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은 맹독에 번뇌에 고독을 품고 거짓은 망상에 군침이 끊이질 않아 심판과 범죄를 하나로 묶고선 지껄여 누가 타개책 따위에 관심을 가지겠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Geissele, 성 가이즐리의 이름과 문장이 새겨져있던 현판도 어딘가로 가고 없었고, 보육원이라기에는 너무 을씨년스럽고 큰 붉은 벽돌 건물- 그러나 클로로를 비롯한 열 명 남짓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천국의 전당과 마찬가지였던 보육원 건물도 사라져 있었다. 나이어린 동생들과 숨바꼭질을 즐기다가 위험한 데서 놀지 말라고 혼꾸멍이 났던 창고도 없었고, 투덜거리며 붉은 햇살 아래서 회색 잔디 위로 잔디깎이를 밀고 나가던 회색 마당도 없었다. 보육원 건물이 없었으니 즐거운 식사 시간이 기다리던, 붉은 햇살마저도 모닥불처럼 온화하게 비쳐들던 길다란 테이블이 놓인 본당도 없었고, 원장 선생님과 함께 사격 훈련을 했던 사격장도, 체력을 단련하고 격투기 기술을 배웠던 야적장도 없었다.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던 쇳덩이들 중 적합한 것을 골라 적합한 방식으로 조립하면 총이 된다는 것도 배웠었지...!
그러나 그런 소박하지만 따뜻했던, 지옥 한가운데 있던 천국의 흔적은 멀리 사라지고, 지금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새로운 건물들뿐이었다. 십여 층에 달하는 빌딩과 주차장, 주변의 사오 층짜리 빌딩 몇 개. 그 곳은 그 곳을 차지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고, 성 가이즐리 보육원의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 성 가이즐리 보육원이라는 곳도, 가이즐리 오토매틱스 자동화기 회사가 버리고 간 공장 부지였을 뿐이지만... 클로로에게는 둘도 없을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만이 남아있는 틀림없는 성 가이즐리 보육원이었지만, 그렇지만 잔인한 붉은 도시는 클로로와 같은 작고 힘없는 존재에게는 그런 조그만 행복한 추억 한 조각조차도 남겨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 바르셰바의 망할 이상기후 때문에 동사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여길 발견해서 살았어."
사실 반말을 쓰는 것은 그의 성정이었으나, 이 도시에선 그 누구도 반말을 쓴다는 것에 뭐라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초면부터 존대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존대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거래를 할 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을 경우, 즉 저자세로 나가야 할 때나, 아니면 마피아 패밀리의 간부들처럼 고풍스러운 말투를 구사하거나.
제롬은 '존대를 쓰는 놈들은 마피아거나 미친놈이니 빨리 도망쳐라.' 라고 조언받은 적도 있었다. 말해준 사람이 사람이었던지라 별로 신뢰가 가진 않는 조언이었다만. 하여튼 그만큼 드물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먹는 거니까 분명 맛이 없진 않겠지. 냄새도... 나쁘진 않고 말이야."
보통 맛없는 음식들은 사람들이 좀처럼 시키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이 시켜놓았다는 것만 봐도 합격점이다. 느긋하게 굳어진 몸을 풀며 기다리던 와중, 초록색 술병을 들며 하웰이 말하는 것에 제롬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지. 술이 있는데 한 잔 하지 않는건 예의가 아니잖아? 너랑 마찬가지로 먹어본 적은 없는 술이지만..."
곧이어 음식이 나오자, 잔을 가볍게 살펴보았다. 샷 잔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잔이었다. 눈대중으로 가늠해보면 용량은 샷잔으로 두어잔 쯤 되는 것 같은데... 도수가 낮은 술은 아닐 것이라 짐작하며, 나온 술잔을 받아 병을 열더니 하웰의 잔을 채워주었다. 일종의 배려이자, 잘 지내보자는 친근함의 표시였다. 하웰이 눈치챘을지는 모르겠다만.
"자, 그럼 건배할까?"
바로 자신의 잔 역시 채운 그가 잔을 들고 하웰에게 내밀어보였다. 찰랑이는 술잔에 포장마차 내부의 약한 불빛이 살짝 비쳐 반짝였다.
230만. 최소 금액에 정확히 맞춰도 에만은 불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편한 기색이나 아예 불만을 표했겠지만 에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에만은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사람을 찾거나 오래된 정보를 찾는 일은 어렵다며 금액이 늘어나곤 했지만, 그 의도를 파헤쳐 보면 귀찮아서 떼어놓으려는 수작이었다. 오늘 추가 보수를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일이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귀찮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에만이 이 의뢰인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에만은 비어있는 손을 보고 나서야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대기 모드에 들어간 노트북에 손을 뻗었다.
"..그래. 복수가 아닌 점이 다행이네.."
영혼 없는 대답을 뒤로 터치 패드를 손가락으로 그어 보이자 노트북 화면이 뜬다. 엔터 한 번으로 다시 화면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화면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에만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단 몇 번의 손짓으로 에만이 만든 인터페이스가 뜬다. 몇 영화에서 보듯 투명한 하늘색 창은 에만이 직접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다. 에만은 의뢰인의 말에 한 박자 늦게 키보드를 두들긴다.
"알료샤 세르게이비치.. 벨랴코프. 알료.. 아이야오사의 행적을 원하는 거구나.."
두 번은 발음하기 어려운지 긴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뒤로 나오는 짧은 인명을 언급하며 되묻는다. 혼잣말이었다. 에만은 감람회라는 말에 잠시 몸을 빙글 돌린다. 의자가 매끄럽게 돌아 눈앞의 의뢰인을 향해 몸을 보인다. 눌러쓴 후드 너머의 가면 때문에 시선이 보이지 않지만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이 의뢰인은 뭔가 알고 있다. 누군가의 생사를 확인해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에서 확신을 얻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운 사람을 찾는 건지는 모르지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에만이 침묵하다 몸을 다시 빙글 돌렸다.
"찾아줄게. 덕분에 조금 쉬울 것 같네.. 이 정도면.. 그래.. 느긋하게 기다려 봐.. 길면 세 시간.. 제일 빠른 건 한 시간.. 거기 냉장고에서 커피를 꺼내도 되고.. 아니면 과자를 먹어도 돼.. 아니면.. 연락처를 두고 가거나."
소파 앞 테이블에는 포장은 뜯지도 않은 감자칩이 있다. 냉장고엔 에너지 드링크와 스위트 아메리카노 캔이 가득하다. 에만은 다시금 일에 집중했다. 의뢰인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에만은 최선을 다했다. 키보드를 두들기며 정보의 늪과 바다를 파고 들었다. 에만은 자료의 신빙성을 몇 번이고 대조하고 나서야 정보를 전달했을 것이다. 어떤 의문도, 의심도 품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결과만. 에만은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한마디 덧붙였을 뿐이다.
고철 덕지덕지 붙여진 간판에는, 마구잡이로 둘러진 형광 네온이 스파크를 간헐적으로 일으키며 아직까진 제대로 영업하고 있다는 사인의 스파크를 미약한 출력으로 뿜어내고 있다. 바로 옆 고물상과 이어져있는 이 볼품없는 가게는, 이 구획에서 가장- 까지는 아니어도. 일부 아는 사람들에겐 컬트적인 지지를 얻고있는 무기상이었다. 단지 탄두와 탄피가 튀는 것에 질리고, 총이 몸 안에서 요동치는 것에 둔감하며, 더 이상 평범한 화력으로 사람을 쏘는데에 질린 사람들 말이다. 아니면, 그냥 당신이 '변태-기계적 취향'을 가졌을 뿐이라거나. 뭐 어느쪽이든간에. 아무튼 오늘 들를 손님도 바로 그 매력에 감화된 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었다.
'띠링- 이랏샤이마세에.' 문을 열자, 언제 들어도 구린 벨이 손님을 맞이한다.
"어서옵셔~ 화장실은 뒤쪽, 호신용은 저쪽, 수류탄 코너는 이쪽, 강도는 경찰은 안 부를 테니까 그냥 뒤돌아 나가면 된다구~ 푸슈-"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이것도 접대의 일종이라고 해야할까. 들어오자마자 카운터 쪽, 정확히는 카운터를 겸하고 있는 유리 진열대 위에 두 다리를 형편좋게 올리고서 잡지에 빨려 들어갈듯 시선 가까이 펼쳐보고 있는 자가 먼저 눈에 띈다. 이게 이 가게의 룰이라면 룰이였다.
룰 첫 째, 이 가게에선 모두 평등하다. 룰 둘 째, 이 가게는 전부 주인장 기분에 따라 돌아간다. 둘 셋 째, 파인애플 피자는 죄악이다.
"~♪"
그리고 여기, 앰프에서 튀어나오는 비트에 맞춰 발목을 까닥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보인다- 너드 히피같은 여자가, 바로 이 난데모 메카니컬 상점의 주인장 로미 카나운트였다.
"예에. 그 점을 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저희 호텔은 장기 숙박만을 받고 있어서 말이죠. 손님이 찾고 계신 호텔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인가. 비슷한 경우를 최근엔 찾기 어려웠으나, 예전엔 종종 한 주에도 몇 번인가 응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있다. 만약 지금 이 손님을 대하는 게 그 때 20대의 하멜슨이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하멜슨은 지금처럼 여유를 부려대거나 관용을 베푸는 행동 따윈 하지 않았을 거라 단언한다. 왜냐면 그땐 절대 휘지 않고 차라리 부러지리만큼 빳빳히 고개를 든 그 사업가로서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어둔 분위기를 감지한 그 순간에 아무 의심 않는 척, 호텔 안으로 이 여성을 들여보냈을 테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쳐, 사회의 쓴맛을 보여줌과 동시에 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을 내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언젠가 이자벨라가 말을 하길, 하멜슨은 하나를 보는 것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플 만큼이나 뛰어나지만 둘 이상을 같이 보는 것에 영 서툴다고 평했다. 요컨대 아무리 눈 앞의 악한 의도를 품은 손님에게 최대의 이익을 뽑아낸다고 한들, 그건 앞으로 벌어들일 전체적인 사업의 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도 한참이나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홀로 의지할 곳 없이 지내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지어진 이 호텔의 오너가, 자신의 소박한 돈벌이를 위해서 아무 사람이나 막 호텔로 입주시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곳에 항상 머물러 줄 가족 같은 고객들과, 잠깐의 돈벌이의 무게를 저울질 하지도 못할 정도의 옹이 눈이 아니라고 하멜슨은 스스로를 조금 변호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악인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에 누구도 욕할 사람이 없다 하겠지만, 그것과 호텔의 이미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레이스 호텔의 간판에 매겨진 값어치는 그런 싸구려 돈벌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그의 가족 모두가 그 위에 올라타 있으니.
하멜슨은 일장 연설이라도 하듯 헛기침을 한번 하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비탄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이 뉴 베르세바엔 수 많은 조직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 꼭 그런 조직에 속한 이들만 존재한다는 법은 없지요. 소외 계층은 어디든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저희는 그런 분들께... 단순한 호텔이 아닌, 안전한 집을 마련해 드리고 있는 셈이죠. 손님께선 그런 집이 필요하신 겁니까?"
아마도 료의 머릿 속에서 지금쯤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을 검은 연기 같은 생각들을 단박에 부수어 버리듯 쐐기를 박는다. 짧은 한숨과, 얼마간의 미소도 함께.
"후우-, 밖에도 좋은 숙소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엔, 선불로 적당한 돈을 지불한다면 손님께 어느 것도 묻지 않고 바로 방을 내어주는 그런 곳도 분명 존재하겠죠."
라는 것은 충분한 돈이 있다고 말한 료의 말을 정확히 꼬집는 발언이다. 돈 이외엔 어느 것도 보지 않는 그런 숙소에서조차 거절되고 여기에 왔다는 것은 곧 지금의 그녀에게 그 정도의 자금을 변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렇기에 이 한 마디는 그야말로 작별의 한 마디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