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쯤 올까?”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릴리벳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무심코 뱉은 말인 줄 알았는데, 소파에 매달린 벤자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태 굳게 다물려 있던 릴리벳의 입에서는 딱 한 마디 나왔다. “벤, 매달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소파에 누워있던 앤소니와 옆에 앉으려는 벤자민이 투닥대는 사이, 릴리벳은 무릎 위에 올려둔 책과 문을 번갈아봤다. 누가 봐도 기다리는 게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몇 분이 지나도 책장은 넘어가지 않고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톡, 톡.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커튼이 팔락이는 소리, 투닥임이 잦아든 동생들의 소곤대는 소리, 그리고······, 인기척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벤자민이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태세였다. 벤자민을 유심히 지켜보며 고개를 한 번 저은 릴리벳은(똑),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올려두고(똑), 가볍게 치맛자락을 털었다(똑).
“잠깐만!”
서두르는 걸음—사실은 가벼운 뜀박질—으로 문 앞에 선 릴리벳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눈 앞의 화사한 꽃다발에 잠깐 동그래진 눈은 곧 조금 더 환한 웃음으로 돌아왔다. 와아···, 답지않게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작은 감탄사는 덤.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아든 릴리벳이 고개를 낮춰 향기를 맡았다.
“고마워. 엄청 예쁘다.”
“책상 앞에 둬야겠어. 찾아보면 화병 하나쯤은 더 있을 테니까.” 루힐이 묻지도 않은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던 릴리벳은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소파 앞에 나란히 선 벤자민과 앤소니가 릴리벳과 루힐을 번갈아 쳐다본다.
“저 둘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면 도망가고 싶어질걸.”
장난스럽게 웃은 릴리벳이 눈짓하자 두 사람이 루힐에게 다가온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더니, 막상 가까이 오니 쭈뼛대며 손만 흔들고 마는 것에 릴리벳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릴리벳의 웃음 한 번에 긴장을 머금고 있던 모든 것들은 이완했다. 떨고 있던 꽃잎들도 자신감을 되찾고 색을 뽐내는 모습. 어색하게 흔들리는 두 아이의 손까지. 루힐은 이 모든 걸 시각적으로 경험한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릴리벳과 비슷한 것들로, 신이 소중하게 빚어냈을 아이들. 조금 수그려 가까이하니 따뜻한 내음이 느껴졌다.
“지금 남은 건 젤리뿐이네…”
루힐이 이런저런 과일 맛이 나는 젤리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릴리벳을 쳐다보며 (몇 년째 같은, 루힐 고유의 투명하고 여린) 웃음을 낸다.
“언제나 봐도 너와 닮아 귀여운 아이들이야.”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지척에 있으면 루힐은 종종 껍데기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는데, 허니포드 남매는 그 느낌이 컸다. 적당히 따뜻한 태양을 만져보는 기분이라 할까. 어떤 이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긍정적인 사람 곁에 있으면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의 전이, 동감 같은 것에 그칠지 몰라도 루힐에게는 순간순간이 귀했다. 냉한 체질이니까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을 점령하고 있는 냉한 기운은 언제쯤 뿌리 뽑을 수 있는 건지. 차도 없이 얼음장 같은 손으로 벤자민과 앤소니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자신의 시야에 걸쳐 있는 머리에도 시선이야 가기는 간다.
루힐이 건네는 젤리를 받은 둘에게 릴리벳이 눈짓했다. 높낮이도, 속도도 다른 목소리들이 뱉는 감사인사에 릴리벳은 조금 웃고 말았다. 불협화음 같은 소리였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저 둘이랑 내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루힐을 보며 묻는다. 릴리벳이 놀란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 앤소니와 벤자민이 저와 닮았다고 말한—비슷한 건 갈색인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뿐이다. 그마저도 제 머리카락이 나무껍질 같은 색이라면 저 둘은 그보다는 밝은, 마른 풀에 가까운 색인데!— 루힐. 둘, 귀엽다는 표현. 릴리벳은 짧게 고민한다. 귀엽다는 말은 조금 더 작고 여리고 곱고 보드라운 것들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던가. 예를 들면······ 처음 만났던 날의 루힐? 비슷한 눈높이나 영 단단해보이지 않는—내면이 아니라 외면에 대한 말이다. 은빛 머리카락이나 새하얀 피부 같은 것은 종종 달빛에 닿으면 흩어질 것처럼 보이곤 했다.— 모습은 처음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첫날의 루힐은 유독 귀여운 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 앤소니와 벤자민이 젤리를 입에 넣는 것을 스쳐지나간 릴리벳의 시선이 루힐의 얼굴에 닿았다. 지금도 귀여운지는 몰라도 여전히 작고 여리고 곱고 보드라울 것 같다.
“그냥··· 책 보고 있었어. 아, 차 마실래?”
의자에 엎어놓은 책에 시선을 던진 릴리벳이 질문과 동시에 부엌과 이어진 대단히 짧은 복도를 향해 걷는다. 아주아주 짧은 복도였기 때문에, 네 걸음 정도 걸었을 뿐인데 이미 부엌이다.
“쿠키도 있어. 네가 온다고 했더니 엄마가 잔뜩 구워놓고 가셨거든.”
찬장문을 연 릴리벳이 까치발을 들어 찻잎이 담긴 통을 몇 개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는 것을 조심조심 꺼내 내려놓는다. 홍차와 페퍼민트. 두 가지를 앞에 놓은 릴리벳이 고심한다.
톡톡 튀는 과일 향이 흐릿하게 퍼지고… 얼굴로 닿아오는 시선에 고개에 미동을 넣는다. 잠이 안 오거나 무언가 그립거나 심심할 때 해보는 공상 중, 이 삼남매와 자신이 비슷하게 생겼으면 어떨까— 라는 내용이 있다. 삼 남매. 사 남매. 우애가 좋아 보이는 가족을 보면 그 사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히 루힐도 한다.
엎드려있는 책의 제목을 살피려다 부엌으로 가는 그녀를 따른다. 네 걸음.
“쿠키? 맛있겠다.”
잔뜩 만들어져 있을 쿠키 산을 생각하니 감사함이 퍼진다. 부엌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노릇노릇한 향… 체격과 어울리게 짧은 입이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쿠키 100개를 삼키고도 남았다.
“홍차…면 좋을 것 같아.”
뭔들 어떨까 릴리벳이 직접 우려내주는 것이라면 구정물이라도 향 정도는 맡아볼 루힐. 몸을 돌리며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목소리를 낸다. “너네도 와서 먹자.”
릴리벳이 테이블 위, 소복하게 쌓인 것을 덮고 있는 천을 걷어냈다. 당연히 접시 위에 담긴 쿠키였다. 맛은 비슷비슷하지만 모양만큼은 제각각이었다. 별, 하트, 나무, 진저브레드맨, 그리고······ 양. 릴리벳의 기억에 양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누가 주고 갔는지도 모른다. 이 동네는 이상하리만치 양을 좋아하니까. 인형부터 열쇠고리, 엽서, 책갈피, 동화책 등등 양처럼 생기거나 양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이곳에서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쿠키가 양 모양이든 염소 모양이든—릴리벳에게는 지금 루힐에게 맛있는 차를 대접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릴리벳이 차에 집중하는 사이, 루힐의 목소리를 들은 두 아이가 신이 나서 달려왔다. 어쩜 그리 발소리가 맞지 않는지. 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발소리였다. “집 안에서는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뒤돌아 본 릴리벳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얘기하곤 다시 제 일에 집중했다. 릴리벳은 홍차가 담긴 찻잔 두 개와 우유를 따른 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미 쿠키 하나씩을 해치운 듯한 앤소니와 벤자민을 본 릴리벳이 작은 한숨을 쉬곤 루힐을 바라본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지만, 표정엔 엷은 애정이 묻어났다.
“차가 떫지 않아야 할 텐데.”
짧게 말한 릴리벳이 먼저 입술을 적셨다. 맛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못 마실 만큼은 아니었으나 향기롭지도 않았으므로.
······무언가가 물씬 몰려온다. 쿠키 냄새인가. 이렇게 강력하고 어지럽기까지 한 기묘한 냄새의 원인을 단순하게 눈앞의 쿠키로 단정 짓는 게 가능하다면······ 집 안에서는······ 뛰어다니······고 했지! 앳되고 단호했던 목소리가 머리통 안에서 이리저리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제 성격을 잃는다. 얼마 전부터 새롭게 얼굴을 비추게 된 과외 선생의 말이 뜬금없이 지나간다. 곧 있으면 축제 기간이잖아요! 지금 이 공간 안에 있는 시간과 소리, 모든 것이 사라진 까마득한 상태에서 그가 귓전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선명하다. 선생은 지금 이곳에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은 착각, 환상, 허깨비 같은 것일 테니 정신과 사고가 매몰될 필요는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루힐은 눈부신 초록의 동산 위 양을 마주하고 있다. 실재가 아니다. 부엌에서 릴리벳,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양만 집어 들고서 눈도 깜빡이지 않던 루힐이 가장 먼저 끌어낸 말. 「데 이 트 신 청」이라는, 그 또래 특유의 로맨스가 깊게 우러나오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핏발이 선 눈과 떨리는 손가락이 부조화를 이룬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빛깔로 릴리벳을 올려본다. 상황도 상황이 아니고 릴리벳도 잘못한 게 없는데 꼭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거동이다. 이런 모습으로 여자아이에게 「그런 권유」를 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다.
“······아.”
알에서 깨어난 싱거운 음성. 루힐은 다향이 좋다고 표현하려 했으나 유독 진하게 느껴지는 다향에 의문을 느껴 시선을 굴려보니 테이블 위에서 나뒹구는 찻잔과 자유를 만끽 중인 홍차가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손에서 미끄러진 듯했다. 정말 이상하다. 번쩍하고 빛처럼 지나간다는 설명밖에 되지 않는, 지금 같은 현상들이 최근 들어 빈번해지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의 릴리벳과 앤소니, 벤자민을 볼 용기가 차츰 스며들어 없어지고 있다.
릴리벳은 본능적으로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아챈다. 원래 이런 식의 변화는 잘 알아차리는 편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꼼지락대다 사고를 치는 벤자민이나 앤소니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지 말라고 얘기하던 일들 때문이었나? 아픈 아이를 보며 느끼는 침울한 감정을 애써 감추는 얼굴, 끼니를 굶거나 입을 옷이 부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가정의 형편 따위를 스스로 알아채온 날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과거의 어떤 사소하고 커다란 일들이 릴리벳을 키워냈든, 지금 중요한 건 루힐이 어딘가 ‘이상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같은데 도무지 자신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릴리벳은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제 뒤에는 익숙한 부엌 풍경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젠 제 몫의 쿠키에 정신이 팔려 릴리벳과 루힐을 살피지 못했던 두 아이마저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기묘한 정적이었다. 조율하지 않은 현악기 소리 같은 정적. 적막. 침묵.
“······.”
릴리벳은 루힐의 물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보통의 여자아이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얘기일 테지만, 루힐이 ‘이런’ 표정과 말투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조금 멋쩍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루힐은 무서워하고 있나? 그렇다면 무엇을? 릴리벳이 미간을 좁혔다. 루힐은 여전히 이상했다. 꼭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찻잔이 테이블 위를 뒹굴기 전까지는, 루힐은 정말 이상했다. 릴리벳이 자리에 일어나 쏟아진 것을 타월로 훔쳐내며 말했다.
“괜찮아, 루힐. 괜찮아.”
어쩐지 이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같이 가자. 그러니까 그··· 축제 때말이야.”
질문에 대한 답은 가장 늦게 나왔다. 릴리벳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예감했다. 그러나 그 일은 릴리벳의 내면, 그중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서 작게 일어났기 때문에 릴리벳 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추측은 들어맞고야 만다. 무겁게 짓눌러오는 공간에 루힐의 어깨는 갓 태어난 새처럼 떨렸다. 당황하고 있겠지, 당황하고 있을 거야. 눈썹이 두어 번 떨리다가 굳혀졌을 테고, 입술은 미동도 없이 고요하겠지. 아이들은 눈물을 보일 수도 있을 거야. 루힐은 셋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 그렇지만 쉬이 확인할 수 없다. 사람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양의 머리가 원래부터 그러하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의 기묘한 눈이 루힐을 가두려는 것처럼 쳐다본다. 여린 손끝이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감각이 들러붙는다. 시간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적막을 깨는 릴리벳의 목소리가 초침이 되어 날아온다. 이 순간부터 루힐의 시야에 있었던 기괴한 것들은 증발하고 없어진다.
데이트 신청에 있어 금과도 같은 대답을 들었건만 소년의 눈에서 바스러진 쿠키 가루처럼 떨어진 것은 눈물이었다.
"...........응, 고마워."
타월에 스며드는 분홍빛을 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것이 머리 안에서 출렁이는 기분. 말도 안 되는 부담감에 루힐은 아무런 말이라도 릴리벳에게 하지 않고서는 몸을 유지할 수 없었다.
릴리벳, 요전에, 학교에서는 고마웠어. 너가 없었다면 나 혼자서 반나절 동안 담임 선생님을 찾느라 헤맸을 거야. 뭐랄까, 릴리벳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항상 노련한 모험가처럼 느껴져. 큰 어려움 없이 뭐든 해내는 것 같고, 그래. 나와 똑같은 시간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만일 우리가 똑같은 벽에서 자랐다고 가정해보면, 난 사람의 발치에서 그늘지게 생장하는 느낌이고, 넌 벽을 타고 자라 세상을 훤히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동경해. 태양과 항상 가깝게 지내는 듯한 널 보고, 난생처음으로 무언가를 소망하게 되었어. 항상 너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아. 도움도 많이 받고… 고맙다는 말만 전하려다가 부끄럽게도 글이 길어졌네. 나중에 봐.
만우절~🤩🤩 어김없이 온 봄 탓에 지나다니다가 벚꽃을 많이 보게 되는데, 기후 위기나 환경 문제... 그런 걸 최근 들어 많이 봐서 그런지 활짝 핀 꽃을 보고있는데도 생명력이 안 느껴지더라구 ㅠㅠ,,, 꽃구경하는장소들 보면서도 맘이 참 싱숭생숭하네... 사춘기인갑다 ㅋㅋ😊 위에 레스는 예전에 루힐이 썼을 법한 쪽지 상상하면서 올려봣어~ 릴리벳주의 4월이 평온하길!!🍀🍀🍀🍀🌼🌼🌼🌼
가끔 너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할 때가 있어. 반대로 너는 과소평가하고말이야. 나는 너보다 학교에 자주 가고, 또 종종 더 오래 있곤 하잖아. 내가 너보다 학교의 무언가를 빨리, 쉽게 찾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냐. 만약 너와 내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네가 헤매는 날 도와주었을 거라 생각해.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어. 루힐, 언덕의 나무 알지? 최근에 마이클이 거기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졌잖아. 그 나무도 처음부터 그렇게 크진 않았을 거야. 모든 건 다 씨앗부터 시작하는걸. 그 나무도 여린 새싹이었던 시기가 있었을 거야. 물론 난 그 아래의 잔디나 들풀들도 좋아해. 아마 그 애들 덕분에 마이클이 팔만 부러지는 데 그쳤을걸. 아무튼, 네가 어떤 건지는 아무도 몰라. 벌써부터 네가 무언지 규정할 필욘 없어. 그렇다고 남들이 널 멋대로 정하게 두지도 마. 너는 조금 더 당당하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
사랑을 보내며, 네 친구 릴리벳이.
추신. 발치에서 피는 꽃이라 하니 민들레가 떠오르네. 민들레는 귀엽고 홀씨는 그 어디보다 멀리갈 수 있어. 그냥,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꽃이 피니까 보기에는 좋은데 계절이나 순서 상관없이 섞여피는 꽃이나 벌들이 없는 거 보면 저도 좀 걱정되더라고요 🥲🥲 빨리 펴서 그런가 꽃도 평소보다 훨씬 빨리 떨어지구.. 3월에는 덥다가 다시 기온 떨어진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원래 알던 날씨랑 달라서 심란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 4월도 어느새 중순을 향해가고 있는데...~ 잘 지내고 계신가요? 좋은 일이 많은! 그리고 건강한! 4월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사람들은 당황하면 보통 피하거나 울거나 화를 냈다. 릴리벳도 그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릴리벳은 그중 어느 것도 고르지 않고 루힐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기로 했다. 사람들은 당황하면 보통 피하거나 울거나 화를 낸다. 루힐도 당황한 것이다. 릴리벳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이유로.
“···괜찮아, 루힐. 걱정하지 마.”
이런 위로가 적당할까? 릴리벳은 방금 루힐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마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루힐이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벳은 루힐이 더 불안하지 않았으면 했다. 동생이 둘이나 있다고 해도, 결국 릴리벳도 아직 아이였다. 알고 있는 남을 안심시키는 방법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괜찮다는 말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후에 이 말을 한 걸 후회하게 될까? 그러나 지금의 릴리벳이 할 수 있는 건 보장되지 않은 미래의 안전을 약속하고, 루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뿐이었다. 허니포드의 아이들이 루힐을 둘러싼 채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비난도 불만도 어리지 않은 호박색 눈으로.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면 벤자민은 조심스럽게 루힐을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품은 작고 따뜻했을 것이다. 눈송이 하나를 녹이기엔 충분할 만큼.
허니포드 사람들의 향유 같은 품에 녹고야 만다. 무거웠던 한 겹이 벗겨진 루힐은 벤자민의 조심스러움에 끝도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단히 막힐 대로 막힌 수챗구멍. 덜미의 뻐근함을 이겨내고 릴리벳을 쳐다보니 전등에서 나온 불빛인지 뭔지가 시끄럽게 번쩍인다. 눈 주위의 근육을 이완시키고, 다시 한번 그녀를 조명하니 그제서야 멀쩡히 돌아온 시야. 영광스럽게도, 릴리벳은 루힐에게 가장 필요한 말만 골라서 무한대로 주었다. 지금까지, 항시 그래왔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무 부드러워서 찢어질 것 같은 말. 하지만 릴리벳이 하는 그런 말들은 강철이 되어 루힐의 속에서 단단해졌다. 상황이 다 끝나고 나서야 조여졌던 숨줄이 느슨해진다. 바깥으로 보이는 창밖 날씨가 눈에 들어온다. 폭풍 속에서, 깨짓 찻잔 속에서 힘겹게 약속한 축제의 날짜는 아마도 사흘 후. 릴리벳은 정말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약속에 응해줄까? 어떠한 이유로 약속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는다면 오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며 기다릴 것이다. 수를 다 세어도 오지 않는다면 흘러가는 해의 발자취를 좇으며 기다릴 것이다. 어두워지도록 오지 않는다면 눈을 감고 기다릴 것이다. 끝내 오지 않는다면 약속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하고, 평범하게 돌아가리라.
벌써 6월이라니...🫢 즐거운 6월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ㅎ 좋아요 딱 축제 분위기네요 ㅋㅋㅋㅋㅋ 근데 이제 양을 곁들인 🐏.. 헉 흥미진진한데요 좋습니다... 선레는 릴리벳이 루힐 찾아가는 상황으로 제가 써올까요? 왕바쁜 날들이 한 차례 휩쓸고 이젠 지나가서.. 이번 주 안쪽으로 써보려고 합니당 🫡🫡
며칠 전부터 마을 전체의 공기가 다르다고 느껴졌다. 거리 곳곳은 꽃으로 장식되어있었고, 종종 못 보던 사람들이 마을을 오가면 없던 설치물—보통은 양이었다—이 설치되어있기도 했다. 잔뜩 들떠 축제 당일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여자애들의 속닥거림을 들으며, 릴리벳은 문득 홍차를 쏟았던 루힐을 떠올렸다. 무엇을 입을 건지 묻는 말엔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글쎄, 하며 웃고 말았다. 정말로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즐거운 소리를 내며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역시 어린애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릴리벳이었지만, 그 역시 어렸기에 주변의 풍경에 금방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그런 순간에는 이전에 하던 생각은 잊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것들에 매료된 채 잠시 걸음을 멈춰서게 됐다.
축제 당일, 릴리벳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었다.
최근 몇 년 간의 축제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축제가 될 거라고 했던 게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길가에는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줄 지어있고 옆에서는 커다란 비눗방울을 부는 사람부터 삐에로 분장을 한 사람, 공연의 포스터를 뿌리는 사람······ 분수를 향해 걸어가던 릴리벳은 바닥에 떨어진 포스터를 줍는다. 어김없이 양이 있다. 별다른 글씨도 없는 포스터를, 릴리벳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걸 떠올린 사람처럼 걸음을 서두른다. 보폭을 넓힌다. 더욱 빨리 걷는다. 결국에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오면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에 마침내 웃음이 어린다. 크게 손을 흔든다.
시간이 흘러 열일곱이 되었으니 몇 년 전에 넉넉하게 입었던 옷은 몸과 더욱 맞닿았다. 깨끗한 순백의 프릴이 가슴께에서 흔들렸다. 살을 간질이는 천이 루힐의 심장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루힐은 릴리벳이 나오지 않고, 약속했던 시간은 멀어져만 가며, 종장엔 분수의 물이 흘러넘쳐 자신을 집어삼키는 상상을 했다. "나오지 않는다면······." 온몸이 경직되고 혈액의 순환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 시야에 릴리벳의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머리칼, 눈, 손짓, 웃음. 매력을 덮지도, 깎지도 않는 매력적인 베이지색 원피스까지. 누군가가 분 비눗방울이 열중한 루힐의 눈앞을 동그랗게 지나간다. 오로라가 서려 있는 투명한 막을 통해 루힐은 잠시 환상을 엿보았다.
“릴리벳!”
부정적인 생각들은 이미 힘차게 자라난 새순에 꿰뚫리고 없었다. 루힐의 온몸은 이제 원활하고 말랑말랑하게 잘 움직였다. 혈액 또한 막힘없이 쾌속으로 흘렀다. 그 탓에 루힐의 뺨이 발그랗게 되었다.
“난 괜찮아 릴리벳. 나와줘서······ 고마워.” 상대에게 마음을 온전히 전한 루힐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너만 괜찮다면 가볍게 먹으면서, 좀 걷고 싶은데······.” 따뜻한 웃음은 여전히 그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에 따라 내려간 루힐의 시선은 포스터에 닿았다. 어김없이 양이 있다. 어김없이 양이 있다.
“······너의 선호에 따르고 싶어.”
루힐이 3시 방향의 구운 과일가게를 가리켰다. 다음으로는 6시 방향의 와플 가게. 마지막으로는 11시 방향의 꼬치 구이 가게.
“아까 보니까, 거리에서 마술도 하고, 아. 삐에로도 봤어. 꽃으로 엄청 잘 꾸며놓은 곳도 있고. 공을 바구니에 던져서 넣으면 상품을 주는 곳도 있었어. 상품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목소리를 가지고 길게 말하는 모습이 이례적이었다. 릴리벳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이곳저곳을 보기 바쁜 루힐의 눈. 무의식적으로 포스터는 시야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포스터에는 어김없이 양이 있었다.
내용에는 안 들어갓지만 루힐이 예전에 입엇던 셔츠를 입은 이유는... 릴리벳이랑 만날 때 머 입고가지 고민하면서... 시종들이 대주는 옷 다 고민하면서 시간 보내다가... 더 하면 늦어질 것 같아서 제일 무난하고 깔끔한 옷 입어서 그렇게 됏어 ^.^😋😋 예전에는 펑퍼짐하게 입엇는데 지금은 딱 핏하게 입은 고런 느낌이야~ 루힐 생각에는 너무 아무거나 입고왓나 싶을 수도 있겟지만... 넝마랑은 한참 거리가 먼 고급 셔츠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