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때까지 있어준다면, 하는 말을 소년은 겁쟁이처럼 삼켰다. 감히 상실이 두려워진 탓이다. 경기를 보러 와라, 다음에도 데이트해 달라, 이 마음이 뭔지 알게 되면 다 말해주겠다는 말은 했으면서, 그저 조그맣게 타올라 아직 어딘가 옮겨붙지는 못하고 있는 연연하고 따뜻한 불씨가 꺼지거나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릴까 봐. 아직은, 아직은 어설프기만 하다.)
(그렇지만, 구름 위에 연연하게 걸린 발그레한 아침놀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랑이 어깨에 짧게 툭 기대자, 반대쪽 손을 뻗어 랑의 반대쪽 어깨를 조심스레 한 번 손으로 싸안아 보고는 놓아준다. 랑이 견디고 싶은 만큼, 아주 잠시만, 아주 잠깐만. 조그맣지만 분명한 메시지가 담긴 손길을. 그러고서야 현민은 랑과 함께 라커룸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지. (현민이 생각하던 것보다 좀더 긴 시간을 방과후의 교실에서 보냈다. 방과후 자율학습 희망자들은 다른 교실에 모아서 자습을 시키니, 이 시간까지 라커룸에 누가 미적거리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랑이 팔에서 떨어져나가자, 현민은 왠지 춥다고 느꼈다. 열기가 떠나간 자리가 겨워 짧은 몸서리를 친다. 붕붕 하고 작별인사하듯 손짓하는 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녀와- 하는 말에서야 현민은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만. 금방 올게.
(그리고 현민은 당신을 3분 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과연, 체육계 남고생다운 경이로운 환복속도다. 교복 바지에, 셔츠 대신 목티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입고 그 위에 까만 블루종 하나를 더 껴입은 오묘한 고등학생 스타일로 믹스된 옷차림이다. 블루종의 어깨에는 (아마 제품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듯한) 날개 달린 배 모양의 하얀 패치가 박음질되어 있었는데, 까만 블루종 바탕에 그런 패치가 붙어있으니 확실히 범고래를 연상케 한다. 한쪽 팔에 크로스백을 달랑달랑 매고, 다른 팔은 랑이 다시 맞잡거나 팔짱을 끼기 좋게끔 남겨놓은 차림으로 현민은 되돌아왔다.)
(랑은 기다림에 익숙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기다림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당신을 기다린다는 점이 달랐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다. 당신이 사라지며 생긴 짧은 공백. 공백을 채울 것이 없었다. 랑은 그래서 빗소리를 좋아했다. 비가 오면 매순간 빗소리가 깔려 있다. 비가 오는 날은 아무리 조용하더라도 공백이 없어진다. 꾸준히 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가 좋았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창문에 부닥치는 빗방울 소리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물방울 소리도 좋았다. 그 소리를 상상하며 공백을 메웠다. 다행히 공백은 정말로 짧았다. 적막함은 랑의 이름으로 깨졌다.)
(하랑, 배하랑. 이름이 좋은 만큼 싫었다. 불려야 한다면 앞 두글자는 버리고 랑으로만 불리고 싶다. 랑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랑은 인간관계라고 할말한 건 학교 뿐이다. 그마저도 같은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일 뿐이다. 선생님, 학생할 것 없이 짧고 의미없는 연으로 남을 것이고, 졸업하면 그마저도 잊혀진다. 그런데 당신은 다를지도 모른다. 랑은 조용하던 순간에 들린 자신의 호칭이 다른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문득, 갑작스럽게도-) 랑이야. (당신이 부른 이름을 고쳐버렸다. 별 이유 없단 듯이 배시시 웃은 랑은 가방을 메지않은 쪽으로 당신의 옆에 섰다. 당신의 손을 잡았다.) 내 이름 랑 하나야. 아무도 모르고 너만 아는 비밀~. (웃으며 당신을 올려다보더니 이유를 붙인다.) 애칭이라고 생각해! 별명이라고 생각해도 돼. 그러니까- (당신의 목소리가 부를 때는 랑이라고 불리면 좋겠다.) 랑이라고 불러줘.
(본디 현민은 무언가에 별 의미를 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쓰잘데기없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해야 할 일은 두 번 할 필요 없게끔 확실히 끝내자는, 연비 좋은 에코익 라이프를 삶의 슬로건으로 삼고 있던 현민에게 있어 무언가에 의미를 둔다는 건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나 랑과 보낸 나날들 나날들 하나하나가
현민에게는
자신이 외면하고
내다버리기로 했던
조그만 의미들로
가득차서
꼭 쥔 손, 마주 걸어가는 걸음
코끝에 걸리는 향기
조그만 꽃잎같은 따스함
아침 등교길
낯선 저녁 가로등
너의 이름
하랑, 하고 짧게 풍경소리처럼 울려나가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반짝이는 의미를 머금고 현민에게 와닿았기에
어느새,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가장 바라던 가장 두려워하던 것들로 가득차 있었기에
그는 어느샌가 자신이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랑이야, 하는 조그만 울림에 현민은 발을 내딛으려다 말고 랑을 바라보았다. "랑?" 하고 되뇌인다. 외자 이름. 배와 하가 모두 성이었던 모양이다. 두 글자 성 중에 배하라는 성이 있었던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랑, 하고 조그맣게 울리는 이름에 떠밀려 사라진다. 랑은 현민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조그만 풍경소리의 절반을 가져가는 것으로써 자신을 더 많이 현민에게 걸었다. 현민은 눈을 깜빡이며 랑을 돌아보고 섰다. 말갛게 랑 하고 울리는 소리 하나만을 남겨놓은 네 이름이 어째서인지 그만큼 더 아름답고 더 덧없었기에. 현민은 랑의 손을 꼭 쥐었다. 더 많은 비밀을 내걸며 더 내보여준 모습이 더 가볍고 더 덧없어서 잠깐만 눈을 떼면 어디론가 흩날려가 버릴 것 같은 아찔한 상실감이 두려웠다. 현민은 혹시 날려가버릴새라, 랑의 이름을 조심히 한 번 더 불러본다.
"랑아."
현민은 랑을 가만히 마주보다가, 고개를 숙여내렸다. 그리곤, 톡, 하고, 랑의 뺨 한쪽에 조그만 입맞춤을 남겼다.
앞의 두글자가 각각 하나씩 하나는 아빠, 하나는 엄마. 랑은 자신의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오로지 이름만이었다. 랑이라는 글자 하나만이 오로지 랑의 것이었고, 랑은 그 한 글자만 이름이라고 여겼다. 이름 한 글자처럼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지면 혼자서는 누군가로 인해 아플 일이 없다. 당신이 되뇌인 목소리에 작은 고갯짓과 함께 답했다. 랑은 몰랐다. 자신의 작고 가벼운 행동들이 쌓이고 쌓여서 거센 바람이 되었는지, 파도가 되었는지, 그게 당신을 얼마나 흔들고 있는지 몰랐다.
"응, 그렇게-"
그렇게 부르면 돼- 하고 말하려고 했다. 당신이 고개를 숙였을 때 랑은 무언가 뺨에 닿았음을 알았다. 무엇이 닿았는지는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랑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실수이기를 바랐고, 실수라고 생각했다. 실수가 아니라고 했을 때 랑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인지 짐작하기조차 겁이 났다.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을 거절하는 일은 마음을 고백하는 일 못지 않게 용기가 필요하다. 고백도 못하는 랑은 거절도 하지 못한다. 답 하지않고 도망치고 멀어지는게 쉽다. 그러다 미움 받으면, 당신에게 미움 받으면 그건 괴로울 것 같았지만- 바보같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부작용으로 앓고 지나야 하는 랑의 몫이다. 그래서 지금은 웃었다.
안전장치도 뽑아버리고 온 기관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전력질주한 결과, 현민은 푹신한 안개 뒤에 숨어 있던 온도도 색깔도 없는 벽에 정면충돌했다. 적막한 굉음이 울리며 두 사람 사이가 침묵에 잠긴다. 닿지 않았다. 랑이 함께한 얼마 안 되는 시간이 얼마나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였는지, 살랑살랑 떠돌다 맞잡아준 손이 얼마나 따스한 위안이었는지. 자신만 떠들고 자신만 부딪힌 것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현민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아예 노 데미지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 충격으로 무너지기엔 이미 그의 가슴에 구름같은 소녀의 모습들이 너무 많이 채워져 있었고, 그 대답은 추방도 허가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가볍고 여상스럽게 웃어넘기는 말. 그래서 현민은 랑이 '준비가 안 됐다' 고 판단했다. 자신 역시도 준비가 덜 된 채로 성급히 돌격하기도 했고. 현민은 랑의 유예를 존중하기로 했다.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래서 현민은 마찬가지 애매한 말로 랑의 말을 받아넘겼다. 모르는 것은 아니다. 대답하기는 두렵고, 미움받기는 싫은. 그러나 현민은 미움받는 일에는 익숙했고,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일에도 익숙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은 낭비니까. 그래서 거부당한다고 해도 뒤끝 없이 멀어져 줄 자신이 있었다. 랑이 있었던 빈자리는 쓸쓸하고 아프겠지만, 그런 아픔을 고요히 삭이는 것도 익숙했다.
그러나 굳이 대답을 재촉할 생각도 없었다. 모르지는 않았으나 다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 안다고 떠들어댈 생각은 물론, 조금이라도 안다고 아는 척할 생각도 없었으며, 알려주겠다고 떠벌리고 싶지도, 모른다고 채근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방금 삶의 에너지 중 엄청난 양을 대단히 무모한 시도에 소모했기에, 또 그런 데에 낭비할 에너지는 없었다.
현민은 그래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방금 전력으로 들이받은 벽 앞에 자리잡고 앉아, 랑이 자신을 승낙하거나 자신을 거절할 준비가 될 때까지, 아찔한 충돌과 그 이후의 침묵과 그 뒤에 숨어있을 랑의 뜻모를 마음을 모른 체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랑이 하는 것처럼 쭈그렁 할아버지 되기 전에 말해줘야 해, 하면서 살랑살랑 건드려볼 말재간이 없기도 했고.
언제까지 기다리게 될지 모른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에너지효율이 좋은 에코익한 행동이니까. 다만 언제까지는 몰라도 기다림에도 한계는 있기에, 현민은 그 한계가 되기 전에 기다림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tmi: 현민이 쓸데없는 에너지낭비만큼이나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짐짝이나 고민거리가 되는 일 그래서 자신이 랑에게 고민거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하고 있지만, 랑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기에 랑이의 침묵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검은 펜을 하얀 종이 위에 마구잡이로 놀린다. 죽죽 긋고, 빙빙 돌리고, 검은 종이가 되어갈 때는 손에서 펜을 놓치고 만다. 모를 수가 없는 모른 척이 고요하기만 하다. 랑이 바라던 대로 당신은 모른 척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기에는 너무 큰일이 일어났는데- 잠잠하다. 그래서 랑의 속이 시끄러웠다. 요동친다. 랑은 당신의 붉음이 머금는 온기가 따스한 것을 알았고, 툴툴거리는 표정을 보고서 웃었으며 이름모를 마음 조각들을 건네 받았다. 당신에게 무엇을 했는지, 당신은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려고 했지만 놓쳐버린 펜을 다시 잡을 수 없었다. 종이를 구겨서 욱여 삼켰다. 마음 조각의 이름을 찾을까 겁난다. 당신에게 더 의미를 부여하게 될까 겁났다.
"응."
부를 수 있을까.
랑은 당신에게 하나 묻고 싶은게 생겼다. 왜 좋은지 궁금했다. 손을 잡는게 좋은 이유, 같이 있는게 좋은 이유. 당신에게 못되고 이기적이게만 구는데- 이마저도 못되고 이기적이라서 물어보지 않았다. 아프기는 대답조차 듣지도 못한 당신이 더 아플텐데 왜 랑도 아픈가. 랑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은 같은데 자신이 만든 벽에 랑도 갇혀 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샤워헤드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 아래에서, 잠이 들지 않아 미적거리는 어두운 잠자리 안에서, 달리기를 하다 어느덧 너른 운동장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두가 떠난 방과후의 빈 교실에서, 아무도 남지 않은 라커룸에서, 밤길에 홀로 쓸쓸히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문득 그런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우습게도, 그것은 사무칠 정도로 차갑고 쓸쓸한 고독이었다!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전부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가장 서로를 알아주는 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어쩌면 서로를 상처입히게 될지도 모를, 서로를 알아주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숨기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고독. 그것이 결국 이 차가운 하늘 아래 나는 혼자구나, 하는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 있다. 쓸쓸한 운명이 장엄한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런데 네가 내게 그 순간들을 잊게 해줬다.
"딱히, 좋아하는 색은 없었어."
현민은 랑을 따라서 자박자박 운동장을 가로질러 보도블럭으로 올라서면서, 랑의 질문에 대답했다. 없었어, 하는 말에 힘을 주면서. 빨강은 싫어할 것 같아~ 하고 팔랑팔랑 웃는 랑을 보며 현민은 예의 그 >:( 표정을 잠깐 지어보였다. 그리곤 표정을 풀고 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찍 나오는 랑과 함께 걸어가는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 아래, 랑의 눈동자가 파랗고 말갛게 빛나던 순간이 지금 랑에게 겹쳐보였다.
랑은 당신이 찌푸리면 웃었다. 즐거운 웃음소리를 낸다. 얄궂고 짓궂다. 당신이 없었다고 강조하는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랑은 무슨 색을 이야기할 지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맞아들었다. 이런 순간들이 좋았다. 주제도 모르고 온기에 가득 겨워버리는 순간에 당신이 옆에 있다. 요즘들어 그런 기분이 들 때가 많아졌다- 하면 요즘들어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랑은 자신의 가벼운 말과 행동이 당신이 흔들어버린다는 걸 알아도, 지금 느낀 온기를 고스란히 실어 살랑거리고 만다.
"난- 주홍색이 좋아."
랑은 그렇게 배시시 웃으며 답하는 동시에 옷장을 기억했다. 새벽의 동터오는 하늘 색을 가진 옷을 찾았다. 당신은 방금 한 마디로 랑의 데이트룩까지 골라주었다.
"주홍색보다는 부끄러워하는 색이 맞을 거 같지만~."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당신을 놀리려고 덧붙인 말이었지만, 주홍색이 좋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랑은 당신이 얼굴을 붉히면 까르륵 웃고는 했다. 순식간에 계절을 따라 단풍 물이 들어버리는 당신의 모습에서 그 색을 기억한다. 당신과의 순간을 좋아하니, 주홍색을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딱히 좋아하는 색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집 벽의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들은 대부분 무채색 계통이 아니던가. 색이 있어봐야 별 의미 없는 카키나 네이비, 브라운 정도. 트레이닝복은 회색이었고. 그가 입는 옷들 중에 색이 있는 것은 색이 정해져 있는 교복과 축구부 유니폼뿐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 처음으로, 무언가 분명한 의미를 가진 색이 생겼다. 그리고 두 번째가 생기는 것도 금방이었다. 부러 주홍색을 언급하며 살랑거리는 랑을 보고 현민은 또 안면을 찌푸렸다. 역시나 랑이 기억하는 그 색깔이 또 그 거무스름한 얼굴 위에 살살 올라온다. 그러나, 현민은 화를 내는 대신...
"몇 번을 얼굴이 빨개져도 니가 싫지 않다면 됐어."
하고 앞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빨리 집에나 가자는 듯. 역시나, 적응이 힘든 복잡한 기분이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 자신에게 어설픈 색깔이 상대방에게 귀엽다고 일컬어지며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그렇지만, 딱히 거부할 생각도 없고, 물릴 생각도 없다. 무언가 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저, 서로 이렇게 낯설고 따스한 순간을 조금씩 마주쥐고 서로에게 익숙해져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될 거라고 현민은 생각하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너희 집 앞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 버스정류장 가려면 어차피 너희 집 앞 지나가야 되고. 몇 시쯤에 만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