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순 없지 않았을까? 죽을 것만 같은 꿈결에 이토록 사랑받는 느낌이 들고있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낯간지럽고, 또 낯설다. 이런 칭찬은 에만에게 제법 낯선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세운 이후 가면을 썼고, 그 이후로는 웃는 날이 거의 없었다. 힘을 쏟기 어러웠기 때문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지치는 몸이 됐다. 이렇게 웃는 것도 드문 일이었기에 누군가 자신의 미소에 대해 칭찬을 할 적이면 속이 배배 꼬이고 간지러웠다. 애당초 칭찬을 할 사람도 없었다. 가면 속 얼굴을 본 사람은 눈앞의 여성과 페퍼, 그리고 리아나를 제외하면 전부 죽었다. 정확히는 에만의 저격수가 죽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에만은 손가락으로 잔 가장자리를 훑었다. 불현듯 눈앞의 여성이 가진 과거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차마 용기는 나지 않는다.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에만은 자신이 가진 과거를 내보일 용기가 없었다. 아직도 에만은 머리가 길 때면 가위를 들어 사정없이 잘랐다. 수더분한 머리카락이 될 때까지 자르고 높은 건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래서 좋은 거야.. 늘 마티니 먼저 마시고- 이걸 마셨는데.. 지금은 반대잖아."
그러니까 특별한 거야. 에만은 마티니 글라스를 밀어주자 소지를 제외한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손잡이를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널찍한 면을 받치고 입가에 가져다 댄 뒤 기울였다. 마티니는 특유의 우아함이 있다. 진한 향은 올리브의 기름기와 특유의 향이 녹아들어버린다. 그렇다고 상냥하게 어우러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질척하게 진탕 휘저어진 맛이다. 에만은 잔에서 입을 떼고 입안에 담긴 한 모금의 액체를 음미한다. 느릿하게 삼키고 비강에 들어차는 느낌을 받아들였다. 이런 감상을 뱉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술에게 감히 인간의 감정을 붙인다면 에만에게 있어 더티 마티니는 말 그대로 난폭한 녀석이었다. 그런 폭군을 입안에 가둬버리고 우위에 서 혀 위에 굴리니 얼마나 배덕적인가. 에만은 잔을 밀어 페로사의 앞에 마티니 글라스를 돌려놓는다. 그리고 턱을 괴며 페로사의 행동을 지켜봤다. 라이터도 아닌 성냥, 그리고 손에 든 동전. 옛날도 보통 옛날 취향이 아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취향일까 싶던 찰나 주크박스에서 느린 비트가 흘러나왔다.
"아.. 맞다. 담배. 나 담배 다 떨어졌는데.. 덕분에 떠올랐네. 으음, 다음 잔은.."
이제 열세 번째 상상속 살인이다. 에만은 잠시 고민했다. 마티니? 아니면 가벼운 걸로 마실까. 에만이 하이볼 글라스의 가장자리를 다시금 손가락으로 빙빙 매만지다 흘끔 페로사를 쳐다봤다. 아마도 담배 연기를 뱉고 있을 여인을.
문이 열리고 마주친 그 시점에, 제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걸 여인이 눈치채지 못 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은 기대한 것도 있긴 했다. 제롬도 자신처럼 당황해서 뭔가 반응을 보여줄 지도 모른다.
...라는 아주 작고 사소한 기대를 했지만 기대와 달리 제롬은 그런 티를 일점 드러내지 않았다. 그 새 셰바의 사람 다 되었는지. 오히려 능청스럽게 맞대응을 해오는 모습은 여인의 무언가를 건드리기만 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같은 일종의 경쟁심. 혹은 장난기.
"네에.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주인님."
생글생글 웃으며 제롬을 잡화점 안으로 들인 여인은 문을 닫고 제롬의 곁에 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선 모습은 전형적인 메이드의 모습이었으나.
몸을 조금만 기울여도 보이는 계곡이 보이는 상의와 배와 허리를 단단히 조인 코르셋, 걷거나 몸을 돌릴 때면 아슬아슬하게 살랑거리는 스커트, 고스란히 드러난 다리는 잔그물 망사 스타킹이 허벅지 반 정도까지 덮고 그 끝을 가터 벨트로 팽팽하게 당긴 옷차림은 아무리 봐도 그냥 메이드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다분한 그런 옷이다.
제롬이 속으로 아직 당황하고 있을 때 여인은 먼저 진정하고 지금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다. 약간의 장난을 칠 뿐이다. 거기까지 제롬이 어울려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제가 실언을 했네요. 주인님이시니 보러오시는게 당연한 것을."
제법 그럴 듯 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드는데 제롬이 뭔가 내밀었다. 한번쯤 본 것도 같은 선물용 포장가방. 받아들고보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안에 또 포장이 되어 있구나 싶었다. 그러고보니 제롬이 여기 온 것도 꽤나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소홀했던 것에 대한 벌충, 뭐 그런 걸까. 생각하고 보니 그것도 그냥 넘기기 싫어졌다. 아니, 그저 좋은 구실이 늘어났을 뿐일까.
진의는 미소 뒤로 넘기고 선물가방은 잠시 손에 들었다. 여인은 사뿐히 걸어서 제롬의 한 팔을 감싸 안으며 제법 가까이 붙었다. 고개를 완전히 돌리지 않는 한 시선이 올 수 밖에 없도록. 그리고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실언이나 하는 메이드에게 선물도 주시고. 참 다정한 주인님이셔라. 미력한 몸이나마 그 은에 보답을 해야겠지요."
혀 끝에 사탕을 놓고 녹이듯 달짝지근한 말과 함께 여인의 손이 제롬의 손을 잡고 그대로 이끌었다. 후후. 옅게 웃음 지은 입술 사이로 가는 웃음이 새었다. 한걸음. 두걸음. 여인은 제롬을 데려와 앉도록 유도한다. 어디에? 여인이 늘 자리하고 있는 그 좌식 공간에.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그곳에. 그리고 여인의 다리 한쪽을 사이로 슬며시 밀어넣으며 조금, 더 조금, 제롬을 밀어넘길 듯 그리 굴었다. 태연히도 웃는 얼굴로.
>>731 (삑삑뽁삑) 나도 너무 좋아하는 짤이야! 귀여운 날다람쥐가 마주안다니.. 행복해지는 짤..😊 임티로도 나왔다길래 후다닥 사버렸어.😂 >>732 플로럴하거나 상큼한 계열도 가리지는 않지만 말리부 그 특유의 입안에 끈적하고 묵직하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은 안 좋아해~😉
그런 엘레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라사키는 그것을 진심어린 칭찬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에헤헤'하고 혼자서 수줍게 웃는다.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에 울고 웃는다.
"무, 무서워 하니까요... 사, 사람들은, 칼날같은거...~ 그러니까. 아마, 에, 엘레나씨도 제대로 위협만 하면, 쫓아내실 수 있을거에요..."
허나 그것은 아니었다. 엘레나와 같은 전투와는 생전 일가견도 없는 여성이 메스를 들고 위협해봤자 그 어떤 조직이 겁을 먹고 달아나겠는가. 아마도 그 날, 그들은 느낀 것일테지. 가면을 쓴 소녀가 칼날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 순간에 느낀 것 일테다. 먹이사슬의 논리에 기인한, 짐승들의 기분. 천적을 마주한 생존본능. 뱀처럼 방 안을 천천히 휘감아 지배해오는, 암묵적인 '살기'를. '여기서 죽을 수 있다'라고 그들은 느낀 것일테다. 어쩌면 조수, 그녀까지도.
...그리나 그 때의 그 살인귀는 어디가고 지금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반쯤 거짓이긴 했지만- 의사 앞에서 경직 된 허리를 꼿꼿히 펴고 진땀을 빼며 가까스로 대화하고 있는 소녀만이 남아있었다.
"엣.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그 소녀는 엘레나에게서 나온, 의외의 말(자기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응한다.
"저, 저희 선배님들은... 도통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이런 걸, 무슨, 부두술사냐고... 그렇게 말씀하셔서... 읏,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부, 부두술사는 조금 아니지 않나요...!"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지 못하는게 그렇게나 억울했는지, 지금 소녀의 눈가가 일렁이는게 살짝 눈물마저 맺혀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으. 그, 그치만... 사실은, 알고있어요...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거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거... 제가, 이상한 애일, 뿐이라는 거..."
하지만 한 편으론 알고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무치는 것이다. 인형 대신에 칼. 천사 대신에 악마. 양지보다는 음지를 좋아하는, 그런 소녀를 이해해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자르는 사람'같은 걸 이해해줄 사람은 진짜로 없기 때문에. 그런 평생에 걸친 고독한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을 다시 재확인 받는 것 같아- 사실은 그렇게까지 울컥할 일은 아닌데도, 무심코 그런 기분이 들고 마는게 지금의 소녀였다.
사내는 사탕을 혀로 진득히 굴리며 녹여먹을 만큼 인내심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 레몬은 발가락만 넣었다가 뺀 수준인, 구연산과 합성착향료 맛이 나는 설탕 덩어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 안에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아드득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듣기 좋지는 않다. 날선 송곳니로 그보다 더 뾰족히 조각난 사탕을 잘근거렸다. 턱 근육 움직이는 꼴이 퍽 신경질적인 투다.
"자기야, 자기는 나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고 있는 거야?"
손 아래 두었던 서류종이 하나가 구겨졌다. 이왕 구겨진 김에 손 끝으로 문대기 시작했다.
"돈은 받을 대로 다 받아 놓고, 이제 와서 문제삼는 건 좀 너무한 처사 아닌가? 응? 그 자식 몸뚱아리 값까지 다 쳐서 줬을텐데."
성내면서도 레몬 사탕 하나 더 까서 입에 넣는 꼴이 퍽 뻔뻔스럽다.
"-애초에, 얼굴 뭉갰고, 문신이랑 점도 다 파냈고. 사람 식별할 수 있는 부위는 못 볼 꼴로 만들어놓았잖아. 누가 와서 그거 웃돈 주고 사겠다길래 팔았지."
다시금 턱 움직여 사탕 씹었다.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도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저 쪽은 갑이고, 난 기어야 하는 입장이지. '적당히'라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피곤하게도 그랬다. 사내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달래듯 말을 이어갔다.
"알잖아, 처리 깔끔하게 해서 판 물건은 이후 행방 책임 안 지는 거."
아니면, 다른 거 이야기하는 건가? 사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것도 아니면, 자기야. 나한테 처음부터 '안 들어왔던' 시체일 수도 있지. 내가 처음으로 하는 작업이 신원 없애는 건데, 어떻게 자기네 애들이 그 시체가 그 시체인지 알아봐? 잘 생각해보자고. 나 목숨줄 귀하게 여기는 거 알면서 왜 자기 뒷통수를 치겠어."
무던히 조잘대는 그 모습에 제롬은 완벽하게 속아넘어간다. 자신의 앞에 사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뒤도 안 보고 이 자리에서 도망쳤겠지. 아니면 방심하는 틈에 뒷통수에 납탄을 박아넣으려 시도했거나. 어느 쪽이든 제롬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에서 살아남는게 목적이 아닌, 싸움 자체를 피하는 것을 바랬으니.
"...딱히 독 탄 거라고 의심하진 않았지만, 바꿔줘서 고마워."
어찌 보면 무례했으나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신경쓸 정도로 빡빡한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별로 이상한 점은 못 느꼈다.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살인이구나. 거기에, 조용히, 깔끔하게 처리해줄 사람을 원하고 있고."
오히려 가져달라는 그의 부탁에 조금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깔끔하게, 그리고 가져다달라는 말... 이거 아무래도...
"..시체를 어디에 쓰든 나는 아무 상관 없어. 대신, 이쪽까지 피해가 올만한 일은 하지마?"
예를 들자면 이 시체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다던지 같은 것 말이다. 장기밀매나 시체를 가지고 실험 같은 거?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피피와 마찬가지로 제롬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너무나 익숙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일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적당한 사람을 하나 알아. 수법은 주로 교살이라, 피도 안 흐르고 흔적도 안 남을 거야. 시체는 이녀석이 너희집 뒤쪽 쓰레기통에 넣어줄 거고. 이정도면 됐지?"
단말기를 꺼내 몇번 뒤적거리던 그는 곧이어 청부업자의 프로필이나 가격, 특징들을 줄줄히 늘어놓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그의 표정은 퍽 평화로웠다. 그는 단말기를 집어넣고는 핫초코를 집어들었다. 조금 식었지만, 그래도 아직 맛은 좋다. 한번 입을 대고 마신 그는, 느릿하게 피피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그런데 집 안에 소독약 냄새가 심하네. 청소했어?"
집안에 들어올 때부터 생긴 궁금증. 그는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남의 개인사를 캐묻는 것은 실례이나, 그에게 별로 그런 감각은 없어보였다.
밖에서 만났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나. 브리엘은 하웰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굳이 혀차는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쯧, 혀를 차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 어떤 대꾸도 입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사실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선택적 기억상실도 아니고, 밖에서 있었던 일들 중 가장 강렬하고 지독하던 기억들만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생각보다 오래 이 도시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하웰의 웃음에 브리엘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옆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나른한 기색이 짙게 드리워진 눈매를 늘어트렸다. 천천히 깜빡여지던 구리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조금 지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렴풋하게 립이 남은 입술을 질근 깨무는 낯은 그래도 똑같았다. 무감하고 건조한 표정이었다. 이래서,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 Dr. Brielle skylar를 기억하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 내가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여? 맞아. 당신 말대로 독약과 마약의 차이가 종이 한장차이라는 것도, 천천히 죽어가게하느냐, 단번에 숨을 끊어버리느냐의 차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 하루 투약 가능한 mg를 정해두면 중독성은 최소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의약품보다는 해롭고, 일반적인 마약보다는 이로운. 표정변화없이 단조롭게 중얼거리면서 브리엘은 하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까지 한 모든 말들에 모순과 이중적인 면이 가득하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라서, 웃기지도 않았다. 대신 브리엘은 그 모든 모순과 이중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카두세우스의 지팡이가 뒷면에 그려진, 카두세우스 소속이라는 명함이였다. 명함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웰쪽으로 밀어주며 브리엘의 손이 커피잔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가 테이블 위로 가볍게 주먹을 쥔 손이 잠깐 떨려왔다.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하웰의 말은 브리엘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말았다.
"성격 나쁘네. 당신 말이야. 유감스럽지만 내게는 당신의 그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을 것 같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없어. 단 한번도."
아, 머리가 아팠다. 지독한 자스민 향이 맡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브리엘은 의자 위에서 자세를 고쳐앉았다. 여전히 다리를 꼬고 있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얼굴을 싸쥐는 것마냥 턱을 괸 채 비스듬하게 시선을 꼬고 하웰을 바라본다. 제법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 거리감이 착각인양 브리엘은 다시 자세를 바꿔서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을 것이다.
"밖의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감정적이지 못한 여자라서 유감이네. 푸른 하늘이라면 지긋지긋해. 이곳의 붉은 하늘도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말이야. 더 할 이야기 있어? 이만 돌아가려고 하는데."
명함에 있는 주소는 절대적으로 피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브리엘은 하웰에게 물음을 던지며 바닥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완전히 비워내지 않은 커피를 내버려두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흐흥, 아줌마 말에 부끄럼타기는." 페로사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에만의 코끝을 살짝 꼭 눌렀다 떼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마음껏 부끄럼타도 돼. 여기에서는." 하고 덧붙였다. 경호원 노릇 하면서 얻은 습성이니 직업병이니 하는 말을 덧붙이곤 했지만, 그것은 역시나 그녀의 천성인 모양이었다. "내 추천이라. 마침 전부터 추천해주고 싶은 게 있었어. 어디-" 페로사는 랙에 손을 뻗어 탱커레이를 꺼냈다. 그리고 비피터까지 꺼내서 탱커레이와 비피터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무엇을 만들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탱커레이가 낫겠다고 판단했는지 비피터를 원래 자리에 되돌렸다.
페로사는 현재를 살았다. 그녀가 오랜 세월 동안 쟁취한 끝에, 그녀는 그녀가 바라는 현재를, 낙원까진 아니지만 안식처라고는 해줄 수 있는 현재를 손에 넣었고, 그것은 이 바에 고스란히 펼쳐져 바에 찾아오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만에게도 평등하게. 잔 안에도 잔 밖에도 폭군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에만에게 묘한 방향으로 상냥했다. "그래서 좋다면, 까짓것 언제라도 준비해둘 수 있지." 하며 페로사는 사용한 집기들을 싱크대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리큐르들을 꺼내려던 찰나, 에만이 마음 속으로 열세 번째 살인을 저지르며 꺼낸 말에 에만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래?"
문득 좀전에 트톡에서 돛대를 뺏겼다고 칭얼대던 이름모를 사람이 떠올라서 페로사는 가볍게 웃었다.
"만드는 동안 한대 할래?"
페로사는 아까와 똑같은 요령으로 담배 팩을 톡 털었다. 담배 한 개비가 뜯겨있는 팩에서 반쯤 빠져나왔고, 페로사는 그 팩을 재떨이 하나와 함께 에만의 앞에 놓아주었다.
에만이 담배를 집어들면, 페로사는 성냥불을 붙여주거나 라이터를 내밀거나 하는 게 아니라 불똥이 붙어있는 담배를 문 채로 에만에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