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오늘도 푸석푸석한 머리로 가벼운 하품을 할 뿐이었다. 평온한 방랑 생활도 어느새 시간이 좀 됬나하고 여길 정도로 평화로운 인생 아니 하프 엘프니 하프엘생이라 해야할까. 소녀는 등에 멘 푸른 류트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이불 겸으로 쓰는 로브를 주섬주섬 정리해 다시 입었다. 벌레? 그런 것이 있어도 독충이 아닌 이상 그녀는 신경쓰지 않으리라. 그녀가 살아온 삶은 벌레? 히익?!같은 것을 할 정도로 무르지 않았었으니까.
"다음은 어디로 갈까.."
그리 소녀는 중얼거리며 로브에 묻은 풀떼기를 손으로 털어낸다. 검은 빛의 로브와 상반되는 하얀 빛의 피부는 그녀의 종족인 하프 엘프의 우수성이라고 스스로 약간의 자뻑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남에게 말하면 귀찮아질테니 이야기하지 않을테지만. 짐을 정리하던 도중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뭔가 엄청 귀찮은 것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
"...자리에서 벗어날까.. 신님에게 일어났다고만 이야기하고.."
그러며 손을 번쩍 들며(이것은 그녀가 아침 인사할 때만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 습관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헤이 신님! 일어났어요!"
그리 말하고는 답을 딱히 기다리진 않는다. 그녀가 종교에 소속되있긴 하지만 독실한 신자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신님의 목소리가 들리니 해당 종교에 드는게 좋겠지-라는 별 생각없이 정한 종교이기도 했고. 오늘따라 쎄하네-하고 그녀는 생각하며 자리를 뜰려는 참,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한 마리의 야생 고양이와 같은 강맹한 기운을 내뿜으며 사라는 당당하지만 잽싸게 몸을 놀려 틈 안을 비집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아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인상의 검은머리 청년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았다. 요새 들어 에셀과 용병단장의 감시가 점점 더 심해지는 틈에 어딘가 불법적이라 불릴만한 속이 캥길 법한 행위를 할 수 없었던 사라는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거의 상대가 허락해준 것과 다를 것 없는 행위에 작은 고양감을 느꼈다.
'나는 얼마든지 내가 원할 때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어.' 치기 어린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습관적으로 단검자루를 매만지고 콧노래를 불렀다. "네에 팬이에요. 누구에게 들었는 가는 직업상 기밀이랍니다." 전혀 기밀을 말하는 사람 같지 않는 가벼운 태도로 히히 웃으며 어린아이다운 즐거움에 취한 미소를 띠우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막상 자리에 앉으니 무언가가 굉장히 민망했던지 사라는 조금은 고심하는 것 같은 얼굴로 건너건너 들은거에 자신이 끈질기게 주소를 알법한 사람들에게 엉겨 붙어 사실을 토해 낼때까지 성가시게 굴었다는 사실은 저어기 어딘가로 밀어넣기로 결심했다. 유하고 흐물흐물한 태도로 갑자기 집에 쳐들어 온 이름만 팬일뿐 실질상 불청객이나 다름없을 어린애에게 침착하게 차를 우려내는 호령의 모습에 먼 과거, 간식과 바꿔먹고 온 양심이 콕콕 찔렸다.
차를 내오기 전에 재빨리 자신이 든 책 전권을 탁자에 주르륵 올려놓고서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목표물()을 바라보았다. 신작의 첫 독자가 되기 위한 위대한 첫여정에 올라있는 것이니 모든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했다.
"지저분한건 괜찮아요. 전 깔끔한것 보다 이쪽을 훨씬 좋아하거든요. 어차피 쓰고 뒹굴다 보면 금방 어지러워지는걸 왜 계속 각을 맞춰가며 정리하라 닦달하는지. 정말이지 이상하지 않아요?" 에셀이 본다면 네가 존댓말을 쓸 줄도 아냐며 경약할 얌전한 말투로 헤헤 웃으며 대화의 시작을 열었다. 와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명백하게 나 신났어요 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이 눈을 굴리고선 작가님은 마법사에요? 라 물었다.
로맨스는 슬쩍 넘어가고 개그에 조금 머무르다 액션에 말썽쟁이다운 관심을 가지며 주위를 응시하던 녹안이 피규어에 도달하고 멈췄다. "신기해요. 저렇게 세세한 모형엔 도공들이 꽤 비싸게 값을 매길 텐데."
티르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해있었다. 특히, 육감이라고 불리는 것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때때로 오직 직감- 다시 말해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는 했다. 느낌이 좋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좋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 있는 쪽으로 다가서다 보면- 어김없이, 이렇게 흥미로운 대상이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법을 쓰진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마법과도 같은 일 이었다. 티르에게 '흥미로운 대상'이 된 눈 앞의 소녀에게는 마법 같은 일 이라기보단 재수 없는 일에 가까웠겠지만.
"아무래도 좋군. 거기 꼬마, 잠깐 멈춰라."
눈을 반쯤 떠서 소녀를 바라본다. 엘프인가? 저렇게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외모를 가진 종족은 그 숲속 촌놈들밖에 없지. 그녀가 어떤 종족인지, 어떤 외모인지는 그의 말처럼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나 이정도는 파악해두는게 좋았다.
지금부터 싸울 상대의 종족을 알아낸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당연했다.
"빨리 주먹부터 올리는게 좋을 거다. 이의는 받지 않을 거니까."
아직 준비태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 했을 연약한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녀의 키가 꽤 작은 탓에 주먹을 상당히 낮게 조준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팔은 소녀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뻗어진다.
잠깐 멈춰라라는 소리에 멈칫하고 그 곳을 돌아본다. 그 곳에 보이는 것은 흉폭하게 생긴 사내가 보인다. 눈빛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듯한 그 얼굴을 보며 솔직히 그녀는 쫄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멈칫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최대의 불행이기도 했겠지.
"...누구신ㅈ.."
그 다음 들려오는 말 빨리 주먹부터 올리는게 좋을거다-라는 이야기에 그녀는 내심 에엑이라는 말 외에는 할게 없었겠지. 아쉽게도 그녀는 전투 능력은 제로, 동네 불량배에게도 삥을 뜯길수있는 불우한 비전투계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날아오는 주먹은 그녀에게는 대처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꼬
꿈뻑 꿈뻑 뭔가 끔직한 악몽을 꾼 것 같다. 갑자기 만난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니. 그녀로서는 진짜 뜬금없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어제와는 천장이 다른 것 같은데'
자신은 분명 숲에서 잤을 것이다-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이불로서 쓰는 로브를 치우려하니 살짝 살에 걸리는 느낌이 난다. ..자신이 로브를 이불로 안 쓰고 잤던가? 그런 번뜩임이 그녀에게 스쳐지나간다. ...어딘가에서 음식 냄새가 맡아지는 것도 잇어서겠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은채로 생각에 빠진다. 상황 정리가 그녀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고민하듯 이마가 살짝 찌푸려진다. 이런 불합리한 폭력을 경험했던 것은 공장에서 일했을 때 이후로 오랜만...아니 생각하지 말자며 그녀는 생각을 떨쳐낸다. 어두운 과거는 떠올려도 고통스러울 뿐 아무 도움이 되지않으니까.
'도망쳐도 의미없겠지.'
분명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다. 동네 불량배도 이기지 못할 그녀로서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니 순수한 전투광같은걸까-하는 추론을 하고는 눈을 뜨고 부스스 소리를 내며 앉는다.
"...음식을 시켰어도 저 이런거 낼 돈은 지금 없는데요"
그 말을 하며 등 뒤에 있는 류트를 확인한다. 만약 부셔졌으면 대참사다. 그녀의 벌이 수단과 직업이 사라지는 것이니. 다행히도 그녀가 섬기는 신에게서 가호를 받아 튼튼한 그녀의 류트는 무사했다. 다만 말을 하던 과정에서 얻어맞은 부위에게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잘 보면 맞은 부위에 멍이 들고 부어올라있는 것도 보이지만 말이다.
여인이 동생에게 물었다. "손에 든 건 뭐니?. 인형?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야단치는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줘 단지 넌 평소에 인형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소녀는 살짝 얼굴을 찌뿌리며 언니에게 답했다. "내가 고른게 아니고 선물로 친구가 사준거야. 피규어라고 하는데..." 어차피 말해봤자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린 언니는 관심없겠지라는 뒷말이 함축된 침묵이 자매사이에 지나갔다.
.........
"네 맞아요! 물론 다른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저는 이 책이 제일 좋아요."
다른 작품들은 이미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씹고 뜯고 맛본 흔적이 잔뜩 남은 중고품을 슬쩍하여 본 것이 다지만 괜히 사족을 붙이며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도대체가 그 집 애들은 본인들이 책 먹는 여우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책 표지에 이빨 자국이 남을 수가 있지? 에셀과 그녀의 슈뢰딩거식 연애경력보다 더한 미스테리가 생길줄은 꿈에도 몰랐다. 멋모르는 유아가 했다고 주장하기엔 그 집 애들은 모두 12살이 넘었다.
아무렇게 차를 후후 불어 식히고 원샷을 하려다 실수로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켁켁거리는 몰골을 연출하면서 이제야 조금 창피한 것처럼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오 역시! 작가님은 동의하실 줄 알았어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는 상황을 수습하고서는 재빠르게 어차피 다 찾을 수 있고 본인이 편하다는데 왜 그리들 안달을 하는지 정말로! 라 덧붙였다.
"와아-" 세밀한 조형이 자세하게 보일정도로 가까워진 피규어에 상체를 일으켜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열심히 자신이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마법적인 작용을 파악하려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돈이 궁하지 않다는 호령의 말에 이번에는 그 시선을 피규어를 든 장본인에게 옮기며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 이런 실수. 잠시 동안 본심을 내비친 덕에 조금 많이,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쪽팔려진 사라는 시선을 부러워서 죽을 것 같음에서 평범하게 신기해함 정도로 조절했다.
하지만 곧바로 사라가 아무리 기민한 관찰력을 동원하여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법한 분자단위의 상호작용이 그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순간적으로 자제력이고 뭐고 놓은 소녀는 눈을 다시 동그랗게 뜨며 놀란 눈으로 없던것이 만들어진 자리를 헉!이라는 글자가 적혀진 듯한 표정을하며 바라보았다. 물론 정령과 친하긴 하였지만 조금더 공격적이고 유용한 방향의 어떤 매개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힘의 운용에 정신이 팔린 사라는 살짝 멍해진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새를 받았다.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신작에 관한 내용은 온데간데 없이 하얗게 표백된 머리로 떠오른 말을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읊었다.
..........
여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속을 내보이는 바보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여인이 아닌 사라였다.
이브가 눈을 뜨고선 자리에 앉자 티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소녀의 상태를 보면 나쁘지 않다. 자신이 때린 안면의 일부가 멍이 들긴 했지만... 저정도라면 곧 있으면 나을 거기도 하고, 어차피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치는 부위는 아니니까. 자신의 상태는 만전. 알코올이 좀 들어가긴 했어도 상관 없다. 알코올이야 투기를 사용해서 취기를 날리면 되니까.
이 자리에서 당장 시작할지 아니면 나가서 할지 고민하던 찰나, 이브의 말에 흠. 하는 소리를 낸다.
"어차피 네가 내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이건 내가 심심해서 멋대로 주문한 것이니."
이브 앞에는 약간의 샐러드가 놓여져 있었다. ...사실 말이 약간이지 몇 그릇이나 되는 종류의 샐러드가 있었던지라 그녀의 양으로는 꽤나 많았을 것이다. 다만 나머지 테이블의 공간을 꽉 채우고도 남는 고기 요리들과, 그것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티르의 양에 비하면 약간이라는 뜻이었다.
"그건 별개로 아까 싸움은 내가 너무 유리하게 시작했군. 몇 초 정도 주면 전력을 발휘할 수 있나? 몇 분도 괜찮다만, 빨리 네 전력과 싸워보고 싶어서 오래 기다리는 건 힘들거든."
티르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투쟁에 대한 열망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금빛 눈은 형형하게 빛나며 소녀에게 직접적으로 살기를, 투기를 내비치는 중이었다.
"그 음식을 다 먹으면 바로 싸우러 가지. 어떤가?"
그는 이의는 안 받겠다는 건지, 아니면 이미 속으로 그녀가 싸운다고 정해둔 것인지,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신난 듯 말했다.
예의같은 것은 그녀는 모른다. 그저 '신님'이 하도 뭐라뭐라 하니까 대충 익혔을 뿐. 해봐야 그녀가 아는 예의는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대들면 앞으로 삶이 비참해진다 뿐이니까. 샐러드를 아무 생각없이 먹는 도중 들려오는 이야기에는 콜록하고 사례 걸린듯 기침을 한다. 싸움? 그녀에게 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앞에서 누가 싸우면 일부러 그 곳을 비켜나갈 정도로.
"아니, 안 싸울건데요. 애초에 전력이고 뭐고 없고"
애초에 싸울 능력 같은게 있다면 자신은 '적어도' 옷은 다른 것을 입었으리라. 넝마가 된 옷을 입고 다니는 이유도 '그러면 시비가 안 걸려서'이다. 절대 갈아입기 귀찮아서가 아니다.
"애초에 저는 평범한 음유시인인데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지그시 쳐다본다. 만약 네가 날 공격하려고 한다면 맞아주고 즉사할 자신있다!라는 의미불명한 의기양양함과 함께. 그러면 자신의 목적인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지만 어쩔수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고 잔혹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