 건 아니다. 그냥 돛대를 뺏기는 불쌍한 사람들이 요즘 좀 많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만드는 동안 한대 할래?"
페로사는 아까와 똑같은 요령으로 담배 팩을 톡 털었다. 담배 한 개비가 뜯겨있는 팩에서 반쯤 빠져나왔고, 페로사는 그 팩을 재떨이 하나와 함께 에만의 앞에 놓아주었다.
에만이 담배를 집어들면, 페로사는 성냥불을 붙여주거나 라이터를 내밀거나 하는 게 아니라 불똥이 붙어있는 담배를 문 채로 에만에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겠지.
"글쎄요.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있어 봐야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겠죠. 칼보단⋯ 그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이 근본적인 원인이지 않을까요?"
소녀의 말은 얼핏 듣기엔 옳게 들렸지만, 결과적으론 틀렸다는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칼이 위협적인 흉기인 것은 지당하나 아무나 쉬이 휘두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우선 저 같은 사람이 소녀처럼 무뢰배를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총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좋은 칼을 준대도 썰 수 있는 건 온전히 몸을 맡긴 채 누워있는 환자나 이미 해체되어 식탁으로 올라온 고깃덩이뿐일 것이다.
"정말요. 난 빈말 못해요. 어울리니까 어울린다고 하죠."
이건 진심이었다. 반지가 제 취향에서 벗어난 것과 소녀와 어울리는지는 별개의 문제니까. 이어진 소녀의 불평에 "너무했네요." 하며 맞장구쳤다.
"평범하고 이상하단 기준은 누가 세웠나요? 다수의 취향에서 벗어났다고 틀린 건 아니잖아요. 다른 것뿐이지. 그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이상한단 소리를 들어야죠."
사실 주변 시선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완전히 공감 가능한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데 그만큼의 완벽함이 필요하진 않았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 검지를 들어 소녀의 반지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중독을 최소화 할 정도로만 마약을 할 사람이라면 아예 마약에 손대지 않는다. 마약을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더 이상 스스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않던가. 아, 제 목숨이 가장 중요한 높으신 분들이라면 그런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그러다 하웰은 브리엘의 명함을 받았다. 카두세우스. 아, 과연 카두세우스인가. 사람의 목숨에 관련된 건 손대지 않는다던 그 조직. 그런데, 목숨만 살려놓으면 그것이 다인가? 이 도시에선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싶은 순간이 있지. 팔다리 다 잘라놓고 목숨만 붙여놨으니 괜찮다,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단 한 번도...라.... 음, 성격 나쁘단 소리는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데.... 그런데 언제부터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죽이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해친 적이 없어요? 정말로?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물어볼 사이도 아니었고, 이런 마무리였으니 아마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아뇨,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는 좀 더 있다가 갈 생각이라.”
하웰은 굳이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찻잔을 내려놓았다. 왠지 심란해진 느낌이라 몸을 일으키는 브리엘을 보았다가 이내 턱을 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두세우스의 사람과 척을 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긴 했으나 굳이 그녀를 살갑게 배웅해줄 만큼의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하웰 그 스스로도 자신이 얼마나 모순적인 사람인지, 자신이 이런 집안에 태어나 그런 것들을 만든다는 것이 가끔은 끔찍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아직도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남아있다는 게.... 아무래도 그를 침잠하게 만드는 성 싶었다.
/막레로 해도 좋아! 아니면 브리엘주가 막레를 줘도 괜찮고! 편한대로! 브리엘과의 일상 즐거웠다...!
제롬은 등에 돋는 소름을 무시하고선 아스타로테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방금 아스타로테의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지만 착각이길 빌면서, 그는 아스타로테에게 칭찬이라며 두어번 정도 가볍게 쓰다듬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공손한 자세의 그녀였기에 쓰다듬은 쉽게 성공했을수도, 그녀가 피해 실패했을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제롬이 곤란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막상 쓰다듬으려고 하면서도 동공이 살짝 떨린 것은 그의 단련된 사교술로도 가릴 수 없는 마음 속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쓰다듬으려면 필연적으로 아스를 쳐다봐야 했는데, 시선 둘 곳이 없으니 당연했다. 결국 그는 아스타로테의 눈만을 쳐다보기로 했다. 저런 의도가 다분한 옷은 안 보는게 정신적으로 이로웠다.
그는 진정하기로 했다. 결국 어찌되었든 아스타로테의 장난일 뿐. 자신은 거기에 적당히 맞춰주며 웃으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그것은 제롬 자신이 업으로 삼는 일이었으며, 자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거니 물어볼 수도 있겠지. 신경쓰지 마라."
제가 좀처럼 얼굴을 안 비친 것은 알고 있나보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며 선물을 바라보았다. 저 뇌물(?)이 아스타로테의 장난이 조금 덜 짓궂어지도록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의 선물은 의도와는 달리 좋은 구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아스타로테가 가까이 다가오자 제롬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도망치고 싶은데, 그럴 새도 없이 팔이 붙잡혀버렸다. 마치 뱀이 자신의 팔을 얽매는 느낌을 받았을까. 그것도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뱀 말이다.
한 팔이 끌어안긴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야 팔짱 정도는 몇번 경험했으니까. 문제는 거리감과 복장이다. 아스타로테와 이정도로 밀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특히 그녀의 면적이 적은 메이드복과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시야에 들어오는 그녀의 위치는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갓 20살이 된 청년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어떻게 보답한다는 거지?"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제롬은 그녀의 손에 이끌리듯 따라가 의자에 앉혀진다. 부드러운 카펫의 감촉을 감상할 새도 없이 자신의 사이에 다리를 밀어넣는 그녀의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잔망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에 오히려 태연히 허릿춤에 손을 두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아스타로테에게 가볍게 속살거린다.
"그 입으로 직접 듣고싶군."
허릿춤에 손이 둘러졌다면, 그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자신을 밀어넘길 듯 구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더욱 밀착하려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