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순 없지 않았을까? 죽을 것만 같은 꿈결에 이토록 사랑받는 느낌이 들고있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하웰이 조금 의례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느새 브리엘과 대화를 하다보니 처음에 느껴졌던 긴장감은 이내 쓸려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그저 밖에서 만났던 사람을 안에서 만난 것에 대해 당황했을 뿐이고, 자신을 해치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것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늘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은 동네였다. 이곳은 비탄의 도시이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브리엘의 말에 이번에는 진짜로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싶어서 다시 큼, 하며 헛기침을 하며 삼켰지만 정말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기가 다 빠지는 것은 아니었다.
“농담이시죠? 그저 천천히 죽이냐 빨리 죽이냐 차이라는 것도, 독약과 마약이 한끗 차이라는 것도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어떤 마약이든 그것은 중독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 스며들어간다. 그리고 몸 속에서 온갖 장기, 특히 뇌에 달라붙어 그 사람을 점차 죽음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사람에게 이로운 마약이란 없다. 아, 물론 적절히 처방하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약, 의약품으로 쓰이겠지만 왜 병원에서 마약성 진통제 비리가 끊임없이 일어나겠는가.
클로리스가 마약과 독약을 함께 다루는 것도 그 이유가 있었다. 그 둘은 크게 차이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본점에서만 마약을 판매하는 것은 지점에 들러붙는 개인적인 마약중독자들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지 지점장들이 그것을 다루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도시에서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순 없어요.”
하웰은 턱을 괴고 정말로 사람을 해치지 않았느냐는 뭉근한 표정으로 브리엘을 바라봤다. 제가 독을 파는 것과 정말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고 스스로를 고상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지 말이다.
아, 이미 좋은 인상을 남기기는 그른 것 같다며 하웰은 자조했다. 뭐, 독약을 파는 꽃집 사장으로 밖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에도, 오늘 이렇게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분명 좋은 인상은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저 혼자 고고한 척 하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독약을 처음 만들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을 때의 그 고민과, 괴로움과, 체념과, 그리고 그것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이 툭 튀어나와서 이렇듯 비꼬는 말이 나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저 그게 제가 울타리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던 것임에도.
“말단이든 아니든 선생님하고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서... 음, 내키시면 꽃을 사러 오셔도 좋고, 아니면 언젠가 밖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면 같이 이야기해도 좋고요. 사실, 푸른 하늘을 이고 들어온 동향 사람이기도 하니까... 저는 좀 반가웠었거든요.”
하웰은 홍차를 마시면서 눈을 내려깔았다. 명함에는 꽃집의 주소가 적혀있을 것이었다. 하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리엘에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꽃집을 빙 돌아가지 않으면 다행일까.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같은 동향 사람이었고, 이제 다시는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할테니까.
소녀의 미소를 보며 그저 따라서 옅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자꾸 치켜세워주면 정말로 대단한 말을 한 마냥 착각하게 될 것 같다.
"걱정 마요. 저번에 쫓아준 덕분인지 요즘은 조용하니까 자주 부르진 않을 거예요. 웬만한 보디가드보다 무라사키가 낫더라구요."
든든하다고 말하며 과자를 집었다. 선배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다는 건 소녀 역시 어딘가의 조직에 속한 일원이란 의미였다. 하긴 혼자 활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 만났을 때 다쳐있던 것이나 불한당을 위협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역시 몸을 쓰는 쪽일까. 불쑥 호기심이 디밀었다. 셰바에서 호기심이란 황천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칼 따위를 쓸 줄 아는 사람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소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묘한 신뢰감이 들었다.
"쫓아내는 폼이 아주 능숙하던데요. 자주 해본 것처럼."
결국 호기심에 기인한 것을 농담처럼 포장해 내보이고는 들고 있던 과자를 입에 넣었다. 하나의 덩어리였던 것이 잘게 조각나는 동안 독특한 형태의 반지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녀를 보았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표정만으로 알 수 있었지만, 바라는 대답을 줄 수 있냐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솔직히 엘레나의 기준에서 아름답다는 축에 들지는 않았다. 싫은 건 아니지만, 좋다고 말하기도 힘든 애매한 구간에 속한다고 할까. 그나마 과자가 입안에 있는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삼키기 전까지 말을 골라야 한다.
"직접 고른 거죠? 좋은 것들로 샀네요. 잘 어울려요."
신중하게 고른 대답은 반지가 아닌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의 안목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편이었기에.
원한다면 해줄게, 무던히 조잘댄다. 만약 발렌타인이 그더러 어째서 자신을 죽이지 않았냐고 물었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죽고 싶니, 죽여줄까. 죽여줄 수 있단다. 다만 그 때는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붙들고 있을 것이란 게 차이라면 차이다. 온 몸으로 희열과 행복감을 지탱하느라 무너져내릴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성을 유지했다. 이러한 상상에 무너지기엔 사내는 너무 많이 커버렸다.
대신 제롬이 긴장한 것을 공기로, 촉수로, 더듬이로 느꼈을 따름이다. 곤충을 닮은 남자는 쓸데없는 곳에서 그 가치를 증명했다. 긴장할 이유라도 있나, 단순히 공포 탓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내 집 안에 들어왔을 때 안도하는 거야?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 아니면 그 근처에 내가 봐서는 안될 무언가가 있었니? 쇄도하는 질문들, 결코 묻지 못할.
핫초코 내밀고 저도 자리에 앉았다.
"왜 안 마셔? 잔 바꿔줄까? 독이라도 탄 것 같니?"
대답도 전에 잔을 바꿔버리려 한다. 퍽 무례하나 신경쓰지 않았다.
"긴장 풀어, 미스터 발렌타인. 그냥 사람 하나 죽이고 싶은 거니까."
살인을 이야기하기엔 지나치게 맑고 차분한 어조다.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결정하듯 담담하게 죽이고 싶은 사람, 이유, 염려되는 것들을 나열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느 한 조직에 속해있으면 뒷처리가 곤란해지니까. 당신한테 부탁하려고 했어. 시체는, 웬만해선 깔끔했음 좋겠네. 시체 처리 비용까지 내가 부담하기는 싫어서 말이야. 나한테 가져다주면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