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듯 한 말에 티르가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그걸 들은 그녀의 눈이 잠깐 티르를 쳐다본다. 지그시 뜬 눈에 비춘 건 의아함이다.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느냐는, 그런 의아함. 그 생각은 보는 걸로 그치지 않고 그녀가 말을 하게 만들었다.
"...넌, 주변에.. 사람도 많으면서.. 왜...?"
거주지가 없는 그녀와 달리 그는 투기장이 있고, 정착해있는 그의 주변엔 사람이 많아보였다. 물론 투기장의 '대기실'의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흐리멍텅한 그녀라도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니. 그들을 제쳐둬도 한 장소의 장으로서 주변에 사람은 많을거다. 그런데 왜?
그녀의 의문은 그 다음 중얼거림을 듣고서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물음표만 늘었다. 왜 많고 많은 것 중에 싸움일까. 자신은 그런 소모적인 삶은, 이제 원하지 않는데. 무심코 흘러나오려는 말을 차가운 에일로 밀어넣어버린다. 궁금하지만 굳이 답을 듣고 싶지도 않아서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 라고 할까, 그 비슷한 자리는 조금 더 이어졌다. 그 사이 제법 높게 쌓였던 고기의 산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옆에는 빈 술병이 그득해졌다. 티르 못지 않게 그녀도 잘 먹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장정 너댓명이 먹을만한 고기와 술을 단 둘이 먹어치운 후에도 그녀는 아쉬운 듯이 손에 묻은 육즙을 핥았다. 대체 음식들이 다 어디로 들어간건지, 그녀의 납작한 배는 먹기 전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더 먹을 생각은 없는 듯, 손과 옷을 깨끗하게 만들더니 음식값으로 보이는 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갈래..."
그래. 그 안하무인한 태도가 어디 가겠는가. 그 한마디만 툭 내뱉더니 흔들흔들 하고 조금 비틀거리며 가게를 나간다. 고작 에일로 취했나 싶겠지만, 의식을 통해 졸리다는 말이 연달아 들리고 있었을거다. 돌아보면 걸으면서 하품하는 모습도 보이니, 이대로 두면 어디론가 가서 잠들지 않을까 싶다.
혈월마성의 수많은 계층중 하나의 계층을 담당하고 있는 존재로 거대한 꿈틀거리는 붉은 살덩이에 눈과 입, 촉수 같은 것들을 뭉쳐놓은 듯한 혐오스러운 외형의 부정형의 괴물. 극단적인 회복력과 다른 생물로 의태하거나 신체적 구조나 각종 기관을 자유자제로 생성, 제거, 변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여러조각으로 흩어져 개별적으로 행동하거나 다시 하나로 합해지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곤란하고 성가신 존재로 신중하지않고 방심하다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습니다
의아한 시아나의 표정을 보며 티르는 피식 웃는다. 안다, 그녀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겠지. 대충 얼버무릴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지 고민하던 그는 이게 뭐 숨길 거냐는 생각이 들어 에일을 비워버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투쟁의 부산물, 혹은 그로 향하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친근하게 술 마실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거지."
싸우고 나면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싸움. 그것만을 추구하는 인생에서 그 외의 것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가 주변 인물들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적인 관계로만 남는 것도 그런 탓이었다. 관심 없었기 때문에. 투쟁의 가치도 모르고, 자신이 인정할 정도로 강한 자들도 아니며, 심지어는 자신의 관심조차 끌지 못 한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에.
티르는 조용히 시안의 궁금증에 대답해주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산처럼 쌓인 고기와 술은 기어코 바닥을 드러냈고, 티르는 마지막 고기를 삼킨 뒤 에일로 입가심을 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정도면 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사실, 요깃거리 치고는 좀 많은 편이긴 했지만... 티르는 잠시 양에 대해 생각하다 시안을 보고는 흥미로움에 빠진다. 그 많은 식사가 저런 얇은 몸에 들어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그러다 길바닥에서 쓰러진다."
그 역시 자신의 몫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시안을 따라나온다. 흔들흔들 거리는 그녀의 몸을 보고있자니 어째 좀 불안했다. 저러다 길바닥에서 자버릴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흘러들어오는 의식 또한 졸리다는 내용 뿐이었던가. 이대로 보내는 것도 찝찝하여, 티르는 시안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치며 그녀를 멈춰세웠다.
"졸리면 투기장에서 자고가라. 네가 저번에 쓴 방, 아직도 비어있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어."
티르는 자신의 투기장이 있는 방향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그 방은 대부분 비어있으니, 하루정도 더 내어준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던가. 만약 그녀가 동의한다면 자신까지 텔레포트로 투기장 앞에 옮겨달라 부탁했을 거고, 거절했다면 그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