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째 수줍다. 현민도 랑이 한 생각을 똑같이 해버렸기 때문이다. 쓸쓸하거나 외로운 기다림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낯설게 느껴지는 탓도 있었다. 그러나 딱히 퉁퉁댈 기분은 들지 않았고... 그냥, 기뻤다. 거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좁히고 싶다는 랑의 말이.
"어려워?"
메뉴를 정해달라는 말에 깊이 고민하고 있는 랑의 모습. 특별히 뭔가 가리지 않는다는 걸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걸까. 현민은 랑의 식습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한 끼를 몰아먹는 랑의 식습관도 모르고 있었고, 차라리 그 투박하기 그지없는 무한리필 고깃집이 어울릴 먹깨비라는 점도 모르고 있었다. 빼빼로를 입안으로 호로록 갈아넣는 게 귀엽긴 했지만 그걸 보고 랑의 식성을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래서, 현민은,
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편식을 하지 않는 건 좋은 일이지만, 랑이 처음부터 편식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곧잘 음식을 골라먹었다. 계기가 있었다. 편식을 하지 않게 된 건 사소한 변화에 축할 정도로, 그 계기로 인해 랑은 많이 바뀌었다. 무튼 그 변화 이전에 좋아했던 음식이 있었나- 생각해보았는데, 한가지 떠올랐지만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솜사탕이다. 달콤하고 귀여운 색깔을 가진 디저트. 이제는 끈적하게 녹아내려 기분 나쁜 감각을 기억한다.
"응, 난 좋아.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인당 메뉴 하나로는 안 된다.
랑은 자연스러운 애프터 신청을 눈치챘다. 다른 아이였다면 괜찮다고 선을 그었겠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시내는 달갑지 않고, 공부를 알려주겠다- 하고 시작됐다. 그렇지만 가끔은 당신과 나들이를 가고 싶었다.
"느릿느릿 기다릴게. 넘어지지 말고 다녀와~."
당신이 떠날 수 있게 먼저 손을 흔들었고, 높다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데이트룩은 당신이 골라준 색 덕에 이미 코디가 끝났다. 단정하게 갖춰입고 있던 교복과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 학교 가방 대신에 사복을 입는다. 살짝 달라붙는 하늘색 목폴라 티에 교복치마보다는 한 뼘 위에 있는 체크무늬 모직 스커트. 무채색 느낌의 스커트와 비슷한 색의 숏코트를 위에 입는다. 숏코트라 해도 랑에게는 넉넉한 크기여서 스커트의 반을 가려버린다. 검은 크로스백 안에는 휴대폰, 지갑, 혹시 모르니 반창고와 연고를 챙긴다. 그리고 건조해진 날씨에 맞는 핸드크림과 립밤 정도. 스니커즈 대신에 검은 하이탑을 신고서 나오면, 랑은 행동이 느려서- 당신과 헤어졌던 장소에 서면 일곱시 십분은 지나있고 일곱시 반은 되지 않은 때였다. 집에서 따뜻하게 있어도 괜찮았겠지만 랑은 그러지 않는다. 당신에게서 연락이 왔을까 확인할 겸, 경양식 맛집을 찾을 겸 휴대폰을 꺼내든다.
랑이 현민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듯, 현민도 랑에 대해 많은 것을 몰랐다. 제대로 친분을 쌓은 지 며칠도 안 된 사이였고, 더군다나 두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에 적합치 못했으니까. 한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숨기는 데 능숙했고, 한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서툴렀다. 아무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상대를 만났더라도 말이다. 결국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서로를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귀에 피어싱 뚫은 것을 선생님한테 들키기 싫어 도망가던 걸 숨겨주고, 그 대가로 공부를 가르쳐주기로 약속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후회되거나 못마땅하다는 건 아니다. 그저 함께 있게 된 이 푹신한 순간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현민은 문득 자신이 지금 느끼는 것처럼, 랑이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랑에게 행복이기를 다시금 빌었다.
"그래, 많이 먹자. 네가 오늘 아침 점심을 너무 많이 먹지 않은 거라면 좋겠네."
현민은 호기롭게 랑의 말을 되받는다. 랑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민도 식사량이라면 자신있다. 축구부가 하루에 소모하는 칼로리는 어마어마하다. 아파트 단지로 총총 사라져가는 랑을 손짓으로 배웅하고, 랑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현민은 몸을 틀어서는, 랑의 보조에 맞춰 느긋하게 느릿느릿 걷던 발걸음을 급하게 재우치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은 경보가 되고, 경보는 뜀걸음이 되고, 뜀걸음은 전력질주가 되고......
일곱 시 십이 분.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현민은 아직 안 왔다. 핸드폰에는 딱히 연락도 없다. 여섯 시 반에 헤어졌더라도 현민의 집까지 가는 시간이 더 필요할 테고, 샤워 시간은 아무리 빡빡하게 잡아도 삼사십 분은 줘야 할 테니 아마 지금쯤이면 샤워 뒷마무리 중이지 않을까. 과연, 경양식집을 뒤져보려니 채부끄럼쟁이한테서 카카오톡 하나가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