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마왕이라... 들리는 소문으로는 천년 전 사라진 마왕과 똑같이 생긴 악마 소녀가 변방을 떠돈다고 하던데... 클클, 대개 그런 소문은 젊은 놈들의 허풍일 가능성이 높죠. -그게 사실일 가능성 말입니까? 뭐.. 없진 않겠습니다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보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클클클.
"그 할아범... 내 얼굴 보기 싫어서 구라친 건가?"
티르는 짜증난다는 말투로 혼자 투덜거렸다.
주변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 흔한 변방이다. 인간계나 마계가 으레 그렇듯 간간히 민가가 보이고, 농지나 황야가 있는... 별 다를 것 없는 흔한 변방. 그렇기에 티르에겐 이곳이 도무지 마왕이 있을 법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천년 전 홀연히 사라진 마왕 시안 더 페인.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던 마왕이라면 분명 용사에게 봉인당해서 인간계에다서 깨어나던가, 아니면 마왕성 같은 곳에 봉인이 되어있었겠지. 왜 이런 변방에 있단 말인가. 차라리 자기 부하가 자신이 보기 싫다고 구라를 쳤다고 생각하는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군."
투기장을 점거한 뒤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부하들이었다. 이 기회에 나를 잠시 쫓아내서 그 틈에 어찌어찌 투기장을 빼돌리거나 도망치는 계획을 세운다? 얄팍한 계획이긴 했지만 나름 이치에 맞는다. 그럴만한 충분한 동기도 있었고.
돌아가면 일단 그 부하랑 할아범부터 찾아내서 곤죽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과거 돌을 던지며 싸우던 인간들의 그림에 철검을 든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주변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는 듯한 기시감.
"찾았다."
그 기시감의 근원지로 눈을 돌리자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에 사라져버린 악명 높은 마왕, 시안 더 페인. 변방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외모. 그 외모 덕분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
"돌아가면 매가 아니라 상이라도 줘야겠는데."
티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 보이는 마왕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속도를 줄이거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시안이 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시안을 들이박을 작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세상에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던 존재가 하나 있었다. 단신으로 가는 곳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일으키며 끝내는 마왕의 이명을 얻기까지 한 존재였다. 더 페인, 고통의 마왕이라 불렸던 그 이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존재 자체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어디선가 죽었다더라는 헛소문조차 없이 그렇게 조용히 사라졌었다.
그 부재의 기간이 지난 천년간이었다.
단 한 사람만이 기억하는 날로부터 천년째 되는 날, 헬하운드 변방의 어느 동굴 깊숙히에서 그녀가 눈을 떴다. 잠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라난 마석들이 깨지며 주변에 미약한 파문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 그 탓이었나, 그곳과 가까이 살던 민가를 시작으로 동굴에 잠든 무언가가 깨어났다던가 하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같다. 그게 돌고 돌아 어느 투기장 주인에게 닿을 쯤, 그녀는 여즉 잠에서 덜 깬 채로 동굴 밖 근처를 서성거렸더란다.
"....흐아아암...."
배고파...
앞으로 닥쳐올 시련은 꿈, 아니 잠결에도 생각하지 못 한 채 그녀는 비실비실 걷고 있었다. 길고 긴 머리가 기어코 바닥에 닿아 끌리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디로 가야 뭘 먹을 수 있을까, 따위를 잘 구르지 않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려 하고 있었던 거다.
느릿느릿 머릿속을 굴려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 잤으니 근처에서 먹을 걸 구할 데가 있는지 먼저 찾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을 쯤, 그녀의 등 뒤로 두 쌍의 날개가 펄럭 하고 펼쳐진다. 그녀의 몸 정도는 가볍게 감싸고도 남을 거 같은 거대한 날개들은 준비를 갖추자마자 크게 펄럭여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린다. 공중, 그것도 제법 높게 띄워진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날아올랐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는 것도.
그때서야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인물, 티르를 눈치채고 아래를 보며 말했을 터다.
"너어... 누구...?"
아직, 아직도 잠이 다 깨지 않은 그녀의 눈에 그는 갈색인지 검정색인지 모를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라는 건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아는 사람도 없지만) 지금의 그녀는 적의나 분노보다 저게 누구지 하는 호기심이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묻고 무방비하게 그의 가까이로 내려갔다. 자세히 봐야지, 하고.
날개가 공기를 밀어내며 내는 소리가 크게 울리며 시안의 몸이 떠올랐다. 티르는 시안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급하게 몸을 멈춰세운다. 어디지? 순간적인 변화를 따라가지 못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의 모습은 없다. 위로 시선을 올리자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몸을 덮고도 남을 두 쌍의 거대한 날개. 틀림없는 악마였다.
"그걸 피하다니, 역시 마왕인가..? 헛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그의 머릿속에서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뀐다. 들었던 것과 똑같은 외모와, 악마를 상징하는 날개. 그리고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반응속도까지... 자신이 생각한 마왕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했던 것이다. 물론 공격을 피한 건 의도한 것이 아니었겠지만 티르는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납득해버렸다.
마왕을 만났다는 흥분에 혼자 즐거워하기도 잠시, 마왕 시안이 티르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가 건넨 말에 티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누구인지는... 주먹으로 확인해라, 마왕."
무방비한 상태로 티르에게 가까이 다가온 시안. 그녀가 가진 것은 그를 자세히 보고자 하는 작은 호기심 뿐. 하지만 그는 그런 호기심을 비웃듯 무방비한 시안에게도 자비없이 주먹을 날렸다.
자신을 공격한, 명백히 악의를 품고 다가온 상대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다가가는 그녀의 행동은 모르는 이가 본다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 결과를 봐라. 그녀가 호기심을 가진 그는 그녀를 대뜸 마왕이라 부르며 주먹을 날려오지 않는가.
"마왕..?"
단순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위해를 가하기 위해 뻗는 주먹에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렇게 떴다. 그러나 그 눈에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저 단순히, 정말 단순하게 놀랐다는 눈빛만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짧은 주문을 외웠다.
"쉴드-"
주문을 외운 건 그의 주먹이 그녀에게 뻗어지는 도중, 찰나에 가까운 잠깐 사이였다. 읊조리기 무섭게 티르의 주먹과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방벽이 생성된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날개에 의해 방벽만큼 뒤로 물러서졌다. 방벽은 주먹 한번으로 깨질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그냥 막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티르가 그대로 방벽을 치게 된다면, 그가 주먹에 가한 힘만큼의 충격이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 방벽 뒤에서 그녀는 놀람이 수그러든 눈에 다시 호기심을 띄우며 물었다.
"왜 나를 보고... 마왕, 이라고 하는거야...? 나는 시아나인데..."
정말로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푸른 눈은 여즉 잠기운이 깔려있을지언정 뭔가 숨기거나 감추는 빛은 전혀 없었을테니. 시아나는 시아나인데... 하고 다시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묻는다.
"나... 너한테 뭐, 잘못 했어..? 그래서, 괴롭히는 거야...?"
자신이 뭘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큰 날개를 한번씩 펄럭거리며 멀뚱히 티르를 보는 그녀는 전승과 소문으로만 전해졌을 고통의 마왕의 모습이라곤 한끗도 없고 오히려 그 전승 속 존재라는 걸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무구한 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티르의 주먹과 시아나의 쉴드가 맞닿으며 엄청난 소리가 났다. 두 물체가 서로를 상쇄함과 동시에 티르는 두번째 주먹을 날리려고 한다 하지만, 예상 외의 충격이 그를 덮쳤고 그 충격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리려던 것을 멈췄을까.
"흐응."
그는 말없이 감탄했다. 그 짧은 순간에 쉴드를, 아니 그걸 넘어서 충격 반사 기능이 달린 쉴드를 펼치다니. 웬만한 마법사는 이것의 흉내조차 내지 못 하겠지. 그는 순수하게 감탄하고는 그녀의 눈을 마주봤다. 뭐가 저리 호기심이 많은 걸까, 저 마왕은.
"...마왕이 아닌가?"
이자식들 그럼 역시 내게 헛소문을 갖다준 건가? 시안의 반응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티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중얼거림도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마왕이 아닌 건가..?
"하. 아무래도 좋다. 그런 건 이제 상관 없어."
그녀가 마왕이든 아니든 간에 눈 앞의 여성은 자신의 주먹을 받아쳤다.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무방비 상태에서. 쉴드 몇장은 그냥 파괴하는 그의 주먹을 눈 앞에서 맞받아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시안과 싸워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설령 그녀가 마왕이 아니라면 뭐 어떤가. 마왕이든 아니든 이 싸움은 즐거울 것이 분명했다.
"아니, 잘못한 건 없다. 그건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내 주먹을 막았다는 거다. 그러니 넌 나와 싸워야 해. 내 주먹을 쉽게 막는 강자를 그냥 보내줄 수는 없지."
티르에게 논리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하고싶기 때문에, 그것만이 이유였으며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다. 자신의 이유나 논리로 누군가를 납득시킬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상대가 설령 마왕이 아니라 순진무구하고 호기심 많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투쟁이었기에. 그것 이외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니 지금부턴 진심으로 임하는게 좋을 거다. 죽어도 나는 모르니까."
시안의 눈을 마주하던 금빛 눈이 순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의 안광이 번뜩거리며, 동시에 온 몸에서 스파크처럼 무언가가 튀기 시작했다. 스파크의 정체는 마나가 아닌, 티르 고유의 투기.
주먹이 날아간 것은 경고와 거의 동시. 다른 준비 자세도 필요 없이 주먹이 그의 허릿춤에서 쏘아져나갔다. 투기가 집중되어 금빛으로 빛나는 주먹은 위협적으로 쉴드를, 나아가 경로상의 시안에게 향했다.
-!!!1
아까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파공음. 동시에, 주먹이 쉴드를 찢고 시안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278 반칙!! 반칙!!! 티르는......젊잖아! 악마 나이로는 젊은 편이죠 그쵸!? 티르도 조심해야합니다 보헤가 맛집투어 시켜준다하고 맨처음 선빵 맞은 기억 떠올리며 매운집 데려갈지도 몰라요...(사실 안그럽니다) ㅇ하지만 왠지 티르도 매운걸 잘먹을 것 같은 예감......좋아할 것 같은 강한 예감...
>>280 끼야아악 2021년 처한 상황 중 가장 난처한 상황이 아닐지??? 하지만 무신...버텨라! 너가 선택한 무신이다 악으로 깡으로 아ㅜ 진짜.......시안이랑 티르 둘다 10~20대 때 환생한거 알고난 뒤 꼰대가 된 보헤를 보여주고싶네요 이누무자싯들 이누무자싯들~!~! 아저씨가 맛난 거 사줄게! (그렇지만 환생후에는 두 악마마족 사이의 뽀짝 31세를 곁들인)
>>281 귀여운 소년.......그 이야길 들으면 보헤는 복잡미묘한 미소를 지어보일 것 같아요 양심에 찔려서 대놓고 기뻐하진 못하고 응응...(ㅋㅋㅋ) 헐 좋다 그럼 매운 음식 전문을 찾아다녀야겠네!!! 최고의 스ㅡ파ㅡ이ㅡ스 향신료를 찾아서 떠나는 모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