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나 아끼던 두려움들은 돌아선 당신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죠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한숨소리가 길다. 그리고 그만큼 응접실로 향하는 이 길이, 긴 가시길 같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구나. 당신의 목소리와 행동에서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니면 그 분량만큼의 피로라던가. 무엇이 맞든. 더 의미 없을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꺼냈다가는 정말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슨 말을 하던 결국 변명밖에 안 될 말들이라. 시안은 방금 전까지 짓던 웃음을 싹 지우고서, 바짝 긴장한 채,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르다, 그냥 꾹 다물며 고개만 끄덕인다. 한편에 치워두는 약통. 제가 찾아오기 전까지 마시고 있었을 위스키가 담긴 잔. 그와 반대로 당장 외출이라도 할 듯. 구두까지 신은 당신을 보며. 제 문자를 보고서 준비했을 당신의 모습을 그린다. 마른침을 삼키고서, 폭탄이 되어버린 당신이 터질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반대편 소파에 앉는다. 갑작스레 약속을 잡았던 제 행동을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다. 그나마 보험으로 준비한 저 상자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할뿐.
"응. 이번에 새로 들여온 거. 그 이전에 마음에 들어 했던 밤 종류 있잖아요? 같은 회사 신상품이 나왔다길래 그쪽 생각나서 좀 들여놨는데, 마침 볼 일이 생겨서 가져왔어요."
들려온 말에 조금 안색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한다. 어떻게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당신의 마음이 풀렸으면 하는데. 슬금슬금 시선을 들며 바라보다, 말을 끝낸 후 다시 아래로 내리 깐다.
카이는 장갑 낀 손으로 냉동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잠시 주방에서 사라진다. 조금 있다 보면, 내장과 피를 빼 냉동해놓은 생선을 꺼내 가져오는 그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막 잡은 듯 싱싱한 광어가 도마 위로 올려진다. 광어는 가장 무난한 횟감이다. 맛도 좋고 가격도 싸다. 날이 선뜩하게 선 회칼이 카이의 손에 쥐어진다. 지금은 생선이나 써는 데 사용하는 칼이지만... 저걸로 사람을 담궜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낯설어 보일지도.
아스타로테의 추가 주문에 카이는 대답 없이 칼을 고쳐쥐었다. 살을 저미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연한 살점이 하나씩 얇게 잘려나온다. 이윽고 손질을 끝낸 광어 살들이 접시 위로 올라간다. 푸짐하게 올라간 살 옆으로 조그만 날개살들도 곁들인다. 깨끗한 흰 접시 위의 회가 소박하게 보인다.
쟁반에 회 한 접시와 밑접시, 양념장을 올려 카이는 아스타로테가 앉은 테이블로 메인 요리를 내온다.
"자, 광어 회야."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회가 올라온다. 빈 쟁반을 옆으로 치운 카이가 아스타로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잔에 술을 따른다.
'이렇게, 아무나 휘두를 수 있어요...' 무라사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보라는 식으로 펼친 칼을 허공에 휘적거려보인다. 헌데 그 움직임이, 전혀 프로 킬러의 움직임이 아니다. 영락없는 칼을 방금 잡아본 여자애다. 절도도 없고, 힘도 없고... 물론 지금은 유사시가 아니니 그렇다해도, 그 동작은 전혀 칼잡이의 동작이 아닌, '마구잡이 휘두름'에 가까운 것이었다. 역시 이 눈 앞의 소녀는 그저 칼에 취미를 가졌을 뿐인 여자애에 불과한 것인지.
"저, 정말 일반인 마, 맞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제롬의 짖궂은 말에는 즉각 반응해서 목소리를 높힌다. 헌데 칼을 꼭 붙들고, 눈도 질끈 감고서 제롬을 향해 외치는 것이...
"엣."
그런 무라사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눈을 깜빡거리더니,
"!! 아아아-아니에요! 괘, 괘괘괘괘 괜찮으니까요.......!! 우으. 저, 정말로요...! 오늘 처음 본 분께 가, 갑자기 선물, 받는다니... 그런 실례를... 으으. 그것도 ..."
샛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손을 뻗어 절레절레- 필사적으로까지 흔들어댔다. 그 손에서 작은 선풍이라도 일 것만 같은 속도다. 과장 좀 보태서 제롬은 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거절하는건 그렇다쳐도, 얼굴은 왜 붉히는 것일까. 이 소녀에게 칼날이란, 단순한 '날붙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 진짜. 괜찮으니까요, 저같은거... 신경쓰지 않으셔도......"
하지만, 누가봐도 미련 어린 무라사키의 보라빛 힐끗대는 시선. 한 쪽으로 빗겨간 그 시선의 끝에는- ...왜 있는진 모르겠지만 거기엔, 식칼이 있었다. 그것도 홀로 케이스와 함께 진열되어 할로겐의 빛을 독점하여 반짝반짝 하몬과 함께 반사시키고 있는 아주 제대로 된 일식칼. 좀 더 정확한 류파로는 그건 야나기보초(柳刃包丁)라고 하는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