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의 본능 운운하며 변명스러운 말이 돌아왔을 때, 힐끔 티르에게 향한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련하시겠어. 라고. 그걸 굳이 눈빛으로만 보낸 건 그녀도 마족이기 때문이다. 본능에 따르기는 무척 쉬우나 그걸 거스르고자 할 때 드는 거부감이 어떤지, 잘 아니까. 그 말에 담긴 다른 의미는 아마 모른 듯 하다. 모르는 척 하는 걸 수도 있지만.
티르가 본능에 충실한 마족인 것처럼 그녀도 생각이 곧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일련의 행동들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 정말로 먹어버릴까, 했다가 직전에 관두고 그냥 물러나기는 아쉬우니 맛만 살짝 봤다, 라고 할까.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농락의 의도는 있었다. 그걸 눈치챈 그가 그녀를 놓아버리자 그녀의 몸이 공중에 내버려졌다. 진득하게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너무도 가볍게 놓아졌다.
공중에서 자세를 추스른 그녀는 휙 가버리는 티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놓아질 때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티르의 표정은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쫓아가서 볼 생각도 들지 않아, 가만히 멈춘 채 그가 돌아보며 답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허공에 살짝 걸터앉은 자세를 취한 그녀가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답하는 티르를 보며 짧게 읊조렸다.
"...그래."
그의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담담한 그녀였다.
그 뒤 그녀가 부유한 상태로 소리없이 움직여 앞서나간 티르의 뒤를 쫓았다. 또 달라붙으려나 싶다가도 그러지 않고 티르를 지나쳐 그의 앞으로 나선다. 기나긴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움직여 마치 인어의 꼬리를 연상케 한다. 살짝 돌아 티르를 마주한 그녀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하품을 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남는 방... 있으면, 하루만 빌려줘.. 잠만 자고... 갈 테니까..."
그렇게 자고 깬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잔다는 건가 싶겠지만, 깨어난 후에도 시시때때로 잠이 오는 건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봉인을 위해 걸었던 수면 마법의 후유증인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라진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특유의 멍한 눈으로 티르를 보며 덧붙였다.
"없으면... 그냥 가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는 어쩐지, 장난으로라도 그런 방 없다 하면 정말 그 자리에서 사라질 것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녀가 답한 후에도 좀처럼 얼굴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던지라 어찌할 줄을 모르던 와중, 그녀가 자신의 앞으로 오자 그는 다시 무표정을 짓는다. 표정이긴 했지만, 동시에 가면이었다. 그의 현상태를 숨길 수 있는 견고한 가면.
남는 방 있으면 빌려달라는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한다. 남는 방이라 하면... 적당히 귀빈실을 내어주면 될 것이다. 어차피 귀빈은 잘 안 오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항상 비어있으니까.
"잔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잠인 것인가... 뭐 됐다. 방은 하나 빌려주마. 내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날 따라오면 된다."
티르는 자신의 앞에 둥둥 떠있는 시안을 향해 두 사람이 왔던 길을 가리킨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바로 집무실이니까.
"그냥 가면 곤란하다. 넌 해줄 일이 있거든."
없으면 그냥 간다는 말에 그는 급하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시안이라면 없다고 말한 순간 텔레포트해서 어딘가에서 노숙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곤란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는 시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언제나처럼 맹한 눈이었다. 졸린 것인지 그저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자신이 부탁할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불안해졌다.
"너, 텔레파시 마법은 쓸 수 있나?"
티르는 시안을 검지손가락으로 한번 가리키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내게 가르쳐줘라. 그리고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그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시안을 이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함께 있을 때, 우연이더라도 그럴 때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선을 연결해놔야 했다. 티르 자신은, 어쩌면 시안 그녀도, 방랑벽이 있는지라 행운이 따르지 않고서는 둘이 만나기 힘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놓으면 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텔레파시였다. 마법이라면 둘이 떨어져 있다 해도 연락할 수 있을테니까.
나쁘지 않군, 티르는 홀로 중얼거리고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이들 중 한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사였으니 분명히 텔레파시도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저 눈을 보면 신뢰성이 갑자기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진짜니까.
티르의 대답은 현명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면, 그녀는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또다시 정처없는 방황을 할 생각이었다. 일단 아무데서나 한숨 자고 말이다. 하지만 기꺼이 방을 내준다고 하니, 그녀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무리 오만데서 잘 잔다고 해도 가끔은 좋은 잠자리에서 자고 싶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아까 들었던 물음이 다시 뇌리에 떠오른다. 왜 그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걸까. 원래 그런 사람인가? 첫 대면에서 주먹을 내지르던 모습과는 딴판이라 괴리감이 문득 문득 들면서도, 모종의 기분을 느낀다. 뭘까. 대체.
"...일...?"
빌려줄 방이 있는 곳이자 집무실이 있는 쪽을 가리키길래 자연스럽게 티르의 손끝이 가리키는 쪽을 봤다가, 황급히 이어진 말에 느릿하게 돌아서 그를 보았다. 해줄 일이라니. 그가 그녀에게 시킬게 있던가. 전혀 감도 안 잡히는 그녀에게 티르의 말이 이어 들린다.
그 해줄 일이라는 것에 대해 들은 그녀는 잠시간 티르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에게는 그저 멍한 눈으로 보였겠지만 들춰보면 그녀도 생각이란 걸 하긴 한다. 이번에 한 생각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왜 그 마법이 티르에게 필요한 일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생각한들 해답을 찾을 수 없기에, 일단 가능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은 끄덕임과는 좀 안 맞았지만.
"나도, 제대로 배운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은 해볼게, 방법..."
거기까지 말하고 벌써 세번째인 하품을 한다. 슬슬 자리에 가지 않으면 이 복도 구석에 웅크려 자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졸린 눈을 슥슥 문질러 잠을 좀 깨우곤, 가야 할 방향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잠, 들기 전에... 해줄 테니까.. 방 안내.. 서둘러줘..."
말하자마자 그녀가 앞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왔던 길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건지, 그냥 되는대로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제대로 갈 수는 있었겠지. 그가 있었으니까.
"...티르.."
그녀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부른 건 방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불러놓고 힐끔, 보기만 하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부른 용건을 꺼낸다.
"텔레파시... 배워서 뭐하게...?"
그녀로서는 답을 낼 수 없는 그 의문을 답을 내줄 수 있는 그에게 던지며 중얼거린다. 왜, 라고.
>>79 그렇다면, 이것을 말해드릴게요 혈월마성에는 수많은 존재들... 마수와 괴물들이 꿈틀거리며 개중에는 베아트리체가 데리고있는 와이번(Wyvern)도 있어요 이름은 핌불베르트(Fimbulvetr)이에요. 이외도 와이번은 많이 있겠지만 이녀석은 베아트리체가 곁에 두고 직접돌보기도 하는 강한 개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