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일이라곤 할 수 없지만 거들었던 기억은 없어 자유를 비싸게 산 것도 같지만 영혼까지 싸게 팔았던 기억도 없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에만의 삶은 약간의 감사와 미안함으로 이루어져 있는 편이 아니다. 되레 친절은 거리가 멀고, 상냥함도 거리가 먼 편이다. 어쩌면 삶을 포기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에만의 일부는 아직도 7층 소회의실에 머물러있다. 그렇기에 평상시의 에만은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 해 한 점 들지 못하는 우중충한 구름에 메말라가는 식물, 자신의 죽음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베르셰바의 사람이었다. 식음을 전폐하듯 살아온 것도, 무리해서 일을 해온 것도. 모두 7층의 아이는 그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 여겼기에 남아 오고 사라지지 않던 것이었다. 에만은 그런 사람이었다.
"……."
에만은 침묵하며 고개를 숙였다. 순수한 호의는 언젠가 독이 되어 다가온다. 다가오고 옭아매며 잡아챈다. 이 사람도 결국 자신을 이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덜컥 앞섰다. 어쩌면 쓰다 버릴지도 모른다. 에만은 순간 페퍼가 두려웠다. 그렇지만 울어도 소용이 없다. 발버둥 쳐도 안 된다. 이제 에만은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의로 옭아매긴 했지만 쓸모가 있기 때문에 자신을 지켜주던 여인도 더 이상 없다. 에만은 가늘게 떨리던 손으로 후드 매무새를 고치듯 꽉 쥐었다. 혈색 없는 피부지만 주먹을 쥐자 새하얘지는 것 정도는 보였다. 차라리 도망칠까, 나가자고 했지만 그때처럼 도망쳐버릴까. 이번엔 레이스 호텔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 안전한 곳, 더 안전하고 폐쇄적인 곳……. 에만은 그가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목덜미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총구라도 겨눠질까 두려웠으나 다시금 호의가 다가왔다. 에만은 가면 너머로 거친 손을 바라봤다. 거친 손이다. 목덜미를 문지르던 라텍스 장갑을 끼던 그 손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손. 여행자의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존재, 숲길에 혼자 떨어진 아이를 인도할 부엉이, 어둠이 두려워 숨어있을 아이를 위해 서둘러 뜰 태양. 곁에 있기에 안심할 수 있는 존재. 에만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헨젤, 사람은 곁에 있으면 약점이 된답니다. 척은 내 곁에 남기를 택했기 때문에 나의 약점이 되었고, 나는 척의 약점이 되었죠.. 아, 그이처럼 아둔해요.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고, 그 인간임을 포기해야만 이 바르셰바라는 비탄에서 섞일 수 있을 뿐이지요. 약점은 독, 호의는 가시. 아, 작은 내 헨젤. 그렇지만 난 헨젤이 약점이 되어도 좋아요. 나도 어쩔 수 없이 바르셰바의 지배자가 될 수 없는 거지요.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에만은 숨을 들이켰다. 어깨를 저도 모르게 펴며 허리를 세웠다. 가면 속의 눈동자를 홉떴다. 알고 있다. 잡는다면 타인의 약점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누군가를 또다시.. 그렇지만 에만은 이기적인 존재였다. 한번 알게 된 온정을 내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손이 커다란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 손가락이 스치듯 거친 손바닥을 빙글 쓸어내고는 이내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다 한쪽 팔을 뻗었다. 자신이 조수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충동적이었다. 몸을 기울여 다른 팔로 목을 한번 끌어안으려 하며 에만이 기계음 섞인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아스타로테와 달리 카이는 여전히 회 한 점 한 점을 주의깊게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는 음식은 비단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맛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다. 카이는 어느새 비어버린 병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같은 술 하나를 더 꺼내왔다.
"결국은 둘 다 좋은 거네."
라 베르토는 대형 조직이지만 해룡수산은 소규모 가게다. 이쪽의 거래에 저쪽의 생계가 달린 건 아니란 것이다. 그래도 카이는 부러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뭐 상부상조하면 좋은 거지.
"확실히... 당신처럼 큰 조직의 보스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카이는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의 말에 대꾸한다. 그런 사치와도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카이다운 거다. 이 거리는 비교적 조용하고 평화로운 축에 속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그도 조직원으로 생활하던 시절의 독기가 전부 빠지고 매사에 태평한 동네 청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는 게 감상이다.
"그럼 언제 한 번 놀러가면 되는 거야?"
아스타로테가 불만을 표한다. 그럼에도 그 태도가 극히 가볍다. 그게 그리 우스웠는지 카이가 입꼬리를 살풋 올린다. 픽 하고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도 입가의 미소는 쉽게 지워진다.
그녀의 질문에 회를 연거푸 씹던 카이가 생각에 잠긴다. 그가 입을 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못 보던 사람이라... 그런 조직이 하나 들어오긴 했더라. 요새 구획에서 깽판 치고 다닌다던데."
말하기 위해서다. 이런 나와 친구를 해줄리 없다고. 사실은 알고있다고. 이루어질리 없는 괜한 기대를 하는 것보다, 상처받기 전에 이미 단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라고. 알고있다. 이런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를 봐줄리가 없는 것을 알고있다. 왜냐면, 왜냐면 나는...
"이해... 해주시는, 건가요...?"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이번에 선수를 친 것은 제롬쪽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뱉은 한 마디가 무라사키의 가슴에 직격하여 눈동자의 흔들림이 멎는다. 동공이 긴장된다. 이상한 사람이다. 길바닥에서 부딪힌 최악의 첫 만남에, 가지고 다니는 것도 이상한 나이프를 잔뜩 흘리고, 그런 애를 나이프 매장에 데려가고, 날붙이를 보면 눈을 반짝이면서 말이 많아지는 모습을 보고도, 싫어하기는 커녕 칼을 사준다고 하고. '친구' 해달라고 하고... 그러고도 지금, 친구를 관둘 생각을 하는 나를. 이런 나를 이해 해준다고 하는 것일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사람을 종잇장마냥 잘라내는 '재능' 뿐인 살인귀라도 이해 해준다고 말하는 것일까?
"...읏-"
무라사키가 가진 그런 끝없는 망설임과 의문들은, 가라앉은 보라빛 머리칼 위에 제롬의 손이 맞닿으면서 전부 날아가버렸다. 그 감촉, 솔직히 짚단처럼 푸석하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는 그녀가 분명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며, 그저 마음을 다친 또 다른 소녀일 뿐이라는 것을, 미약하게나마 일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라사키 또한 제롬의 손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실망할지도 몰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면 싫어할지도 몰라. 내가 가진 재능을 알고 실망할지도 몰라. 내가 왜 칼날을 좋아하는지 알면 경멸할지도 몰라. 내가 바깥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라도 하면 무서워할지도 몰라. 내가 '친구'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버리면-
"...래요..."
하지만, 그런 것은-
"네에... 될래요, 친구...!"
첫 친구의 유혹 앞에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때 제롬이 마주한 골목 한 켠의 쌀쌀맞은 가로등이 비치우는 소녀의 얼굴은, 이 도시의 가장 대낮의 붉은 하늘보다도 해맑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