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 손아쉬에 쥐인 실은 그대로 허물어졌을 터였다. 그리 하면 더이상 그녀의 생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어째서인가 그는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자신이 말한 건 이런게 아니라면서. 또다시 경고라는 말에 그녀는 실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언제든 끊어버릴 것처럼.
"...너도, 어지간히 제멋대로구나.."
둘의 의식을 잇는 실을 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겠지만 그녀는 티르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 푸른 눈의 시선은 제 손에 쥔 실에 향해 있었다. 티르가 손목을 잡은 덕에 느슨해졌지만 완전히 거두지 않은 이상 언제 다시 끊으려 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것을 노렸는지, 아니면 그저 거두는 것을 잊었는지, 의도도 생각도 알 수 없는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마법은, 본래.. 이런 용도가.. 아니야... 일방적으로, 내보내기 위한... 그런 마법..."
그녀가 잠들기 전, 한참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다닐 적 얘기다. 당시의 그녀는 제 안에 쌓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해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써 답답함을 해소하려 했다. 단순히 마나를 쓰는 것도 도움은 됐지만 머릿속에 담긴 것들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녀는 자신의 의식을 불특정 다수에게 연결시켜 그리로 쏟아내는 방법을 익혔다.
본디 그런 건 일방적일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다. 그 탓에 다수의 희생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응용한거라, 저절로, 흘러..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느릿하게 얘기하던 중 그녀의 눈이 한번 움직여 티르를 본다. 힐끔, 하고 지나가는 시선에 역시 담겨있는 건 없다. 그녀는 실을 쥔 손의 손끝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실을 슬슬 문지르며, 맹함보다는 가라앉았다는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투기장에 다시 찾아갈 때... 그 때를 위해서, 이게..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래서, 끊는게 안 되는 거면... 안 갈게. 투기장... 그럼 되잖아..?"
그녀는 너무 쉽게 말해버렸다. 가지 않겠다고. 그의 투기장에. 이 마법의 용도가 그것을 위해서라고 그가 말했으니, 용도가 없어지면 끊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실을 거둘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되려 손목을 놓으라는 듯 제 팔을 당겨 빼내려고도 했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종점을 향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모두가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길거리의 시인은 그랬었지. 이 곳에 온 후로 깨달은 것은 화장실이 귀찮다는 것, 내 키는 굉장히 찔끔씩 자란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27세인데도 불구하고 성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것. 살아있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별이 수놓은 하늘.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까"
덤덤히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고 만다. 구세라고는 없고 책임감만으로 살아가던 나는 이 곳에 와서 책임질 것도 없으니 '놀기'로 했다. 모든 것은 당신이 바라는대로- 이 곳에 깨어나기 전 우연히 들은 목소리에 따라서. 처음엔 이름조차 없던 나였기에 이 곳에서 이름을 얻고, 떠돌고, 하루 살고 하루 벌고, 웃고 떠블고, 가끔씩은 울고, 가끔씩은 놔두고 와버린 이들을 걱정하고. 그런 삶을 몰랐던 나이기에, 이 곳의 모든 삶은 '즐겁다'. 인형이 감정을 얻으면 그런 기분이 들까. 하루하루 톱니바퀴에 불과하던 내가 이제는 세상을 자유롭게 떠들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 될 줄은 몰랐지. 이름조차 앖던 내가 신님에게 이름을 받고, 기회가 없던 교육을 받으며, 교육이 끝나고 떠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밤에 이렇게 드러누워 밤하늘을 보게 될 줄은..
"전생..이라고 했던가"
호령이라고 한 이가 말했던 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
"뭐..좋나요"
이 곳에선 내게 비극을 일으킬 시스템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자유롭게 살리라.
시아나의 말에 그는 눈매를 살짝 좁히면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그 손을 휙 잡아당긴다면 끊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별로 기꺼운 결과가 아닐테니까.
"마족이 제멋대로인게 뭐가 이상하지?"
제멋대로라는 표현만큼 그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반박하지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겠지. 그렇게 티르가 시안의 손목을 잡고, 시안이 연결된 줄을 잡은 애매한 상황 속에서 대치하던 와중 그녀가 입을 떼자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들려온 말은- 그것은 통신이 아닌 사실 일반적인 의사를 전달하는 마법에 불과했다는 것. 그렇기에 저절로 의식이 흘러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 이야기를 들은 티르는 가는 실을 한번 바라보았다. 언듯 연결되어있는 듯한 줄은 사실상 일방통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째서 텔레파시가 아닌 이런 마법을 가지고 있었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당장은 질문을 삼켰다.
"내겐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만..."
너무나 쉽게 말하는 모습에 그의 목소리 역시 가라앉았다. 그의 경우에는, 좀 더 차분해진 느낌으로. 팔을 당겨 빼내려는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티르는 시안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프게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가. 시안이 빼내려고 해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몸은 꿈쩍 안 하던 것에 가까웠다.
시안을 바라보려다가 어차피 시선이 얽힐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에게 있어 이 편이 더 생각을 정리하기에 편했으니까.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의 눈이 반쯤 떠지며 입이 열렸다.
"난 아직 네가 필요하다, 시아나. 그렇기에 네가 투기장에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실을 끊으려 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내 의견을 너무 밀어붙였던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 부디 실을 거두어주지 않겠나."
티르는 쥐었던 손목에서 힘을 서서히 빼더니 그대로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평소와는 달리 조용한 눈으로 부탁했다. 그에게 있어 사과라는 것도, 부탁이라는 것도,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다만 그렇다 해서 하지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손을 놔준 뒤, 그는 시안을 바라볼 뿐 별 말은 더 하지 않았다. 결국 결정은 그녀가 하는 것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