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일이라곤 할 수 없지만 거들었던 기억은 없어 자유를 비싸게 산 것도 같지만 영혼까지 싸게 팔았던 기억도 없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그녀가 뉴 베르셰바에 남긴 벽화들이 몇개나 될런지, 이젠 벽에 붓을 댄 횟수도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셀 수 없는 이유를 꼽자면 그녀 스스로 세는 것을 잊었단 것과 대개는 자연적으로 지워지거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청결을 원해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벽화를 관리하는 사람처럼 재보수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가벼운 흥얼거림과 함께 골목 속 또 다른 골목을 벽 한복판에 만들어내던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맞은편 통로에 대한 명암을 살피고 있던 찰나,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딱히 불현듯 찾아온 사람에게 두려움을 품은 것은 아니었고 누군가가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러온줄 알고 숨죽이지도 않았으며, 그저 그 사람이 길을 지나치고나면 다시금 그 풍경대로 다시 그리려던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지나가던 이는 그녀와 벽의 그림쪽을 슬쩍 훑어보다가도 이내 별 생각이 없었는지 그대로 가버렸고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고서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뺨에, 팔목에, 머리카락이나 상의에 염료가 묻어 굳어가기도 했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듯 했다. 게다가 지나치는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는 것과 이미 그림에 몰두한 그녀는 그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단것도,
적어도 소리를 내 부른다거나 옆쪽에서 그림자를 드리워내지 않는 이상은 쉽게 그쪽으로 돌아보지 않을듯 싶었다.
여인은 카이의 말에 말없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라 베르토의 방침이며 라 베르토가 추구하는 셰바다움이라 말하듯이. 이해했다면 말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수식어는 적을수록 와닿는다.
"고맙긴. 덕분에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서 좋은 걸."
누가 좋은 건지 여인의 말 만으로는 불분명했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면 이전에 회식을 왔던 라 베르토의 일원들이거나 카이의 횟집에 오는 손님들이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여인이 즐기는 음식은 한 손에 꼽을 것 밖에 없었고, 여기에 있는 건 그 중 하나인 술 밖에 없었다.
"기대하려면 우리 애들이 해야지. 요리할 기대라면 충분히 해도 되겠다만."
후후후후. 정말로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가 여인의 입술 사이로 가늘게 흘러나왔다. 우아하게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는 행동이 잘 배운 아가씨 같지만 그 실상이 어떤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만 하다. 여인은 카이보다 늦게 마지막 잔을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정돈하며 카이의 대답을 들었다. 짧고 간결한 대답에 여인의 입술이 다시금 미소를 띄웠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은, 계속 보겠구나. 조금은 기쁠지도."
그리고 여인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인다. 코트깃을 한번 당겨 정돈한 뒤 옆으로 나와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이만 가야겠다. 간만에 즐거웠어. 카이. 다음에 봐."
여인은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하고 휙 하니 가게를 나가버렸다. 요란하지 않은 굽 소리가 해룡수산을 나가 적막한 거리를 울리며 멀어진다. 그렇게 빈 자리에는 먹은 값보다 후하게 들은 봉투 하나가 반듯하게 남아있었다.
내장 어귀에서 기름기 보채는 소리가 났다. 휘청이며 걷던 사내는 짜증스럽게 제 복부를 어루만졌다. 음식에 별 다른 의미 두지 않았다. 그저 입 안에 욱여넣은 뒤, 이와 혀로 짓이기고 뭉개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만인 것들에 불과했다. 미식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한심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송아지 앞다리 맛이 나는 벌레가 있다 하여 그것까지 입 안에 넣고 씹을 텐가? 나라면 씹을 텐데, 아주 기쁘게 삼킬 텐데.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허기진 것은 싫었다. 싫은 게 많기도 하지. 까다로운 것. 머리 어딘가에서 성가시게 조잘대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먹는 편이 나았다. 평소처럼 아무 빵집에 들어가 밀 덩어리나 질겅거릴까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오늘은 다른 걸 입에 넣고 우물거려보자. 식당, 로스트 스튜로 향하는 코트 자락이 지저분하다. 종업원이 화내려나, 화를 내면 참 좋을 텐데. 짜증스럽게 빗자루로 종아리를 찔러댈까. 입꼬리 씰룩대는 꼴이 보기 좋지는 않다.
"여기서 제일 유명한 걸로 줄래?"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다. 퍽 예의바른 편은 아니다. 코트 끝에서 배어나온 물이 바닥을 적셨다.
"나아, 그리고, 다리가 너무 아파."
빨리 자리 안내해줄래? 눈 접어가며 다정한 웃음 흉내다. 숨 들이키자 기름 냄새가 허파를 채웠다. 제 표정 숨기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는 쥬를 향해, 가볍게지만 소리를 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제롬, 그는 웃으면서 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기분탓인지 그가 쥬를 바라보는 모습은 꽤나 익숙해보였다.
아마 이전에는 본 적 없어도 쥬가 열중하던 사이 와서 보고있던 것이 아닐까. 라기엔 너무나 소리소문도 없이 왔다. 어떻게 비전투직일 뿐인 그가 발소리를 숨길 수 있었을까.
의문의 남성, 제롬은 쥬가 자신을 의식하면 그제서야 소리를 자박자박 내며 움직였을 것이다. 아마 태연히 쥬의 옆쪽으로 다가와서 서지 않았으려나.
"이런 거 그리면 분명 도로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혼날 걸?"
쥬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롬에게 쥬는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림을 도화지가 아닌, 이런 벽에 그리고 있다니. 그리고 특이한 사람이라는 감상은 제롬 뿐만이 아니라, 제롬을 만난 쥬에게도 들지 않았을까. 처음 만나더니 다짜고짜 하는 이야기가 잔소리인 이 남자를 보면, 그럴만도 했다.
저 사람, 방금 화내려던 거 맞지? 화내려던 게 틀림없어. 저 여자랑 남자가 구는 걸 보면 뻔하지. 사내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일기에 투덜댈 거리가 늘어버렸다. 입가 숨기던 손끝을 내려 코트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저 종업원 힘 세 보인다, 그치. 까불면 한 대 맞을지도 몰라. 까불어볼까, 성질을 살살 긁어볼까, 아니야,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식당엔 소금이 있고,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려진다면 아주 많이 가려울거야. 종잡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나 결론이 온화하다면 아무렴 좋다.
"응, 고마워. 친절한 친구구나, 기억할게."
빈 의자에 몸을 구겨넣으며 조잘댔다. 코트자락이 주름지며 벌어져, 목 언저리의 흉한 흔적들을 드러냈다. 사내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소매나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그런데 내가 물었잖니, 여기서 제일 유명한 게 뭐냐고."
말하는 표정과 내용은 친절하다 느껴질지도 모르나 말하는 투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건 언제 대답해줄거야? 나 그걸로 시키고 싶은데."
이젠 내용마저 친절에서 거리가 멀어져버렸다. 사내는 눈 한번 도륵 굴리더니, 선심쓴다는 듯 턱 괴고 다시 눈 접어 웃었다. 허파를 가득 채우던 기름 냄새가 생각난 탓이다.
"아니면, 있잖아, 부엌에 있는 아무거나 줘도 좋아. 난 편식 잘 안 하거든. 돈도 많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