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난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더러운 인생은 날 데려가요 술을 많이 마시고 횡설수설하기도 해요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쉽지 않나요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원래대로라면 깔끔한 홀이었을 공간에 시체 여러 구가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홀의 테이블과 의자는 절반이 박살나버렸고.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 모습이 식당보다는 도살장을 연상케 한다. 횟집이라는 간판을 달고서, 사람을 회뜨기라도 한 걸까? 이 학살 현장이 유리창 너머로 다 보일텐데. 행인들은 그 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평소와 같은 셰바의 일상이다.
가게 내부의 시체 무더기.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청년은 마냥 태평해보인다. 그의 모습이 피투성이일지언정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옷 다 버렸네."
그러더니 태연하게 자기 옷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조직간 의견 조율 과정에서 생긴 '사고'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카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력을 내세운 건 저쪽. 카이가 한 '도살'은 엄밀히 따져보면 정당방위다. 이 도시에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벌할 사람은 없지만.
카이는 카운터 위에 놓인 행주로 피 묻은 손을 대충 닦아낸다. 방금 청소업체에 연락을 했으니, 이 난장판을 치워줄 사람이 도착할 것이다.
레이스 호텔 204호 객실 안은 늘 일정한 온도로 유지된다. 노트북도 노트북이지만 에만은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너무 뜨거워도 싫었고, 그렇다고 차가운 건 더욱 싫었다. 호텔에 투숙하게 된 뒤 약 2달간 온도와의 사투 끝에 가장 적절한 온도를 찾게 됐다. 물 온도도 달라지는 법이 없다. 샤워기의 온도조절기도 적당한 온도를 찾은 뒤에는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에만은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대충 털고 나오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당분간 정말로, 진짜로, 죽어도 의뢰를 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인간의 결심은 주문과도 같다. 오늘은 바쁘지 않다, 조용하다 생각하면 일이 몰아치고, 지금처럼 결심을 하면 귀신같이 일이 들이닥친다. 에만은 노크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젠장!"
에만은 문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제 저희 집 부엉이가 죽었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그냥 죽은 듯 가만히 있을까?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며 천 번도 넘게 치솟은 충동이었다. 무시하면 될 일이다. 에만은 다시금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 썼지만 30초도 지나지 못해 벌떡 일어났다. 그냥 갈 줄 알았던 의뢰인이 두 번이나 노크하며 이전보다 소리를 높이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면은 썼나? 노트북은 가동 중이고? 더듬거리며 구석에 놓인 가면을 뒤집어쓴 에만은 노트북 화면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스틱맨을 확인한 뒤 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부엉이 시체는 어딨습니까." "모릅니다. 찾으러 왔습니다."
에만은 주머니 속의 나이프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의뢰인은 에만과 또래 내지 한 두 살 연상이 아닐까 싶은 정장을 빼입은 청년이다. 에만은 저 주머니 안에 권총이 있다는 걸 잘 안다. 아마 저 청년은 이 도시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히트맨의 길을 걷기로 한 것 같다. 에만이 정장 주머니를 빤히 쳐다보자 청년은 총을 꺼내 에만의 손에 쥐여주었다. 기본적인 신뢰의 표현이었다. 히트맨이 자신의 무기를 맡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만큼 청년은 찾아야만 하는 정보가 있고,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에만이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쥐며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청년은 안으로 들어서며 객실을 둘러본다. 평범한 일반 객실 같지만 조금 더 넓고, 응접실과 침실이 한 방에 있는 독특한 구조다. 조만간 이사 갈 것이다. 적어도 스위트룸으로, 높은 층으로. 높은 층은 아직 무섭지만 이 복도의 과한 친절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다. 청년이 소파와 그 밑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침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불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고 베개는 물기가 가득하다. 청년이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에만의 머리카락을 보고 멋쩍은 듯 사과했다.
"자고 있었나, 미안하네." "..됐어. 편하게 있어.. 이곳은 금연인 대신 뭘 해도 좋아..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어도 좋고, 커피는.. 냉장고 안에 있으니 알아서 마셔.. 아, 침대에 누울 거면.. 음식은 가지고 올라가지 마."
청년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농담을 뱉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금연 구역이라는 건지." "내 구역에선.. 내 룰을 따라야지."
에만은 지지 않고 의뢰인을 나무라며 의자 위에 앉았다. 바퀴 달린 푹신한 의자는 에만이 개인적으로 구비한 것이다. 에만이 무릎을 그러안자 청년은 소파에 횡 방향으로 늘어지듯 앉더니 다리의 끝을 교차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감자칩 중 하나를 골라 품으로 가져갔다. 이제껏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치즈 맛이었다. 에만은 노트북 화면 위를 뛰어다니는 스틱맨을 마우스로 클릭해 감옥 모양 아이콘에 끌어당겨 넣었다. 청년이 감자칩의 봉지를 북 찢고는 용건을 말했다.
"사람을 찾으려 하는데." "..죽은 사람? 아니면 산 사람?" "로즈밀 윈터본."
에만은 의자를 빙글 돌렸다. "누구?" 노트북을 등지자 소파에 누워 감자칩의 시즈닝을 혀로 한 번 핥아보다 이내 감자칩을 입에 날름 집어넣는 청년이 보였다. 청년은 에만을 흘긋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로즈밀 가브리엘라 윈터본." 청년은 감자칩을 씹으며 "이거 맛있네?" 하고 봉지를 돌려 브랜드를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 개 같은 불의 마녀 말이야." "불의 마녀?" "몰라? 너 이 도시 사람 아니지?" "..음." "아니구나. 괜찮아, 너도 입 무겁다고 소문났지만 나도 입이 무거운 편이거든. 적어도 5년 전까지는 그 미친 불의 마녀가 A-13 구역을 지배하고 있었어." "지배를 했다고..?" "그래. 그 미친 불의 마녀가 조직 보스를 죽이고 가둔 뒤에 성당에 나머지 조직원을 밀어 넣고 전체를 불살라서 80명 규모의 조직 하나를 싹 죽여버렸거든.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내 미래를 위해 거룩한 산 제물을 바친다? 학살이었지." "전자는 이 도시에서 흔한 일이긴 한데, 후자는 아니네.." "그렇지!"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그 사람의 행방을 찾는 거지."
청년의 주절거림이 우뚝 멈춘다. 실내가 정적에 잠겼다.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소음이 거슬렸다. 환기 팬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뒤로 청년이 감자칩 하나를 꺼냈다. 시즈닝이 묻어있는 감자칩을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꼭 목표물을 쳐다보는 냉혹한 킬러 같다. 감자칩은 이내 입에 물려 두 동강이 난다. 꼭 사람을 동강 내듯 살벌한 모습이었다.
"네가 할 일은.. 사실 관계인지만 확인해 주면 돼. 그 여자가 정말 분신자살을 했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추가금을 지불할 용의는 있어. 해줄 수 있지?" "그 여자가 네게 무슨 짓이라도 했나 보네." "당연하지. 그 여자가 죽인 보스가 우리 아버지거든." "..오." "내가 그 조직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은 킬러 조직의 말단이야. 인생이 뒤틀렸지."
에만은 말없이 담배를 꺼냈다. 청년이 눈을 굴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금연 구역이라며!" 입에 물지 않고 손가락에 끼운 담배에 불을 붙이던 에만은 등을 돌린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가면을 슬쩍 올려 담배를 물고 연기를 뱉은 뒤 데이터 베이스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Rosemill Halo Winterborn. 수십 개의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에만은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피와 불의 마녀 로즈밀 윈터본, 분신자살. 유언은 불결한 손이 닿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에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초를 문 메마른 입술은 연기를 뱉고 가면 사이로 덮어 가려졌다. 감정 없는 기계음이 튀어나왔다.
"내 구역에서는 내 룰을 따라야 한다고 했을 텐데." "어이가 없네, 이건 독재야!" "일단 의뢰는 수락할게. 이 정도 인지도가 있다면..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 연락처는 두고 가." "아, 진짜? 고마워. 그리고 감자칩 남은 건 가져가도 돼?"
불과 한 달 전에 이 여성에 대한 죽음과 인적 사항을 찾아 조작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는 것은 부러 말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속고 속이며, 먹고 먹히는 곳.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진실을 거짓으로 바꿔 쥐여주며, 그 모든것이 진실이라 믿게끔 하는 곳. 어차피 바꿔도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을 아는 것은 에만 뿐이다. 가령 로즈밀 가브리엘라 윈터본이 아니라 로즈밀 헤일로 윈터본임을 아는 것도, 진짜 조직의 아들이 일주일 전에 목이 졸려 죽은 사실도.
"연락받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육점에 온 줄 알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가게의 첫 인상은 그랬다. 좁은 수족관에 갇혀 지나가는 행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물고기, 아니 횟감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을까? 똑같은 의문이 그 안의 시신들에게도 떠오른다. 그리고 문득, 창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하게도 저지르셨군."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쓴 노란 보호복과, 정화통이 두 개 달려있는 검은 방독면. 그리고 고무장화. 무엇보다 그 방독면에서 마이크를 타고 전해지는 기계적으로 변조된 목소리. '하기사, 나도 보통 사람은 아니긴 하지.' 무슨 연유가 있어 이런 학살극을 저질렀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괜한 참견이겠지. 바닥에 널부러진 것들은 모두 차림새나 생김새가 흡사하다. 제법 멀끔한 차림을 한답시고 한 것 같은데, 좀 보기 꼴사납다. 온몸에 가득한 문신은 피범벅이 된 이후에도 뚜렷하게 뵌다. 다 똑같은 문신. 통일성. 조직간의 다툼인가.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시선이 상대에게 잠시 머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젊은 사람이군. 전혀 급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한 상태같다. 온몸에 피칠갑을 했으나 외상은 없음. 양 손은 굳은살과 자잘한 상처가 가득하다. 잠시 빤히 바라보던 페퍼는 역시 마찬가지로 태평하게 말한다. "종일 걸립니다. " 늘상 그러하듯, pp봉투니 이산화염소수니 하는 것들을 챙겨와 바닥에 대충 부려놨다. "멀끔히 치우려면 한세월일터. 들어가서 좀 쉬시죠." 들어가시는 김에 차 한 잔 내주시면 더 좋고. 그렇게 덧붙혀 말한다. 반쯤은 호기심에서 떠보는 행위였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조공도 없이 홀로 종일 일하는데, 차 한잔도 못 주면 지나치게 박한 녀석일테다.
한결 맑게 개인 시선과 함께 얼핏 화색이 돈다 생각될 정도로 핏기가 생겨난 표정은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겨내었을까. 차가운 테이블에 놓여진 티백이 따뜻한 물을 만나 머금고 있던 향과 빛깔을 내뱉듯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상대방의 말도, 다소 불만스러운 어투와 표정도 모두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런거네요~ 외눈박이의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인 것처럼, 베르셰바에선 어쩌면...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비정상일 수도 있겠죠."
힘없이 웃어보이는 그의 반응에 그녀 역시 살짝 낮은 음색으로 미소지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조직(마피아)을 만들어 살아가는 뉴 베르셰바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범죄를 저지르진 않을 뿐더러 그들 사이에도 저마다의 정의는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을테니까,
"보수야 뭐 단순하죠~ 어떤 분은 현물을, 어떤분은 돈으로 주시기도 하지만 애초에 전 딱히 신경을 안쓰거든요~"
그가 자리를 잡는동안 캔버스를 이젤에 걸쳐두던 그녀는 돌연 그 앞에서 알수 없는 넘실거림을 느낄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진 어투, 물론 본인도 놀랐다는듯 일순간 잦아들긴 했지만 그 특유의 감정적인 에너지는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돌듯 휘감는 아우라,
그녀가 그것을 감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자극시켜서 좋을 일은 없었기에 그저 둥글게 호를 그리는 눈매로 지그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얄팍해졌다 해야 할까? 조금은 그윽한 분위기를 내비치던 눈가 아래에서 흐릿한 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꽤 별난 분이네요... 어쩌면, 이런 별난 그림쟁이에게 의뢰를 하신다는 부분에서부터 그 특별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겠지만요~"
아무래도 의외의 인물,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물을 만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는가보다.
"후후후~ 괜찮네요~ 보통은 굳어계시거나 마냥 풀어져계시던데 말이죠?"
적당히 맵시있게, 너무 불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뻣뻣하지도 않은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는 그에게 무언가의 양해를 구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를 주욱 훑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쥐어진 펜과 붓이 캔버스 위를 바쁘게 오갔고, 때로는 나이프를 제 손깍지에 끼워 조금씩 무언가를 깎아내기도 했다.
"조금은... 알것도 같네요..."
그저 의미없는 추임새였을까, 아니면 최대한 압축시킨 생각을 그에게 내비친 것일까. 잠깐의 침묵을 깨던 그녀는 행여라도 그와 눈을 마주친다 싶을 때엔 어김없이 순한 눈매로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