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홱 돌려버린 당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랑은 갖고 있는 색이 옅어서 쉽사리 주변의 색으로 물들었다. 당신의 붉음이 언제 옮겨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능성은 분명 제로는 아니다. 이미 몇 번 당신으로 인해 랑의 뺨이 물든 적은 있다. 옅은 벚꽃색이 짙은 장미색이 되면, 그때는 오늘 미뤄버린 답을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고 랑은 생각했다. "너랑 똑같아."
랑은 당신이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워 아무것도 못 하고 쩔쩔매는 붉음도, 가슴 가득 설레는 기분에 수줍은 붉음도, 꼭 랑이 하는 것처럼 짓궂은 장난에 놀림당한 붉음도 당신은 싫지 않다 답해줄 것 같다.
"일곱시 반쯤- 이면 너무 늦어?"
시간을 묻는 당신의 말에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잠금 화면에 뜨는 시간은 여섯시 반 언저리. 한 시간이면 당신에게 촉박할까 그렇지 않을까 고민했다. 랑은 옷만 갈아입으면 된다지만, 당신은 씻기까지 해야된다니 부족할까 고민한다. 라커룸에서 옷 갈아입고 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넉넉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어떻게든 랑도 자신만큼 얼굴이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순전히 자신이 휘말린 낯설고 이상한 감정에 대한 앙갚음으로. 물론 지금도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달라진 것 같다. 딱 꼬집어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은 마치- 너만이 앓고 있는 병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렇겠지."
알고 있었다. 몇 차례고 말해주지 않았는가? 랑은 현민의 얼굴이 빨개지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현민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래, 이 장난감에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그 부분이잖아. 안 그래?' 하고 삐딱하게까지 여기고 있었을 정도로 아주 잘. 랑의 얼굴에까지 그 붉은 물이 옮겨드는 것은, 장난스런 괴롭힘에 비뚤어져 버린 소년의 마음에 정면으로 던지는 반박이기도 했다.
"일곱 시 반이면... 응, 괜찮겠네."
랑의 집은 학교에서 꽤나 가까웠다. 교문을 나서서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번에-라고 해도 어제지만-랑을 바래다주었던 집의 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지금부터 한 시간...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겠다고 현민은 생각했다. 발 빠르기로는 교내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빡빡한 시간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당신과 조금 닮을 수 있더라면 좋겠다- 랑은 바랐다. 그랬더라면 너랑 똑같아- 라는 말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좋다는 말의 무게가 버겁다. 기다리는 건 괴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데도 당신을 기다리게 만든다. 당신이 입맞췄던 곳이 계속 신경쓰여도 말하지 않고 티 내지 않는다. 느린 속도에 발맞춰 걸어줬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 당신이 팔베게를 해주었을 때 저 안쪽에서 무슨 바람이 생겼는지, 매번 손 잡을 때마다 당신이 쥐고 있던 예쁜 꽃 한송이를 쥐어오는 기분이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도 무엇도.
"늦어도 돼- 무리하지마."
랑이 쉬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자리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것과 축구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것 중에 무엇이 피곤하겠냐 고르자면, 자신이 할 수 없고 그렇기에 알 수 없는 쪽이다.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자신의 집 앞이 되어버렸고, 당신에게 한 시간은 랑에 비해 할 일이 많았다.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주머니가 주신 걸로 맛있는 거 먹자-"
신사임당 여섯 장,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에게는 큰 돈이다. 랑은 시내에 자주 가질 않아서, 간다고 해도 지나쳐 가거나 정말 필요한 물건만을 사러 갈 뿐이라 맛있는 가게 같은 건 잘 모른다. 하지만, 당신과의 데이트를 위해서 남는 시간 동안 찾아볼 수는 있다.
그래도, 그 어떤 것도 아직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다행히도 그는 랑이 그러했듯이 랑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입에 올리지도 못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꺼지는 일만 없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그 모든 이야기를 이 가무잡잡한 소년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늦을 것 같으면 연락할게."
하고 현민은 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민은 무리라는 말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평소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고, 오늘도 컨디션이 특별히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발을 내딛어버린 이상한 일에 대한 낯선 두려움과 설레임 그리고 기대감으로, 현민은 평소보다 좀더 텐션이 팽팽해져 있는 상태였다. 랑이 물어보자, 현민은 잠깐 생각했다. 사실 얼른 떠오르지는 않았다. 현민에게 있어 외식은 중국집이라던가, 아니면 무한리필 고깃집 같은 지극히 투박하고 남고생놈스러운 데이터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그 때 랑에게 더럭 데이트 신청을 해버린 이후로, 현민은 몇 차례 놀림을 감수하고 어머니와 형에게까지 조언을 구했다. 물론 신나게 놀림당했지만(그리고 오늘 귀가하면 또 놀림당하겠지만), 덕분에 몇 군데인가 식사하기 좋은 플레이스를 추천받을 수는 있었다.
"경양식 어때. 스테이크랑 파스타랑 해서. 아니면 네가 먹고 싶은 게 따로 있어?"
아니면 일식집이나, 중화반점에 가서 꿔바로우를 먹어도 좋고- 하고 현민은 가볍게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려보았다. ...생각해보면 랑의 취향에 대비해서 메뉴는 다양하게 준비했는데, 랑이 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다. 질문이 생각난 김에, 랑에게 바로 물어본다. ...애석할 정도로 멋없지만 현민의 성격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당신에게서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이 온다면. "그러면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일찍 만날거야."
당신의 집으로 걸어가고 만다면, 다시 되돌아와야할 길이 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당신이 뛰어와야할 거리를 조금 좁혀줄 뿐이다. 아침 이슬이 잎사귀 위로 톡 떨어지듯 웃었다. 조그맣지만 생동감 있고, 분명하지만 톡 튀어 사라져버린다.
"나 말고 너-"
경양식 집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한 찰나 먹고 싶은게 있냐는 물음에 투정부렸다. 당신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었다. 랑은 가리는 것도 없고 먹는 양도 그 몸집에 비해 많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이기는 하지만, 잘 먹는 것은 맞다.
"좋아하는 거?"
랑은 자신에 대해서 잘 밝히지 않았다. 화제에 올라도 대답을 이리저리 피해간다. 간단명료한 돌직구가 오히려 랑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가리는 것 없는 먹깨비에게 좋아하는 메뉴 하나 고르는 것은 꽤나 고민스러웠다. 이것저것 음식들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어려워..."
결국 메뉴 하나를 집어내지 못 했다. 이렇게 고민스러워 하는 모습은 아마 처음 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