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력천군이 누군가요 : 붉은곰의 안티태제같은 영웅으로 보면 됨. 일단 인간 자체가 강함 타입이던 붉은곰과 반대로 기술을 극한까지 가다듬으면 결국 인간은 강해진다는 타입의 산 증거. 실제로 의념 발화의 실마리를 의념 각성자들이 잡은 것도 이 영감이 손에 커다란 의념강 두르고 다니니까 안 거임
>>411 축축하고 냄새나고 좁고 어두운 동굴. 밖에선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헌팅 네트워크에 동굴 안으로 먼저 잠입한 빈센트의 신호가 희미하게 잡히고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모를 깊고 깊은 굴에는, 무언갈 지키고 있는지 군데군데 소수의 호위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라고 해도 소란을 피우면 그 소리를 듣고 안쪽에서 얼마나 많은 오크들이 몰려나올지 모를 일이다. 동굴이라는 지형은 라임에게 상당히 유리한 환경이었다. 반대로 화속성 마도를 사용하는 빈센트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지형이었겠지. 그녀는 예민한 청각과 시각을 이용해, 또 소리없는 화살을 활용해 조용히 조용히 오크의 머리들을 꿰어나갔다. 한 발 한 발에 꽤나 많은 망념이 쌓여갔지만, 망념 중화제를 씹고 마시며 차근차근 어둔 길을 나아갔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는 빈센트의 앞으로 덩치 큰 오크 하나가 풀썩 쓰러진다. "그냥 죽이긴 아까운데..." 하고 푸념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야. 거기 쭈그려 앉아서 뭐하냐? 누가 여기 혼자 들어오래?"
오크에게서 화살을 갈무리하곤, 퍽 시건방진 태도로 빈센트에게 다가서는 라임이었다. 수 개월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낸 같은 반 친구이기에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빈센트에게 급속 회복 키트 하나를 휙 던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크 몇 마리에 골골대기는."
동굴의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무사해서 다행이다란 미소가 입가에 걸린 걸 그는 알고 있었을까.
빈센트의 눈 앞에서 갈라지는 오크를 보고, 빈센트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오크가 넘어지며, 오크가 가리고 있던 사람이 드러났다. 빈센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라임이었다. 특별반 인원들이 살상당하는 참화 속에서도, 라임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발전을 이뤘지. 그리고 어쩌다보니 시간과 목적이 맞아서, 토벌이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뭉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빈센트가 너무 날뛰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일까.
"감사합니다."
빈센트는 힐팩을 써서 망가진 몸을 수리한 다음, 기어가서 바닥에 쏟은 망념 중화제 따위를 마셨다. 정말로 쓰고 끔찍한 맛이었지만, 무언가 가슴 속이 꽉 막힌 것 같던 답답한 느낌이 사라졌다. 겨우 일어난 빈센트는, 라이터에 불을 붙이듯 손가락에 불꽃을 튕겨보고, 자신이 어느정도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앞에 오크가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못해도 열 명은 지옥으로 보낼 수있고, 빈센트가 죽음까지 염두에 둔다면 30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조용히 일어난 빈센트는, 라임에게 말한다.
"망념 중화제 남은 거 없으십니까? 이 동굴에 불을 밀어넣어서, 통째로 소각시키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화력이 부족해도, 산소가 빨려들어가면서 산소가 부족해져 전부 죽을 겁니다." //3
"... 자신있어? 널 못믿는 건 아닌데, 이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밖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정도로 호위 병력이 남아있는 걸 보면 안에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야. 한 번에 못 끝내면 우리가 죽어."
라임은, "잡졸은 나한테 맡기고 넌 만약을 대비해서 힘을 아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고 투덜거리며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털어내면서도 그의 제안을 묵살할 수 없어 인벤토리에서 망념 중화제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비싼 거니까 꼭 갚아라."
퉁명스런 목소리지만 살아서 나가자는 말이기도 했다. 이것이 마지막 중화제라는 것과 자신도 망념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고, 화살에 바람 속성을 부여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람은 불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하니, 망념을 크게 들이지 않더라도 큰 협력작용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빈센트는 역사적으로 불을 피워서 산소 부족과 공포심으로 농성병력들을 몰살한 사례를 말했다. 동굴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산소가 부족해지고, 그 때문에 일정 깊이 이상의 동굴은 바깥과 연결되는 9인공이건 자연이건) 환기구가 있거나, 활동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감정 기복도 최소화해서 산소 소모를 최대한 줄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력배치를 더 줄여서 대응해야 했다. 빈센트는 저 안에 뭐가 있건 상관하지 않았다.
"만약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잠자는 오크 대왕이래도 상관 없습니다. 결국 그도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요. 만약 산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 같은 것이라면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뭐, 그래도 어차피 오크들은 다 죽여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임무에는 오크 절멸도 끼었으니까요."
빈센트는 라임이 투덜대면서도 건네주는 망념 중화제를 받아서, 망념을 쪽 뺐다. 이제 남은 것은 의념을 최대한 사용해서 저 안에 들어있는 오크들에게 끔찍한 악몽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라임을 보고, 이곳에서 함께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고보니... 여기서 그 방법을 썼다가는 우리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동굴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지점까지 물러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빈센트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잠깐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오크는 꽤나 강인한 종족이었으니까. 하지만 빈센트는 그래도 상관 없고, 오히려 좋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의 논리는 그랬다.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이 불타는 유기체의 몸을 가지고 있고, 대기 조성이 비슷한 이상 그들의 몸도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더 큰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합니다. 오크들의 온 몸에 활동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려면 말이죠. 만약 라임 씨가 제기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오크들의 폐는 정말로 크고 강할 겁니다. 그것 때문에 가슴이 마치 흉갑을 입은 것처럼 불룩 튀어나왔을 정도로요. 하지만 오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불이 난 동굴 안에서 오래 견뎌봤자, 결국은 고통뿐입니다."
어차피 불에 타 죽는다, 하지만 불을 이용해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저질러본 빈센트는, '온 몸에 불이 붙는다'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온 몸에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일단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온 몸의 근육과 피부가 불타서 결국은 죽고 만다. 게다가 그 와중에 폐도 불탈 수 있었다. 그저 공기를 뜨겁게 가열한 것만으로 수많은 범죄자들을 몰살해본 빈센트가 잘 알고 있었다.
"20분을 넘게 참는다고요? 참아보라고 하시죠. 에어프라이어의 원리를 아십니까? 뜨거운 열풍을 쏴서 음식을 익히는 도구죠. 폭발 화염 때문에 뜨거워진 공기가 뜨거운 열풍이 되는 거고, 오크들의 폐는 에어프라이어에 절반 정도 익혀진 고기가 될 겁니다. 아 도착했군요. 이제 준비하겠습니다."
빈센트는 동굴의 어느 지점에 도착해서, 장갑을 고쳐 썼다. 그리고, 빈센트는, 평소에 엷은 미소만 짓던 그답지 않게, 대놓고 웃으면서, 살벌한 말을 아무랗지도 않게 꺼냈다.
"만약 제가 숨을 20분이나 참는 오크라면, 글쎄요... 딱딱하게 구워진 제 폐를 붙잡고, 고통 속에서 울면서, 아무리 길어봤자 90초면 사망하는 인간을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498 불이 난 동굴 안에서 오래 버텨봤자, 남는 건 결국 고통뿐이다. 맞는 말이다. 존경스러운 소방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도 그 무거운 방화복과 산소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마저도 거센 불길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말이다. 외피가 불에 타지 않거나 오랫동안 숨을 쉬지 않고도 활동이 가능한 몬스터는 얼마든지 있으나, 적어도 껍데기는 살거죽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술 수준은 인간의 고댓적에 머물러 있는 오크들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야길 맛있어 보이게 말하지 마... 너, 너무 흥분했어."
절반 정도 익혀진 고기라느니 하는 소릴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빈센트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고, 정말 즐거운 듯해 보이는 환한 미소는 이질적이었다. 중화제를 너무 마셔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여태, 제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물을 죽여왔지, 그들이 죽어가면서 느낄 고통까지 공감하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