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팔은 진득하게 티르에게 들러붙어 전신전력을 먹어치울 기세로 흡수해댔다. 티르의 힘을 먹으면 먹을수록 흡수하는 힘 역시 강해져간다. 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이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그를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겠지. 고통의 마왕은 식성도 유별나다는 걸 깨닫는게 어쩌면 티르의 마지막 생각이 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겠지만.
"어..?"
한창 맛나게(?) 투기를 빨아들이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휙 하고 공중으로 들렸다. 아니 돌아간건가? 그녀의 날개는 분명 움직이지 않았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이 따라가지 못 한다. 뭐지,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당황을 느낀 눈이 이리저리 헤메는 사이 그녀의 팔이 티르에게서 떨어지고, 티르에게서 그녀의 팔이 해방된다. 들러붙은 듯 잡혀 있던 손이 풀려 마지막 손가락 끝이 떨어지는 것으로 그녀와 그는 서로에게서 해방되었다.
티르가 급히 거리를 벌린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 뿐인가. 공중을 한바퀴 도는 몸을 어찌 하지도 않았는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다. 털퍽. 체구에 비해 가벼운 소리가 나며 그녀의 몸이 바닥을 뒹굴고 긴 머리가 어지러이 흩어진다. 축 늘어진 날개가 서서히 줄어들어 이윽고 모습을 감춘다. 멀리 떨어진 티르에게 보이는 건 조금 전까지 광기를 떨치던 옛 마왕이 아닌, 그냥 쓰러진 사사람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지고 잠시 동안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떨어질 적에 일어난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아 이윽고 잠잠해질 쯤,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던 손이 움찔, 하는 것을 시작으로 느릿느릿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추슬러 겨우 앉은 자세를 취하더니 무어라 중얼거린다. 짧은 주문을 외자 마나의 빛이 그녀를 잠깐 감싸고 사라진다. 그런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저 멀리 떨어진 티르를 보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멍한 표정이 흰 얼굴에 떠올라 있었더란다.
"....하-암..."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도 티르를 쫓아가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새 멀쩡해진 옷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하품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티르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지친 티르에 비해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린다.
"맛있네, 너..."
참 속 편한 소릴 한다 싶더니 그 다음은 또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더 할거야...?"
마치 티르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 것처럼 그녀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더 싸우자고는 안 하겠지, 라는 생각이라도 하나 싶다가도, 역안이 풀려 한층 맹해진 눈을 보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 같기도 했다.
투기는 그 기술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바닥났다. 어느정도로 집어넣어야 마왕이 저항 못 할지 몰라서 투기를 있는대로 다 때려넣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는 피로함에 마른 기침을 한 번 하고는 시안을 노려본다. 그녀가 언제 달려들지 몰라 계속 경계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버렸다.
"...뭐냐, 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티르. 멀쩡한 모습인 것인 건 둘째 치고, 왜 저리 조용하지?
마치 방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듯한 이질감이, 시안에게서 강력하게 느껴졌다.
옛 마왕이라기보단, 아까 자신이 보던 시아나라고 중얼거리는 소녀와 같은 느낌이.
"속 편한 소리 하는구나. 더이상 싸우지 않는 거냐?"
맹해진 눈을 보고 있자니 아까 그 마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방금 그 힘과, 광기는 분명 마왕의 것이 맞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그냥 좀 맹한 소녀 같은데. 이래저래 따라가기 힘든 녀석이었다. 티르는 한숨을 쉬며 경계하던 자세를 풀었다.
"됐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싸워봤자 내가 질 게 뻔하니, 이 싸움은 내 패배라고 봐도 좋겠지."
너무 얕봤다... 아니, 그것 또한 변명인가. 패배는 패배였다. 자신은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 했다. 더 강해져야한다. 더, 지금보다 더더욱.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한 놈들과 더 싸워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궤를 달리하는 강함이 필요했다.
고개를 기울여 의아함을 표하는 티르를 따라하듯 그녀도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잠잠히 가라앉은 푸른 눈이 두어번 깜빡인다. 뭐냐는 물음은 듣지 못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도,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꾸가 돌아오자 그렇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이제 배고프지 않아... 그러니까 안 싸워."
마치 그에 대한 용건은 끝났으니 더 상대할 필요 없다는 듯이 가볍고도 깔끔한 대답이었을거다. 그 대답으로 인해 티르가 느낀 이질감이 짙어지면 짙어졌지 옅어지지는 않았을거고.
그가 전투 태세를 풀자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반대로 기울인다. 까딱 까딱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늘어진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를 내었다.
티르의 패배 선언에도 그녀가 뭔가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돌아서는 그의 행동을 눈으로만 따라갈 뿐이었다. 멀뚱히 그렇게 앉아 있는 그녀에게 질문이 들어왔다. 이름이 뭐냐는 물음이었다.
"...시아나."
몇번이고 말했는데 그걸 또 묻냐, 는 표정이 잠깐이나마 스쳐간 것 같다면 기분 탓이 아닐거다. 그녀는 깔끔하게 자기 이름만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한박자 머뭇거린 후, 기울어진 고개를 바로세우며 그를 향해 물음을 돌려주었다.
>>448 아니 시안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르쳐주는 상황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계속 혼잣말 보내는 시안이 처음 한두번은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한번만 더 쓸데없는 이야기 보낸다면 이 채널 끊어버리겠다." 하고 으름장 놓고... 근데도 계속 보내서 차마 끊을 수는 없고 골머리 앓고...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