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를 쓴 지 얼마 안 돼서 잠들어버리고 말았읍니다.. 랑주 많이 바쁘구나 ( 8 8)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부담갖지 말고 언제든 랑주가 여유로울 때/놀고 싶을 때 와서 같이 놀자 그래도 어제로 늦게까지 일하는 건 끝났다니 다행이네 쉬는 것도 푹 잘 쉬었다면 더 다행일 것 같아
랑은 당신이 시선을 피해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계속 부끄럽기를 바라는게 아니라, 남들과는 조금 다른 랑이기 때문에 당신의 목소리를 입모양으로 읽었다. 시내에서 끊기지 않는 소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되었다. 랑은 문득 생각했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온전하고 또렷한 것으로, 싫을 리가 없다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가 듣고팠다. 그러다 무심코 네 옆으로 다가갔다. 싫으면 떨어져도 된다고 말한 게 바로 방금이었지만- 그래도 네가 싫을 리 없다고 답해주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랑은 아직 몰랐지만,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단 건 '잘' 듣고 싶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좋아서 빨간 거면, 너 나랑 있을 때마다 계속 좋았던 거네-"
괴롭히기만 했던 건 아닌가봐- 랑은 조금 웃었다. 네가 다시 돌아다보면 기다렸단 듯이 미소짓는다. 랑은 꼭 자신처럼 조그맣고 하야말갛게 웃을 줄 알았다. 네 손길이 늘상 땋아두고 있었지만 풀려버리고 만 머리카락 가닥에 닿으면, 랑은 그런 널 눈에 담았다. 깜빡깜빡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당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랑은 한치의 부정도 할 수 없는 단어를 읽었고, 들어버렸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네 옆으로 가까워진건, 이 말을 듣고서 잘못들었다는 핑계조차 댈 수 없게 하려는 우연이었나보다. 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먼저 가판대로 돌아섰다. 이번에도 네가 볼에 입맞춰 주었을 때처럼 모른 척 해버리고 싶었다. 도망가고 숨어버리는게 쉬운데- 고민이 조금 길었다.
"알고 있거드은."
결국은 부끄러워서 툴툴대고 말았다. 머리끈 이야기인 척, 네가 골라줬으니까 당연하지- 말하려고 했었지만 모른 척 하는 것과 다른게 무언가 싶었다. 랑은 얼굴에 열기는 아직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뺨이 빨갛게 오르진 않은 것 같다.
금방 잠들긴 했는데... 꿈속에서 일상을 돌렸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랑이가 어디론가 가려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고, 현민이는 후회물 남주가 돼서 랑이를 태우고 갈 비행기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하려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달려가다가 차가 막히는 바람에 택시에서 내려서 공항으로 전력질주하고 있었읍니다........ 뭐였지... 그 이젠 줄거리도 잘 기억안나는 찌릿씁쓸찌통후회물은... 꿈 깨고 나서 눈물이 핑 돌았어
그래. 너와 있었던 순간이 모두 좋았어. 지금도 좋아. 네가 좋아. 네가 좋아서 빨개지고,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이 낯설어서 수줍어하고 틱틱거리고, 그래, 다 네가 좋아서 그랬어. 아아, 안된다. 현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네 뺨에 입을 맞추었을 때 입술 끝에 와닿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온(無溫)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에 네가 내세웠던 방어기제를. 색도 온도도 그림자도 잃은 구름이 되어버린 네 모습을. 네가 준비되었는지 아닌지 모르는 현민에게, 그 말을- 언젠가 나중에 해주기로 했던 대답을 지금 해버리는 것은 안될 일이다. 그래서 현민은, 빈약한 말솜씨를 그 짧은 순간에 최대한 쥐어짜내서 자신의 입에서 뛰쳐나가려던 말을 한번 부드럽게 깎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 너와 있었던 순간이 싫었던 적 한 번도 없어."
그러나 이것도 네게는 너무 받아내기 힘든 말이었을까. 그래서 현민은 네게 딱히 대답할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방금 있는 대로 쥐어짜내버린 말솜씨 주머니엔 남아있는 게 없어서, 그 말을 자연스럽게 네게 전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현민은 말 대신 제스쳐로 그것을 대신하기로 했다. 마침 현민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던 걸까 몸을 기울여 가까이 다가붙은 네가 가까이 있었기에, 현민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랑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적거렸다. 따뜻하다. 다시 뜨끈한 열기가 얼굴거죽에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현민은 랑의 뺨에서 자기 뺨을 떼고 머리끈들이 걸려있는 진열대로 손을 뻗었다.
"그러면 다른 예쁜 것으로 찾아보자."
사면에 모두 진열품을 걸 수 있는, 그 빙빙 돌릴 수 있는 진열대를 현민은 빙그르 돌려 그 뒤편으로 돌려보았다. 그리고... 현민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랑은 숨었다. 오늘 방과후 학교에서 네가 입맞춰주었을 때. 랑은 밀어냈다. 버스에서 내린 직후 네가 고개를 숙여올 때. 랑은 잘라냈다. 식당에 들어서며 네가 또 밀어낼 거냐 물었을 때. 그래도 아쉬워하는 네 손을 자신의 뺨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에도 랑은 숨을 수 있었고, 밀어낼 수 있었고, 잘라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와 있었던 순간이 싫었던 적 단 한 번도 없는 건, 너 뿐만이 아니라서였다. 매순간이 좋았다고 말하지는 못할 랑이지만, 비밀을 밝히고 만다거나 어찌해야할 지 어떤 건지도 모르는 마음에 헤매고 있었지만 분명 싫지 않았다. 뺨끼리 서로 맞닿았고, 랑은 너를 잡을 수 없어서 주먹을 꼭 쥐었다. 무엇을 용기냈고 무엇에 긴장했는지, 네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짧은 순간 동안에는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온기를 느꼈다. 네 뺨에 오른 열기는 랑의 뺨으로 한 조각 옮겨갔다.
"하늘 같다-"
가판대에서부터 진열대로 시선이 옮겨갔다. 네가 머리끈을 찾는 것을 보다, 언뜻 목소리에 네 손 끝을 눈여겨보니 작은 하늘이 그 곳에 있었다.
"그거로 지금 묶으면 되겠다-"
랑이 그렇게 목소리를 내었을 때, 풋풋한 청춘놀음을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이 반응했다. 가판대와 진열대의 주인, 이 뒤로 있는 가게의 사장님이다. 결제할 머리끈들이 정해진 것 같으니 결제를 돕는다. 여자친구가 예뻐서 뭔들 잘 어울리겠다만 남자친구가 안목이 좋아 잘 골랐다니 하는 말이 순간 쏟아졌다. 랑은 답을 하지 못하고서 결제를 서둘렀고, 작은 비닐에 포장되는 머리끈들을 받고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런데 왤까, 랑이 받은 머리끈은 하나였다. 매듭끈으로 만들어진 머리끈 하나만 비닐에 포장되어 랑의 손에 쥐어졌다.
"남자친구가 묶어주는 거 아녔어~?"
하늘을 닮은 그 머리끈은 포장도 되지 않은 채 네게로 건네지고 있다. 랑은 머리끈을 보았다가, 너를 보았다가, 능청맞은 사장님을 보다가, 또 다시 너를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도 없다. 랑은 시선을 내리고서 조금 우물쭈물거리나 싶더니, 다시 너와 눈을 맞추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도 못 하고, 네가 괜찮을지에만 신경이 쓰였다.
"하고 싶으면, ...해줄래?"
늘 땋고 있었던, 이젠 자국만 남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네가 땋겠다고 하면 땋아주기 편하도록.
머리 묶는 이야기 나온 김에 말하자면 처음에 시트 짤 때 '남캐 머리가 길어도 될까?' 하고 물어봤던 건 서로 머리 묶어주고 놀거나 하는 상황을 보고 싶어서였어 그렇지만 짧은 머리라고 못 묶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장발남캐가 지뢰인 모양이니 장발속성은 현민이 형이 가져갔다구
스스로도 이게 맞나 의심도 해봤다. 벽에 있는 힘껏 들이박아버린 안면을 싸쥐고 넋을 잃다시피 어지러워하기도 해봤다. 마음이 굳어버리기 직전까지도 갔다. 그러나, 그대로 굳어버리기에는, 외면해 버리기에는, 한때의 멍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네가 들이받았던 그 자리에 피어있던 꽃이 너무 예뻤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꽃이 시들도록 놔둬버리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았기에 현민은 차마 포기한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민은, 자신이 전혀 익숙치 않은 것들에 이렇게 발을 들이민 것이다. 쓸쓸한 찬바람에 시리게 메말라있던 발을 따뜻한 물 같은 그것에 내딛는 것은 익숙지 않았고 찌르르 뜨겁기도 했지만, 따뜻했다. 이젠 조금 익숙해서, 현민은 이제 네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네 손을 잡고 따라가도 좋겠지만, 네가 필요로 한다면 내가 이끌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응. 이거- 정말로 예쁠 것 같은데."
랑이 그거로 묶겠다고 말갛게 대답하자, 현민은 랑이 갖기로 한 머리띠 두 개를 담아가지고서는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나 악세서리샵 사장님이 호들갑스레 웃으며 후르륵 쏟아놓는 말에, 랑이 덜컥인 만큼이나 현민의 뺨도 고운 물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냥 침묵으로 일관하면 역시 좀 어색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현민은 말문이 막힌 랑을 대신해 적당히 사장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려 했다.
"-좋은 것들만 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맞장구를 치겠답시고 입을 열었는데 혀가 아니라 심장이 말을 뱉어버렸다. 아이고 맙소사.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라던가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있는데 하필이면. 현민은 사장님의 말을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뇌가 검수하지 않고 심장 멋대로 진행해버린 얌체짓에 대한 결과는 바로 즉석에서 돌아왔다. 남자친구가 묶어주는 거 아녔어? 하는 흐뭇함 가득한 사장님의 말에, 정말이지 이걸 그렇다 해야 할지도 아니다 해야 할지도 조심스러운 판에... 그만 철이른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버리고 만다. "그..." 하고 쩔쩔매다가 현민은 얼떨결에 그 하늘 빛깔 가득한 머리끈을 받아들어 버렸다.
현민은 바로 아까 전에 말했었다. 자신은 싫으면 정색을 한다고.
"......응."
의미 불명의 대답. 현민은 네 머리카락으로, 명주실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그것들 중에서도 땋아내린 자국이 남아 곱슬거리는 것들로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머리... 땋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땋는 거지? 현민은 교실에서 여자애들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종종 장난을 치곤 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려 했다. 그리고 용케 어느 정도 떠올리는 데 성공해서, 세 갈래로 잡아서 어떻게 하던 것 같은데... 까지 떠올렸다. 옆머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잡아당겨서 세 갈래로 나누어쥐어보니, 왠지 어떻게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동작이 좀 서투르긴 했지만 현민은 네 머리카락을 한 마디 한 마디씩 땋아나가기 시작했다. "안 아파?" 머리를 땋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너무 당겨져서 네가 아파할까 조바심을 내며 땋느라 다른 여자아이들이 익숙하게 휘리릭 땋는 동작에 비하면 상당히 느렸지만, 현민의 손은 느리나마 꼼꼼하게 랑의 옆머리를 땋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아까 사장님이 손에 쥐어주었던 머리끈을 땋은 머리카락 묶음 끝에 걸고는 잡아당겨 묶어 맺어놓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네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랑은 직접 말하고 싶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사랑이라면 사랑한다고 직접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용기내어 말한 것처럼 똑같이- 랑도 너에게 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백하고 싶다. 너한테 확실하게 목소리 내기에는 넘어야할 산이 많은데, 이렇게 바람이 불면 단순한 오해임을 아는데도 심통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좋은 것들만 주고 싶다고 답하는 네게도 얕게나마 심술나고 말았다. 너도 남자친구니 여자친구니 하는 말이 아직 우리에게 이른 걸 알고 있겠지만, 랑은 배배 꼬인 못된 심보 때문인지 그러고 말았다. 그렇다고 네게 심술부리지도 못한다. 랑은 옅은 분홍빛 뺨을 하고서 시선만 돌리고 있었다.
"여자친구 부서질까 겁나나 보네~."
네가 머리를 땋아줄 때 랑은 심통이 난 탓에 앞만을 바라보았다. 움직임 없이 멈춘 맑고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는 깜빡거리는 눈꺼풀이 아니었다면, 그 아래 하야말간 뺨에 톡 얹어둔 분홍빛이 아니었다면 인형이라 착각할만 했다. 랑은 머리카락을 땋아내려가는 손길이 참으로 다정하고 조심스럽다고 느꼈다. 땋는 방법을 모르고서 헤매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찬찬히 땋아내려지는게 느껴졌다. 안 아프냐 물으면 그렇다 답하려 했는데, 사장님의 답이 더 빨랐고 부끄러운 말이 한 줄 더 추가됐다. 랑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다시 입을 연다.
"하나도 안 아파."
안 부서지는데- 랑은 오히려 네가 옆에 있어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으응."
머리카락 끝에서 머리끈이 묶이는구나 싶었다. 이렇게 하는게 맞냐 하면 땋인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랑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았다. 심통부리던 랑은 일부러 짓궂게 굴었다. 못되게 굴기로 했다. 예쁘다고 말해주었던 네게 답을 아는 질문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