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어제처럼 얼어붙을 것 같던 날씨에 퍼디난드의 머리카락이 또 꽁꽁 얼었다. 앞으로는 머리를 다 말리고 출근해야겠다. 머리 밑에 고드름이 맺힌 걸 보며 끔찍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마시던 루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스노우 맨이 여기 있네!" "조용히 해, 슬라임 커피 괴물." 퍼디난드는 코를 훌쩍이며 안으로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추워 죽겠어! 이대로라면 세상은 빙하기에 들어서고 말 거야." 하고 투정을 부리자 루이스는 낄낄 웃으며 퍼디난드를 팔꿈치로 툭 쳤다. 살이 에이듯 추운 날씨 때문에 몸이 꽝꽝 얼어 조금만 닿아도 아팠다. 퍼디난드는 펄쩍 뛰며 엄살을 피웠다.
"아야!" "꼴좋다. 그니까 누가 춥게 입고 오래? 이 날씨에 누가 짧은 패딩을 입어?" "넌 패션의 F자도 몰라!" "난 실용적인 거고." 퍼디난드는 머리 하나는 더 큰 루이스를 노려다 보다 이내 주먹을 들어 그의 허리를 퍽 쳤다. "Ouch!" 반지 낀 손가락이 루이스의 허리를 파고들자 호들갑 가득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퍼디난드는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썼다. "진짜 짜증 나."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게슴츠레 좁히더니 루이스를 다시금 노려봤다. "야, 반지 어디다 뒀어?" "아, 반지." 루이스가 뭉툭한 소지가 있는 왼손을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샤워하면서 빼두고 하는데, 실수로 안 끼고 왔나 봐." "그럴 수도 있지." 퍼디난드는 입술을 비죽이고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취!" 재채기를 하자 루이스가 머그컵을 사수하더니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조심해! 내 생명수는 소중하다고." "이 슬라임 커피 괴물, 어련하시겠어.. 에취!" 퍼디난드가 다시금 재채기를 하더니 휙 돌았다. "아, 얼어 죽겠다.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먼저 사무실 들어갈 테니까 늦지 않게 들어와." "그래. 아, 맞다. bless you!" "늦었어!"
루이스의 경박한 축복에 문을 닫고 나온 퍼디난드는 복도로 나서자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 티격태격하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복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서 버튼을 눌렀다. 20초 정도 기다리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로 들어서 맨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테라스가 있는 옥상이다. 금연구역이 확장되자 암묵적으로 테라스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쉬고 싶은데 죽겠다며 비흡연자들의 아우성이 오갔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듯 자리를 옮겨 쉰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대다수는 살인 전담팀이다. 자문을 위해 방문한 법의학자도 폐암으로 한 걸음 내딛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라며 담배를 꺼내들 정도였고, 그들의 고충을 알기 때문인지 짧은 핀잔만 오고 갈 뿐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퍼디난드는 버튼을 눌렀다. "잠깐만요!" 저 멀리서 사기 전담팀의 신입 경찰이 후다닥 달려왔고, 이내 쿵 소리와 함께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감사합니다!" 퍼디난드는 "별말씀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 엘리베이터는 침묵과 함께 올라갔다. 퍼디난드는 그 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반지 낀 손은 올곧고 길쭉하다. 얇은 반지에 박힌 얇은 보석은 처음 꼈을 때처럼 관리가 잘 되어 반짝인다. 안식년에 접어든 그의 대부 리우리엔이 낀 결혼반지와는 달랐다. 리우리엔의 우아하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와는 달리 그의 반지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수수하다. 무엇보다 결혼반지와는 용도 자체가 달랐다. 이 반지는 그가 큰맘 먹고 친구를 위해 준비한 우정반지다. 루이스 말이다.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지금 와서야 퍼디난드와 루이스는 동기이자 파트너이고,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처음엔 아니었다. 루이스는 저번 기수의 합격자 중에서 유일하게 팀 내부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계속 겉돌았기 때문이다. 퍼디난드는 그런 루이스와 유일한 동갑이었고, 루이스에게 다가갔지만 루이스는 계속 벽을 쳤다. 그럼에도 둘의 우정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퍼디난드가 끊임없이 다가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도 있지만 처음 파견을 간 사건이 가장 크다. 루이스는 아직 미숙했고, 퍼디난드도 미숙했다. 첫 파견은 총기를 들고 은행을 습격한 강도였다. 그 사건에서 루이스는 소지 한 마디를 잃었다. 범인이 주변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을 때 루이스의 손가락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범인을 제압하느라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던 상황에서 퍼디난드가 루이스의 지혈을 도왔다. 비록 손가락은 찾을 수 없었지만, 루이스의 마음은 활짝 열려 퍼디난드를 받아들였다.
이후 둘은 모든 걸 함께했다. 루이스는 외로운 퍼디난드에게 아주 좋은 친구였다. 혼자 살던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집에 초대하기도 했고, 루이스도 퍼디난드를 집에 초대해 서로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물론 루이스의 요리는 끔찍하게 맛이 없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새로워 짧은 다툼 뒤로 낄낄 웃으며 낡은 소파에 앉아 조그마한 TV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루이스의 집, 퀴퀴한 냄새가 나는 소파 위에서 그의 대부조차 학을 떼며 이건 망했다 혹평을 날린 B급 영화를 보며 술을 마셨다. 퍼디난드가 늘 마시던 와인이 아닌 값싼 보드카와 레드불을 엉망진창으로 섞은 예거밤을 마시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술김에 대화를 하며 서로 맞는 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터놓은 것도 많았다. 퍼디난드는 술김에 처음으로 남에게 그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난 외로운데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기만자라고 하지."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렸다. 이런 말을 하면 루이스가 떠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늘 그랬기 때문이다. 멍청한 퍼디난드!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를 한번 끌어안고 등을 크게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외로움마저 다를 리는 없지. 내가 너를 이해해."
그 이후로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하게 됐다. 최고의 파트너였고, 친구이자, 뉴욕 경찰국 내에서 자석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서로 마음을 열게 된 지 1년째 되던 이번 2월, 퍼디난드는 큰마음을 먹고 반지를 맞추자 제안했다. 어린 시절에 TV에서 본 히어로가 사이드 킥이 서로 주먹을 맞대고 우정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루이스는 그의 취향을 잘 알았고,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낄낄대며 어깨를 툭 쳤다. 그 이후로 맞춘 것이 이 반지다. 퍼디난드는 하루도 반지를 빼놓고 다니지 않았다. 씻을 때도, 잠들 때도. 이젠 신체의 일부가 됐다. 침묵하며 깔끔하게 관리한 반지를 쳐다보던 퍼디난드를 누군가 불렀다. "저기요."
퍼디난드는 고개를 돌렸다. 사기 전담팀의 신입이 눈치를 보며 문이 닫히지 않도록 열림 버튼을 꾹 누르고 있었다. 언제부터 누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했다. 퍼디난드는 사과하듯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사기 전담팀의 신입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잽싸게 구석자리로 뛰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뒤의 문이 닫히자 퍼디난드도 북쪽으로 걸었다. 그와 그의 대부가 만나 자주 담배를 피우던 곳이고, 그의 구역 같은 장소다. 퍼디난드는 주머니에 짱박힌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툭툭 털어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며 잠시간의 침묵 뒤로 연기를 뱉자 짙은 헤이즐넛 향이 가득 찼다. 루이스의 거짓말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루이스는 2주 전부터 반지를 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 간의 선이 있으니 그 선을 지키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오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어쩌면 혼자만 몰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시 연초를 입에 물며 퍼디난드가 뺨을 스치는 찬 바람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루이스의 반응을 생각할수록 어딘가 불편했다. 파파라치가 그의 사진을 찍어도 이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유명세를 등에 업고 경찰이 된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 척한다며 손가락질을 할 때도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퍼디난드가 희뿌연 연기를 뱉으며 물기가 바싹 마른 앞머리를 연신 뒤로 쓸어넘겼다. 그리고 연초를 다시 물며 생각했다. 이거, 설마 짜증인가? 막상 짜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나빴다. 꼭 자신이 친구 하나의 사생활까지 매달려 간섭하는 음침한 녀석 같지 않은가! 퍼디난드는 매서운 눈매로 연기와 F-Word를 함께 뱉었다. 고요한 테라스를 울리는 F 소리에 사기 전담팀 신입이 고개를 휙 돌렸다. 퍼디난드는 그런 신입을 한번 바라보고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이젠 시선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고작 이런 일로 짜증이 난다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퍼디난드는 연달아 3개비를 피우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평범한 하루가 지속됐다.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정리한 덕분인지 루이스에게 따지지 않고 서로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도 그 사실이 우스웠기 때문에 부러 말하지 않은 탓도 있다. 사생활에 일거수일투족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날 반차를 써 일찍 퇴근했다.
12월 5일. 평범한 날이었다. 겉보기에 평화로운 뉴욕이었고, 퍼디난드의 아버지 마크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배우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건 흔한 일이었고, 마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백화점을 향하고 있었다. 마크가 명쾌하게 카메라맨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오늘은 딸 나탈리를 위한 쇼핑을 할 생각입니다. 잘생겼단 이유로 체포만 안 당하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백화점은 경찰이 통제하고 있었다. 마크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카메라맨을 마주 봤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경찰 하나에게 다가가 선글라스를 슥 내렸다. "좋은 점심입니다. 그리고 실례합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죠?" "죄송합니다, 선생님. 쇼핑센터는 지금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사건이라도 일어났나요?" "누군가 익명으로 전화해 폭발물로 추정되는 수상한 가방을 숨겼다는데.. 현재 기동대가 안에 있으니 확인 이후 해체작업이 완료되면 들여보내드리겠습니다." "맙소사!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전부 안전하게 준비하고 간 건 맞죠? 그렇죠?" "베르너 씨, 왜 그러세요?" 카메라맨이 말을 던졌을 무렵이었다. 귀를 울리는 괴성을 뒤로 어디선가 칠판 긁듯 높은 비명이 울렸다. 건물에서 폭음이 들렸고 카메라가 모든 순간을 담았다. 불길은 삽시간에 치솟고 주변이 아비규환이 됐다. 서로 도망치기 위해 달렸고, 넘어지면 짓밟고 그대로 달렸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 마크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경찰을 뿌리쳤다가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마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카메라는 끔찍하게도 그의 반응을 모두 담았다.
"퍼지, 안 돼……."
저 안에 그의 아들이 있었다.
별거 없는 날이었다. 날은 코가 얼듯 추웠고, 늘 그렇듯 파견을 나왔다. 팀 전원이 수색작업에 돌입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이스가 오늘따라 불안한 눈치였다는 것 뿐이다. 퍼디난드는 작게 농담을 던졌다. "폭탄 한두 번 해체해 보냐? 쫄지 마." 루이스는 퍼디난드를 휙 쏘아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한두 번 해체했나.." "너 왜 그래? 쫄았냐?" 퍼디난드는 눈을 둥글게 떴다. 왜 저런 반응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루이스는 퍼디난드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난 2층 수색해 볼게." "너.. 아니다." 퍼디난드는 그 모습에서 묘한 짜증이 생겼다. 요즘 루이스는 이상했다. 퍼디난드는 불퉁하게 말했다. "뭐 찾으면 무전 줘."
그가 수색을 시작한 곳은 명품 향수를 파는 4층 매장이었다. 평소 같으면 사람이 몰려있겠지만 직원도, 손님도 모두 대피해 아무것도 없고 향수만 덩그러니 있었다. 한 곳 한 곳 세심하게 찾았지만 향수와 그뿐이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무전이 지직거리고 이윽고 제멋대로 떠드는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는 7층,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ㄷ- ─ 저런.. 구원받지 못할 어린 양이 여기 있구나. ─ 잠깐만, 잠깐!
그리고 폭음이 울리며 건물 전체가 진동했다. 퍼디난드는 뒤로 넘어졌다. 온몸 위로 향수병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팔을 들어 방어했을 때 와장창 소리가 들리고 팔에 고통이 스몄다.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엉망이었다. 값비싸고 좋은 향을 내뿜던 향수는 제각기 바닥에 엎어지고 깨져 숨이 막힐 정도로 독하게 얽혔다. 온몸을 덮은 지독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했다. "여기는 4층. 지원 요청이 필요한가?"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퍼디난드는 다시금 무전을 보냈다. "아이작 씨?" 무전이 없자 퍼디난드는 황급히 위를 향해 올라갔다. 소총을 품에 안고 돌격했을 때, 7층 의류매장은 난장판이었다.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고, 제각기 쓰러진 대원이 보였다. 퍼디난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작을 비롯해 세명 정도가 더 쓰러졌고, 모두 아는 사람이었다. 그중 둘은 쓰러진 채로 몸에 불이 붙어있었는데 몸부림치거나 일어나지 않았다. 즉사한 것 같았다. 아이작에게 다가간 퍼디난드는 그를 살살 흔들었다. 그를 뒤집었을 때, 퍼디난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온몸이 바싹 그을려있다. 도저히 폭발에 휘말린 것으로는 볼 수 없었다. 퍼디난드는 그런 아이작을 안았다. "아이작, 아이작 씨. 정신 차려봐요. 아니죠? 아이작 씨." 아이작의 그을린 얼굴이 부스러졌다. 온몸의 수분을 모두 뺏겼거나, 그만큼의 열 때문에 타버린 것 같았다. 부검을 해도 이런 일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상식을 초월한 일에 퍼디난드는 덜덜 떨었다. 옷이 불타 독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다시 아이작을 흔들어보던 퍼디난드가 치미는 격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상식 밖의 일이 다시금 일어났다. 온몸이 타는듯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퍼디난드는 비명을 질렀다. 아이작이 불길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나뒹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있던 대원이 다가가자 어디선가 불길이 휘몰아쳐 그를 감쌌다. 그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시야에 잡혔다.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하고, 옆에 다른 사람이 서있었다.
─ 4권 148p. 에스더는 더 완전해졌다. 그의 대담한 살인 행각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었다. 그는 자신이 우월하다 생각했다. 나는 선지자 에스더다! 그는 결국 미쳐버렸다. 악인의 말로는 광기였다..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네! 작가님께서 이 사건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으음, 자신의 세상이 실현되는 거잖아. 나라면 기뻐 뛰며 찬양하고 춤췄으리. ─ 그, 그냥 시위만 한다며. 위협만 한다며!! 이런다고는 안 했잖아요!! ─ 아, 가엾고도 멍청한 나의 어린 양아.. 들어라!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피와 폭력으로 이루어질지니.. 죽기 싫으면 너도 나와 동참하는 것이 좋으리라? ─ 난.. 난 못해.. ─ 자기, 어린 양, 나의 신도, 꼬마야. 네 소중한 친구를 잃어도? ─ 난...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에스더, 제발 멈춰주세요. 제발! ─ 여기 경찰이 몇 명? ─ 씨발, 이런다고 안 했잖- ─ 여기 경찰이, 몇 명? 나의 어린 양아, 나는 여러 번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한단다. 네가 새로운 세상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구원자 중 하나인데, 내가 널 다른 사람과 같이 영영 잃는다면 얼마나 슬플까.. 응? 나는 너의 유일한 이해자, 구원자, 그리고 메시아가 아니더냐. 응? ─ ……도주 경로는 열어뒀으니 그쪽으로 가. 나는 2층으로 돌아갈 테니까.
제멋대로 떠들며 에스더라고 불린 사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구겨졌다. 푸석한 금발 머리 밑의 눈동자는 새파랗지만 분노에 얼룩졌고, 옅은 주근깨가 있는 얼굴은 웃지 않고 있다. 그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머리가 계속 부정했지만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공중에 둥실 떠오르더니 그대로 흘러가듯 사라졌다. 퍼디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타는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틀 전 했던 대화가 머리를 맴돌았다. 초능력이 있으면 초능력자가 우대받는 세상이 올까. 그때 했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구나. 죽어버린 동료의 눈을 감겨주며 퍼디난드는 아래로 향했다. 루이스가 묵인하고 에스더가 벌인 테러로 인해 이미 사람이 죽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7층 전멸. 2층으로 돌입한다." 퍼디난드는 2층에 돌입하자마자 총을 겨눴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장난감이 가득한 2층 한가운데에서, 루이스가 그를 돌아봤다.
"루이스." "…퍼디난드?" "당장 투항해." "무슨 소리야, 같은 팀원끼리.." "에스더는 어디 있어, 투항해!" "너, 그걸 어떻게…… 아냐, 너도 아는구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잘 하는 게 뭐가 있겠어. 다들 알겠네.. 그래, 내가 그랬어." "왜 그랬어, 왜!" "미안해. 내가 그분을 안으로 들여보냈어. 우리 팀의 정보를 줬어. 그 사람이 초능력자를 우대해 준대, 그러니까, 나는 고아니까, 저 사람이 나를 가족으로 대해준다길래, 내가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준대서, 그래서.." "루이스, 정신 차려. 지금이라도 투항해." "나는 죽으면 지옥 가겠지? 나, 나는, 죽으면.. 그렇지만 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사람을 죽였어? 아이작 씨를, 수잔을? 제프를? 대체 왜, 그 사람이 뭐라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루이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퍼디난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루이스 주변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다시금 벌어지고, 무전을 받고 살아 돌아온 동료 몇이 도착했다. 장난감과 잔해가 어지럽게 바람을 타고 휘몰아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루이스는 코를 찡그리며 외쳤다. 순간 퍼디난드는 불편했다. 여전히 어제처럼 불편했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누군가 그 짜증과 불쾌감을 망치로 내려쳐 깨부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 밀어 넣은 기분이었다. 목이 까끌까끌하고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속을 뒤집었다. 대부님의 당부가 이런 것이었나 보다. 경찰과 인간의 감정을 분리하라는 뜻이 이런 것이었나 보다. 루이스의 화난 표정을 보니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너는 고아도 아니고, 나처럼 이런 끔찍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많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루이스, 너." "하, 하하. 그래. 그래.. 사람들이 다 뒷얘기 하더라, 난, 난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 너는 뭘 해도 잘났고, 나는, 나는.. 네 주변에 붙어서 그 뒷바라지나 다름없는 그 삶이 끔찍했다고!! 아무도 이해하지 않아? 당연하지! 네가 외롭다고 해서 우리와 같을 것 같아? 잘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잘난 삶을 살아온 네가 같을 것 같냐고!!" "루이스 그레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에스더는 어딨어." "넌 끝까지 날 추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그래, 말해줄게. 그분은 이미 가셨어." "어디로 갔는데." "말할 수 없어." "루이스 그레이!!"
화를 삭이듯 보호용 헬멧 너머로 눈을 크게 뜬 퍼디난드를 마주친 루이스는 멈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퍼디난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시금 총을 겨눴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퍼디난드의 옆에 있던 동료를 베어 갈라버렸다. 그는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했고,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루이스가 뒤로 넘어갔다.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던 루이스는 큰 타격이 없었으나 뒤로 넘어갔고, 휘몰아치며 몸을 감싸던 바람은 사방팔방 날아가더니 이내 건물의 기둥에 직격했다. 튼튼하던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건물 전체가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금이 가며, 루이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주변 상황을 보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듯 절망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쳐다봤다. 익숙했던 동료 몇이 처참하게 찢겨 고통에 신음하고, 퍼디난드는. 그 장면을 모두 보다 루이스를 똑바로 마주쳤다. 루이스가 덜덜 떨리는 입을 벌렸다.
"퍼, 퍼디난드." "……." "미안해, 거, 거짓말이야. 사실 나 죽기 싫은데, 내가, 내가 어떻게 됐나 봐. 미,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나.. 내가, 내가 미안해.. 살고 싶은데, 그럴 자격도 없어. 그러니까, 나, 내가 너한테 상처를……." "……." "그러니까, 용서해, 용, 용서해 줘. 나,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젠장, 퍼디난드, 위!!"
루이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다가 위를 쳐다봤다. 무너진 천장이 우수수 쏟아지고는 루이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확인하기도 전에 다른 동료가 퍼디난드를 떠밀었다. 퍼디난드는 잔해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뭉툭한 소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건물은 주저앉기 시작했고, 퍼디난드가 밀쳐지는 손길대로 넘어지며 눈을 감았다. 끝까지 루이스는 반지를 끼지 않았다. 루이스의 말이 계속 귀를 맴돌았다. 차라리 내버려 뒀다면, 작은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루이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면, 루이스를 조금 더 돌봤다면. 차라리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퍼디난드는 잔해가 떨어져 헬멧에 울리는 큰 충격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시야가 흐렸다. 빛이 쨍하다. 먹먹하던 귀 사이로 누군가의 큰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눈이 빛에 익어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웠다. 퍼디난드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아!! 퍼지, 퍼지!! 정신이 드는구나. 신이시여.."
옆을 보니 나탈리가 초췌한 안색으로 울고 있었다. 빙빙 도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무도 없고, 오로지 그와 나탈리, 그리고 주치의와 간호사만 곁에 있었다. 주치의도 퍼디난드가 깨어나자 벅차오르는 미소를 지었다. 퍼디난드는 나흘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주치의는 그의 상태를 몇 가지 진단하고는 조금 회복하면 될 것이라 말했다. 나탈리는 부모님을 모셔오겠다 했고, 주치의와 간호사를 대동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병실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는 파리한 안색으로 들어온 정장 차림의 사람을 마주했다.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씨 되십니까." "맞습니다."
퍼디난드는 목이 잠겼는지 낮게 답했다. 남성이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자 퍼디난드는 진통제에 취한 눈으로 신분증을 쳐다봤다. 익스퍼 보안 관리부 소속 폴 웨더. 폴은 퍼디난드의 안색을 살피다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했다.
"테러는 유감입니다." "……뉴욕 경찰국과 연방수사국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이름의 보안 관리부는 본 적이 없고요. 누구십니까. 제게는 파파라치가 많이 붙어있습니다. 사칭하는 사람도 많고요. 용건만 말하고 가지 않는다면 제 보안 요원을 부르겠습니다."
퍼디난드의 머리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라 들어왔다. 까다로운 사람이구만. 남성의 주머니에서 삐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퍼디난드는 지끈 울리는 머리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 오, 익스파 반응이 보이는군요. 제 생각이라도 읽은 듯싶습니다." "뭐라고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이스 그레이 씨가 부리던 이상한 힘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리고 현재 베르너 씨께서 제 생각을 읽으셨지요." "무슨 소리입니까?" "선생님께서 스파이더맨과 같은 초인적인 힘을 가졌다 그 말입니다. 비과학적이고 초자연적인 힘, 익스파를 다루는 사람은 지구에 실존합니다. 저희는 그런 사람을 익스퍼라 부르고 있으며, 그 존재를 비밀로 부쳐 관리하고 있습니다."
퍼디난드는 미쳤냐는 시선으로 폴을 쳐다봤다. 저 사람이 정말 정상인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자 이번엔 다른게 떠올랐다. 한 여성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22세, 어디 보자.. 오! 지금 핫한 뉴욕의 영웅이군. 폴, 자네가 다녀오게. ─ 저요? ─ 자네 말고 다른 폴이 있나?
"저도 사생활이 있습니다."
폴이 헛기침을 하자 퍼디난드는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합니다." "아니오, 이해합니다. 지금은 혼란스럽겠지요. 아무튼 베르너 씨는 지금부터 익스퍼로 등록될 것이며, 회복이 되는대로 그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가족분께도 확실하게 기밀 유지에 대한 교육을 할 예정입니다." "……." "자유의 미합중국 시민으로서 맹세합니다. 감시를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한 일은 일절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익스파를 통한 범죄를 벌일 경우에는 예외지요." "믿을 수 없군." "처음엔 다들 그럽니다."
퍼디난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루이스도 이런 존재였을 것이다.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폴은 퍼디난드가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자 당황한 듯 허둥댔다. 퍼디난드는 괜찮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을 떠오르자 머리가 윙 울리며 다시금 루이스가 뱉던 말이 귓전을 때렸다.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몸을 부르르 떨던 퍼디난드는 애써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혹시 에스더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 "뭐든 알려주십시오."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익스파 파장이 하나 더 검출되긴 했지만,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걸로 미루어보아 미등록 익스퍼로 추정되어 당국에서 추적에 나섰습니다만.. 에스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교육 장소는 가족분께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몸도 편찮으실 텐데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뉴욕의 영웅." "방금 뭐라고요?" "아, 모르시나 보군요. 지금 뉴스에서 베르너 씨를 두고 뉴욕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테러범을 사살하고 살아남은 기적적인 영웅이라면서요."
폴은 병실 밖으로 나갔다. 퍼디난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협탁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뉴스로 채널을 돌리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화재로 불타던 건물이 이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퍼디난드는 리모컨을 내팽개치며 머리를 감쌌다. 손목에 꽂힌 링거 바늘이 파고들고 피가 역류했다. 퍼디난드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굽히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간호사가 달려 들어와 퍼디난드를 붙잡았다. 앵커가 잠시 묵념하고 화면 속에서 멋대로 떠들었다. 끔찍한 테러에서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씨는 주범을 사살하고 살아남은 영웅이 되었으나.. 퍼디난드는 두 눈을 홉뜨며 그대로 굳었다. 아니다. 나는 너무도 어린 나이의 청년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람을 실수로 죽여버린 살인자에 불과하다. 영웅이 아니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테러범이라며 화면에 뜨는 사진 자료는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다. 이후. 순직한 동료의 얼굴이 하나하나 떴다. 그 명단 사이에 루이스가 있었다. 퍼디난드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다 진정제를 맞고 늘어졌다. 몸이 천천히 이완되는 와중에도 머리에서는 그때의 기억이 떠나가지 않았다.
퍼디난드는 퇴원한 직후 교육을 받았다. 사정을 듣게 된 가족은 더 쉬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쉬면 머리에서 루이스의 외침이 떠나가지 않았다. 익스퍼에 대한 교육을 받던 날에도, 훈장을 수여받던 날에도. 퍼디난드는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처럼 떳떳하게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다시 일상에 섞여들어갔다. 퍼디난드가 정해진 절차를 밟고 자유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되었긴 하나 가족관계 하나 없던 루이스의 장례를 도맡은 것이었다. 퍼디난드는 압사당한 친구였던 시체가 담긴 관을 끌어안았고, 유품을 받을 사람이 없자 대신 받았다. 그리고 그의 낡고 협소한 뉴욕 단칸방을 정리하던 도중 반지를 발견했다. 낡은 것투성이인 방에서 늘 새것처럼 닦은 반지는 벨벳 천이 들어있는 종이 상자에 곱게 담겨있었다. 퍼디난드는 그 자리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을 술로 지새우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27일, 퍼디난드는 가위 날로 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머리카락은 비대칭으로 잘리고 목에는 평생 남을 흉터가 졌다.
2021년 12월 28일. 날씨는 쌀쌀하고 갑자기 그 사실이 불편해 퍼디난드는 길가에서 멈춰 섰다. 흰 롱패딩을 입고 초커와 터틀넥을 통해 이중으로 목을 가린 그는 숨이 불편한지 잠시 허리를 숙이고 꽉 조이는 가슴이 있을 옷깃을 그러모아 쥐었다. 몸이 휘청이며 새하얀 입김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통증을 무시하면 또 멀미가 났다.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깨진 향수가 섞인 냄새, 살갗 타는 냄새, 그렇게 하루만큼 늙어가는 사람들의 냄새다. 지독한 멀미와 함께 염증이 느껴졌다. 조금만 마음을 읽어봐도 호의에 가려진 악의가 넘쳐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다. 그 와중에 여전히 어지러운 감정이 크게 가슴을 쳤다. 무슨 감정인지, 이것이 짜증인지 떠올릴수록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조여오는 그 감정에 숨쉬기가 불편해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불편해 보이시는데, 119라도 불러드릴까요..?" "됐어요." "그래도.." "신경 쓰지 말고 꺼지라고."
퍼디난드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뭐야, 걱정해도 지랄이야, 저 사람 괜찮은 거 맞아? 퍼디난드는 윙윙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영웅의 끝은 추락이다. 원하지 않아도 별자리에 올라서고 만다. 그는 그 사실이 끔찍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멀미를 겪어야 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하며,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걷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정체 모를 화재가 발생했으며, 불은 여덟 시간 만에 진화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여덟 명이 다쳤으며, 그중 두 명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습니다.
다시금 루이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분은 이미 가셨어. 그리고 아직도 잡히지 않았지. 지금도 너를 비웃고 손에 피를 묻히고 계시지. 퍼디난드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고는 미친 사람처럼 밤의 거리를 달렸다. 사람의 어깨를 쳐도 사과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내달렸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탈출구다. 마시고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끝없는 굴레의 쳇바퀴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익스퍼 관리부도 모르는 하나의 사실을 그가 꿰뚫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미친 사람 취급해도 좋고, 하나의 패로 봐도 좋다. 그러니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