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있어? 널 못믿는 건 아닌데, 이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밖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정도로 호위 병력이 남아있는 걸 보면 안에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야. 한 번에 못 끝내면 우리가 죽어."
라임은, "잡졸은 나한테 맡기고 넌 만약을 대비해서 힘을 아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고 투덜거리며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털어내면서도 그의 제안을 묵살할 수 없어 인벤토리에서 망념 중화제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비싼 거니까 꼭 갚아라."
퉁명스런 목소리지만 살아서 나가자는 말이기도 했다. 이것이 마지막 중화제라는 것과 자신도 망념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고, 화살에 바람 속성을 부여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람은 불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하니, 망념을 크게 들이지 않더라도 큰 협력작용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빈센트는 역사적으로 불을 피워서 산소 부족과 공포심으로 농성병력들을 몰살한 사례를 말했다. 동굴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산소가 부족해지고, 그 때문에 일정 깊이 이상의 동굴은 바깥과 연결되는 9인공이건 자연이건) 환기구가 있거나, 활동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감정 기복도 최소화해서 산소 소모를 최대한 줄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력배치를 더 줄여서 대응해야 했다. 빈센트는 저 안에 뭐가 있건 상관하지 않았다.
"만약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잠자는 오크 대왕이래도 상관 없습니다. 결국 그도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요. 만약 산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 같은 것이라면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뭐, 그래도 어차피 오크들은 다 죽여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임무에는 오크 절멸도 끼었으니까요."
빈센트는 라임이 투덜대면서도 건네주는 망념 중화제를 받아서, 망념을 쪽 뺐다. 이제 남은 것은 의념을 최대한 사용해서 저 안에 들어있는 오크들에게 끔찍한 악몽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라임을 보고, 이곳에서 함께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고보니... 여기서 그 방법을 썼다가는 우리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동굴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지점까지 물러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빈센트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잠깐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오크는 꽤나 강인한 종족이었으니까. 하지만 빈센트는 그래도 상관 없고, 오히려 좋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의 논리는 그랬다.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이 불타는 유기체의 몸을 가지고 있고, 대기 조성이 비슷한 이상 그들의 몸도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더 큰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합니다. 오크들의 온 몸에 활동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려면 말이죠. 만약 라임 씨가 제기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오크들의 폐는 정말로 크고 강할 겁니다. 그것 때문에 가슴이 마치 흉갑을 입은 것처럼 불룩 튀어나왔을 정도로요. 하지만 오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불이 난 동굴 안에서 오래 견뎌봤자, 결국은 고통뿐입니다."
어차피 불에 타 죽는다, 하지만 불을 이용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저질러본 빈센트는, '온 몸에 불이 붙는다'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 몸에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일단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온 몸의 근육과 피부가 불타서 결국은 죽고 만다. 게다가 그 와중에 폐도 불탈 수 있었다. 그저 공기를 뜨겁게 가열한 것만으로 수많은 범죄자들을 몰살해본 빈센트가 잘 알고 있었다.
"20분을 넘게 참는다고요? 참아보라고 하시죠. 에어프라이어의 원리를 아십니까? 뜨거운 열풍을 쏴서 음식을 익히는 도구죠. 폭발 화염 때문에 뜨거워진 공기가 뜨거운 열풍이 되는 거고, 오크들의 폐는 에어프라이어에 절반 정도 익혀진 고기가 될 겁니다. 아 도착했군요. 이제 준비하겠습니다."
빈센트는 동굴의 어느 지점에 도착해서, 장갑을 고쳐 썼다. 그리고, 빈센트는, 평소에 엷은 미소만 짓던 그답지 않게, 대놓고 웃으면서, 살벌한 말을 아무랗지도 않게 꺼냈다.
"만약 제가 숨을 20분이나 참는 오크라면, 글쎄요... 딱딱하게 구워진 제 폐를 붙잡고, 고통 속에서 울면서, 아무리 길어봤자 90초면 사망하는 인간을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498 불이 난 동굴 안에서 오래 버텨봤자, 남는 건 결국 고통뿐이다. 맞는 말이다. 존경스러운 소방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도 그 무거운 방화복과 산소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마저도 거센 불길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외피가 불에 타지 않거나 오랫동안 숨을 쉬지 않고도 활동이 가능한 몬스터는 얼마든지 있으나, 적어도 껍데기는 살거죽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술 수준은 인간의 고댓적에 머물러 있는 오크들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야길 맛있어 보이게 말하지 마... 너, 너무 흥분했어."
절반 정도 익혀진 고기라느니 하는 소릴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빈센트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고, 정말 즐거운 듯해 보이는 환한 미소는 이질적이었다. 중화제를 너무 마셔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여태, 제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물을 죽여왔지, 그들이 죽어가면서 느낄 고통까지 공감하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슥거렸다.
빈센트는 자신이 뒤틀려있음을 깨달았다. 빈센트는 웃기다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웃지 않았다. 깨달음을 주는 유머도, 정치 유머도, 사회비판도. 그리고 천박하고 불쾌한 유머도. 빈센트는 아무것도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빈센트가 재미있어하는 것이 있었으니, 불에 무언가 타고, 그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는 게 제일 좋았다. 마약 제조 공장을 태울 때, 마약이 공기 중으로 유출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빈센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든 것은 마약 따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었다.
"증오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입니다. 저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다, 죽어도 싼 것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지키죠. 인간의 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 아닙니까? 사담이 길었군요."
빈센트는 의념을 끌어모았다. 빈센트의 손에서 불길이 모이고, 빈센트는 저 안에서 일어날 끔찍한 사고를 생각하며 웃었다. 다 죽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 고통스러울까? 점칠 필요도 없다. 빈센트는 그저 불길을 모아서, 저 동굴 안으로 밀어넣으면 끝이었다.
"눈 감으시죠."
그리고 그렇게 되고, 눈 앞을 화염의 섬광이 채웠다. 빈센트는 눈을 감고, 눈을 감지 않았다면 눈알을 익혀버렸을 열기를 피부로 느꼈다.
눈을 뜨면, 동굴의 앞은 어둠이 아니라 검댕으로 새카매졌고, 저 안에서는 불에 붙잡힌 오크들의 괴성이 뭉치고 뭉쳐, 오지 말라고 소리치는 괴물의 그것으로 변했다. //9
인류애로 무장하고 인간성을 끔찍이도 잃지 않으려는 그들과는 달리, 자연을 해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진 그녀로써는 온전한 인간 앞에서 떳떳지 못하다. 인간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인간은 이로운 동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적지 않다. 인류의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저질렀던 일들을 본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하지만 그 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는 건 온전한 인간뿐이겠지. 온전한 인간에게 그녀와 같은 이들은,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우고 있더라도,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를 반쪽짜리로 비칠 뿐일 테니까. 그녀는 인간성이니, 인간의 선이니 하는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어 속이 갑갑했다. 이제는 제 입으로 인간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 생각될 지경이니 말이다.
'눈 감으시죠.'
눈을 꾹 감았는데도 눈앞에 해가 비쳤다. 그리고 그 열기를 피부로 느낄 새도 없이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살을 빗맞혀 한 번에 숨통을 끊어놓지 못했을 때에 들려오는 고통 어린 외침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들의 절규는 겹치고 겹치고 겹쳐서 좁고 어두운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귀를 접어 틀어막아도 아프고 괴롭게 귓구멍을 찔러댔다.
체인지 폼(F) 의념을 응용하여 신체의 일부를 변환시키는 기술의 일종. 사용 중에는 수인으로써의 특성이 봉인된다.
결국, 그 비명이 사그라들 때까지, 동굴 바닥에 주저앉아 인간의 것으로 둔갑시킨 귀를 손바닥으로 막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We didn't start the fire 우리가 지핀 불이 아냐. No, we didn't light it, but we tried to fight it 우리가 밝히지는 않았지만, 계속 맞섰지. We didn't start the fire 우리가 지핀 불이 아냐. It was always burning, since the world's been turning 세상이 처음 돌 때부터, 계속 불탔어.
빈센트는 옛날의 노래를 불렀다. 그 때는, 자기 세대가 제일 힘들고 다른 이들은 편하게 지냈다며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무시하는 멍청이들을 비웃는 노래였다. 하지만 지금의 빈센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빈센트는 저 안에서 불타는 이들을 바라보며, 저 안에서 천천히 죽어갈 이들을 생각했다.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타르, 온갖 것이 그들의 폐로 들어갈 것이고, 그들에게 남은 수명은 얼마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짧은 수명마저도 그들에게는 끔찍한 순간일 것이다.
"이 동굴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을 겁니다."
괴물의 비명소리는, 오크들이 하나 둘 침묵하며 잦아들었다. 그 안에서는 훌쩍이는 소리만 조금씩 들렸다. 마치 교향곡을 듣듯이, 빈센트는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빈센트는 거대한 불 뒤에 남는 잿더미처럼, 그의 머릿속에 남는 통증에 이곳까지 화염의 영향이 미쳤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시죠. 이 안은 더 이상 죽일 게 없습니다. 여기가 이렇게 산소가 모자라면, 저 안은 말할 것도 없겠죠." //11
그녀는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그들의 절규가 들려오기 시작할 때부터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숨을 참고 있었다. 낮은 위치에선 공기의 대류로 동굴 바깥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타는 냄새도 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도저히 이곳의 공기를 속에 들일 자신이 없었다. 끔찍한 비명은 곧 잦아들었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동굴의 입구를 향해 비척거리며 나아갔다. 머리에 피가 돌지 않아 현기증이 났다. 동굴 입구로 비치는 밝은 빛에 암실에 적응된 눈이 째어질 듯 시렸으나, 바깥의 공기와 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육을 하며 태연히 노랠 흥얼거릴 수가 있을까, 그토록 즐겁던 미소는 대체 뭐였을까. 이 안은 더 이상 죽일 게 없겠다는 저 말까지도 이질적이다.
동굴 입구로 다가설수록 칼창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와 우렁찬 함성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전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손을 들어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는, 뒤따라오는 제 일행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