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는 것. 그것은 티르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도망을 혐오했고 죽는 한이 있어도 투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그는 시안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도 두려워 하기보단 기뻐했다. 더 즐거운 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티르의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뭐..."
듣기 좋은 비명은 곧이어 광기 어린 웃음소리로 바뀌어간다. 갑자기 바뀐 소리에 당황했는지 잠시 주춤하며 뒷걸음질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다. 밀어넣고 있던 투기가 오히려 끌어당겨지면서, 그의 다리와 팔힘도 서서히 풀리고 있던 것이다.
티르의 문제는 바로 시안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오직 전승뿐이었다는 것.
시안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애초에 무관심했다. 그렇기에 고통을 흩뿌리고 다니는 마왕이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마나를 먹고, 흡수하는 체질이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결과는?
바로 지금과 같이 그녀의 수법에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져버렸다.
"젠장, 벗어나야..!"
뿌리치려고 했으나 목에 팔이 둘러지며 동시에 힘을 흡수당하는 것이 가속화된다. 티르는 뿌리치려는 듯 팔을 붙잡고 잡아떼내려는 듯 끌어당겼지만 변함은 없었고, 오히려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아닌 마나, 투기는 티르를 지탱하는 힘이었지만 그것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가지.
십무十武 - 회回
시안이 잡고있던 티르의 팔이 순간 회전한다. 인간은 꺾이지 않을 방향으로 팔이 꺾이며 그대로 한바퀴 돈다. 아니, 정확히는 티르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시안의 몸에 저절로 회전하는 성질의 투기를 불어넣어, 그녀의 몸을 공중에서 한바퀴 돌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투기를 곧이곧대로 흡수한 시안은 순간적으로 공중에서 한바퀴 빙글 돌아버렸고, 그게 마치 시안에게는 티르의 팔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시안이 회전하는 순간 마찰 때문에 붙잡는 힘에 틈이 생겼고, 그 틈을 타 티르는 붙잡힌 팔을 빼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단숨에 다가오기 힘들 정도로 거리를 벌렸다.
"이정도로 많이 먹으라고 주진 않았는데..."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광기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시안을 바라본다. 그 얼굴은 검붉은 피눈물과 자국들, 그리고 히죽 웃은 눈과 입으로 인해 도저히 정상인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투덜거림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투기. 그 많던 투기는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안이 자신의 투기를 흡수한 탓, 이겠지... 그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시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392 ‘어떡하지. 저 사람 입장에선 인간 한 마리 뚝딱 꿀꺽 잡아먹고 애피타이저로 감자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려나? 또 신고당하면 어쩌지? 아, 근데 향기 너무 좋다. 저 사람, 손에 과일도 들고있네. 과일 안 먹은 지 진짜 오래 됐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놀람으로 인해 굳어버린 모습 그대로 뻣뻣하게 당신을 바라보던 보헤미안은 타탁, 하고 타는 장작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하고 있는 요리를 주면 한 번은 봐주지 않을까? 사나워보이는 인상도 아니고, 무작정 해를 끼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만…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린다. 당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보이자,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킨다.
“아……요리가요? 후꾹.”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요리를 보고 하는 말일까. 그래도 대답하는 보헤미안의 얼굴에는 긴장이 조금 가신 듯 보였다. 무작정 비명을 지르거나, 공격을 해오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그래도 눈 앞의 사람은 바로 공격해올 것 같진 않으니까……그래도 딸꾹질은 멎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뜨고 코를 한 번 훌쩍인다. 침도 좀 닦고. 이어진 당신의 말은 요근래 들어본 말 중 가장 상냥한 말이었다. 1. 먼저 사과를 해준다. 2. 자신의 사정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3. 맛있는 냄새가 나준다고 했다! 거기까지 다다랐을 무렵, 허둥지둥 팔소매를 다시 당기고, 후드도 꾹 조여 신체 중 눈만 겨우 보이게 만든다. 조금 더 수상해진 구울은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거렸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뻗은 손을 살짝 붙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든다. 휴.
“저, 괜찮으시면 같이 드셔도 되는데. 후꾹. 재료를 조금 많이 샀거든요! 분명 이렇게 찾아오신 것도 아르모스 님의 축복일 거에요.”
경계심이 풀린 보헤미안은 당신의 칭찬에 기뻐진 듯, 조잘조잘 떠들며 배낭 안에 들어있는 길쭉한 유리병 안에 든 올리브 기름의 뚜껑을 뽁, 하고 뽑는다. 충분히 달아오른 팬에 능숙하게 두르고, 치즈로 돌돌 만 달달한 감자와 소세지를 굽기 시작한다. 그 어떤 밑작업도 없이, 썰고 굽기만 하면 되니 아주 간편한 요리니까 더 고생할 것도 없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치즈 베이컨 웨지 (달달)감자 완성! 몇 개를 집어 그릇에 옮겨담고, 양손으로 붙잡아 당신에게 내밀어보인다.
그녀의 팔은 진득하게 티르에게 들러붙어 전신전력을 먹어치울 기세로 흡수해댔다. 티르의 힘을 먹으면 먹을수록 흡수하는 힘 역시 강해져간다. 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이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그를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겠지. 고통의 마왕은 식성도 유별나다는 걸 깨닫는게 어쩌면 티르의 마지막 생각이 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겠지만.
"어..?"
한창 맛나게(?) 투기를 빨아들이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휙 하고 공중으로 들렸다. 아니 돌아간건가? 그녀의 날개는 분명 움직이지 않았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이 따라가지 못 한다. 뭐지,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당황을 느낀 눈이 이리저리 헤메는 사이 그녀의 팔이 티르에게서 떨어지고, 티르에게서 그녀의 팔이 해방된다. 들러붙은 듯 잡혀 있던 손이 풀려 마지막 손가락 끝이 떨어지는 것으로 그녀와 그는 서로에게서 해방되었다.
티르가 급히 거리를 벌린 것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 뿐인가. 공중을 한바퀴 도는 몸을 어찌 하지도 않았는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진다. 털퍽. 체구에 비해 가벼운 소리가 나며 그녀의 몸이 바닥을 뒹굴고 긴 머리가 어지러이 흩어진다. 축 늘어진 날개가 서서히 줄어들어 이윽고 모습을 감춘다. 멀리 떨어진 티르에게 보이는 건 조금 전까지 광기를 떨치던 옛 마왕이 아닌, 그냥 쓰러진 사사람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지고 잠시 동안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떨어질 적에 일어난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아 이윽고 잠잠해질 쯤,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던 손이 움찔, 하는 것을 시작으로 느릿느릿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상체를 일으키고 다리를 추슬러 겨우 앉은 자세를 취하더니 무어라 중얼거린다. 짧은 주문을 외자 마나의 빛이 그녀를 잠깐 감싸고 사라진다. 그런 다음에야 고개를 들고 저 멀리 떨어진 티르를 보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멍한 표정이 흰 얼굴에 떠올라 있었더란다.
"....하-암..."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도 티르를 쫓아가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새 멀쩡해진 옷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하품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티르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일까? 지친 티르에 비해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린다.
"맛있네, 너..."
참 속 편한 소릴 한다 싶더니 그 다음은 또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더 할거야...?"
마치 티르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 것처럼 그녀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더 싸우자고는 안 하겠지, 라는 생각이라도 하나 싶다가도, 역안이 풀려 한층 맹해진 눈을 보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 같기도 했다.
투기는 그 기술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바닥났다. 어느정도로 집어넣어야 마왕이 저항 못 할지 몰라서 투기를 있는대로 다 때려넣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는 피로함에 마른 기침을 한 번 하고는 시안을 노려본다. 그녀가 언제 달려들지 몰라 계속 경계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버렸다.
"...뭐냐, 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티르. 멀쩡한 모습인 것인 건 둘째 치고, 왜 저리 조용하지?
마치 방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듯한 이질감이, 시안에게서 강력하게 느껴졌다.
옛 마왕이라기보단, 아까 자신이 보던 시아나라고 중얼거리는 소녀와 같은 느낌이.
"속 편한 소리 하는구나. 더이상 싸우지 않는 거냐?"
맹해진 눈을 보고 있자니 아까 그 마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방금 그 힘과, 광기는 분명 마왕의 것이 맞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그냥 좀 맹한 소녀 같은데. 이래저래 따라가기 힘든 녀석이었다. 티르는 한숨을 쉬며 경계하던 자세를 풀었다.
"됐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싸워봤자 내가 질 게 뻔하니, 이 싸움은 내 패배라고 봐도 좋겠지."
너무 얕봤다... 아니, 그것 또한 변명인가. 패배는 패배였다. 자신은 아직 충분히 강해지지 못 했다. 더 강해져야한다. 더, 지금보다 더더욱.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한 놈들과 더 싸워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궤를 달리하는 강함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