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지 다 나온다는 당신의 한 마디에 까르륵 웃은 랑은, 사과와 딸기가 어쩌다 나온 것인지 맞추고 말았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다음에 사과와 딸기라니 아무래도 교집합이 작아보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았더니, 사과와 딸기는 빨간 색이었다. 랑은 세상 무해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사과랑 딸기는 현민이~. (그리고 또 빨간 과일을 생각해본다.) 체리도 있고 앵두랑 석류, 자두~ 복숭아는 어때? (체리에 손가락 하나, 앵두에 손가락 하나- 랑은 복숭아까지 이야기하며 다섯손가락을 다 접었다.)
(입에 내밀어진 빼빼로를 큰 의식없이 입에 물었다. 빼빼로를 입에 물면서 방긋 웃은 랑은 금새 당신이 건네준 빼빼로를 먹어버렸다.) 응, 오늘 빼빼로데이니까 놀러가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그리고, 아- 하고 그 빼빼로를 하나 더 먹겠다며 입을 벌렸다. 이 또한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랑도 모르게 본인이 식탐쟁이인 티를 내고 있을 뿐이다.)
진짜? 14번 선수~ 하면서 부르는 줄 알았어. 학교랑 팀에서는 이름 부르겠지만- (멋지다는 생각만 들어서 난감해진 참이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랑은 무심코 부러워하고 말 때가 있었다. 자유롭게 뛰어다니는게 부럽다거나, 목소리를 온전히 듣는게 부럽다거나 하며 자칫 잘못하면 늪에 빠지고 말아버릴 생각을 하고 말 때가 있다. 멋지다- 생각하다 부럽다- 생각하게 되는 건 찰나였다. 이럴 때면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랑은 당신을 따라서 창가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응. 여기서 보면 너도 엄청 작아져. 그래도 나 너 잘 찾아! (배시시 웃으며, 순수히 당신을 잘 찾는다고 뽐내던 랑은 순수히 물어보았다.) 넌 나 찾을 수 있어? 찾기 어려울 거 같아- (당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기보다는, 당신과 비교하자니 랑을 찾는 건 난이도가 높았다. 우선 키만 보아도 당신은 머리 하나 쯤은 위에 우뚝 튀어나오고는 했고, 랑은 그 사람들 사이 아래로 사라져서였다.)
톡 세개 남길게. 너 보러 갈래, 무슨 옷 입고 있어, 화이팅! 이렇게 세개. (순서대로 당신의 경기를 보러가겠다는 알림, 당신이 랑을 찾을 수 있도록 입은 옷, 그리고 당신을 향한 응원이다.)
(본전도 못 건지고 빨간 과일들로 신나게 두들겨맞았다. 채소로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현민은 >:( 모양으로 인상을 쓴다. 물론 얼굴빛깔이 또 보기 좋은 빨간색이 돼서 진짜로 화났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든다. 앵두나 석류라기보단 역시 이로 보나 모로 보나 홍시다. 그 와중에 연필깎이마냥 빼빼로를 드르륵 갈아버리는 랑의 모습에, 엉뚱하게도 다람쥐를 떠올린 현민은 화난 얼굴을 유지한 채로 무의식적으로 빼빼로를 더 집어 랑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번호를 붙여서 부르는 일이 프로리그보다 자주 있긴 해- 프로리그는 사람들이 저 선수가 누군지 알지만, 유소년 리그는 사람들이 선수들 이름과 번호를 잘 모르니까. 매년마다 선수가 3분의 1씩 바뀌기도 하고.
(정작 그것을 말하는 현민은 조금 씁쓸했다. 딱히 자신이 필드 위에서 열성적으로 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속감과 의무감, 그게 전부였다. 그는 필드 위에서 방황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오히려 학원 같은 데 가지 않고도 순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있는 랑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놓여있는 곳에서 빼어난 활약을 하고 있지만, 그 활약에 스스로가 의미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모습을 부러워한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
멀리서는, 나 머리가 높은 곳에 있으니까 꽤 잘 보여. 그리고 가까워지면... 넌 향기가 나니까, 쉽게 알 수 있어.
(랑의 입에 빼빼로를 밀어넣어주고 자기도 빼빼로를 입에 물고는 톡 부러뜨려 우적우적 씹다가, 랑이 꺼낸 3개의 메시지 이야기에... 현민은 뜬금없이, 부끄러움이 배제된 순전한 따뜻한 마음이 가슴속에 느릿하게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현민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경직된 무표정이라기보단, 마음을 감싸는 평온을 느낄 때 마치 무장해제되듯이 지어지는 그런 무표정. 현민은 문득 손을 뻗어서, 랑의 머리를 가볍게 삭삭 쓸었다.)
왜에. 귀엽게 생겼잖아. (사과는 사과 중에서도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루비에스를 떠올렸고, 딸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작고 귀여운 면이 있었다. 체리와 두개로 나뉘어 달리는 모양이 깜찍했고, 앵두와 석류는 조그맣게 올망졸망 모여있는게 퍽 귀엽다. 자두와 복숭아는 하트 모양으로 귀여운 이미지가 있다- 라고 랑은 생각했다. 그 과일들이 귀엽느냐고 당신이 말하거든 지금 생각한 그대로를 말할 생각이었다. 제가 뭐가 귀엽느냐고 당신이 역정낸다면 지금 빨간게 귀엽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푸스스 웃던 랑은 마침 당신이 빼빼로를 집어다주니 입에 물었다. 오도독. 입을 오물거리면서 빼빼로는 자취를 감춘다.)
응- 나도 너 말고는 모르겠어. 아, 주장은 알겠다! 1번 아냐? (보통 주장은 무슨 종목이든간에 관계 없이 1번 선수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간단한 추론이었다. 나중에는 당신이 1번이 되는걸까- 하고서 막연하게 생각했다. 축구에 관해서 아는 거라고는 골기퍼만 손을 쓴다, 골을 많이 넣는 쪽이 이긴다- 밖에 모르는 랑의 눈에도 당신은 잘한다고 생각됐으며, 발이 정말 빠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랑은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달려보았던 때가 언제쯤인지 세어보았다. 아직 그리 까마득하게 먼 일이 아니었다.)
향기? (랑은 한 팔을 들어서 소매 즈음에서 무슨 향이 나나 맡아보았다. 대부분이 그렇듯 본인에게서 무슨 향이 나는지는 잘 모른다. 킁킁 향기를 맡던 랑은 고개를 살짝 갸웃였고, 향기가 나서 쉽게 알 수 있다는 당신이 정말 강아지를 닮았단 생각을 했다. 까맣고 구불구불하고 커다란 푸들. 한 번 쓰다듬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당신의 손이 먼저 랑을 쓰다듬었다. 랑은 예상치 못했지만 괜찮았다. 당신의 손만큼은 괜찮기로 했다. 으레 강아지나 고양이가 쓰다듬는 손길을 받을 때 귀를 젖히듯이 랑은 눈을 감았다. 무서워하지 않기로, 움찔거리며 상황을 파악하지 않는 대신에 꾹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감은 동안 당신의 손길이 맞음을 확인했다. 애초 지금은 당신하고만 둘이 있었으니 금방 당신의 손이라고 확신하고서 눈을 뜬다.)
기다려진다고 하면 서프라이즈로 가는 거 미안해지잖아- 오늘처럼! (당신도 짐작했을 것 같다만, 랑은 장난꾸러기 기질이 다분했다. 경기에도 서프라이즈로 찾아갈 생각을 안 하지는 않았다. 오늘 축구장에 무심코 찾아갔을 때 당신이 얼마나 수줍어하고, 얼마나 설레했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랑은 당신과 있어서 즐겁기 때문에 당신도 그렇기를 바란다. 당신은 랑과 같이 있는 게 좋다고 했지만 글쎄, 좋음의 크기는 다 다르니 랑은 조금 더 큰 좋음을 선물해주고플 뿐이다.)
대체 그걸 어딜 봐서... (하다가 현민은 말을 포기했다. 그래, 색깔이겠지, 색깔. 주접스레 붉어지기만 하는 색깔.) 좋을 대로 하셔. (몰리고 몰린 나머지 현민은 그냥 자기의 완패를 인정하기로 하고 어설픈 가드를 내렸다. 다행히도, 랑이 자신이 꽤 잘 아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준 덕분에 현민은 차라리 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니, 등번호는 다른 사람이 먼저 쓰고 있는 게 아닌 한 자신이 원하는 번호를 고를 수 있어. 1번은 규정상 골키퍼한테만 부여할 수 있고. 물론 골키퍼가 주장을 겸임하기도 해.
(주장 직위는 선수들 중에서 단순히 잘 뛰고 잘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전술적 식견과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선수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선수를 투표로 뽑는다. 반장 선거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것보다 더 엄중하고 철저하게 진행되는 선거였다. 그러니까, 이제 겨우 1학년 수비수들 중에서 쓸만한 유망주 정도로나 평가되고 있는, 아직 스스로의 진로도 분명히 정하지 못한 1학년생이 바라보기에는 너무 이른 자리다.)
응─ 향기.
(현민은 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삭삭 쓸어본다. 눈을 떼면 확실히 현민의 어깨에서부터 팔로 뻗어나와 랑의 옆머리에 닿아있는 것은 현민의 팔이 맞다. 딱히 뭔가 하지 않아도, 둘만이 있는 교실에서 가까이 붙어있자니 랑의 냄새가 좀더 분명히 와닿는 느낌이다. ......왠지 이런 데에 집중하고 있자니 정말로 무슨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이라도 된 것 같아, 잠깐 떨어져나갔던 부끄러움이 밀물 몰려오듯이 얼굴이 홧홧해진다. 현민은 조심스레 랑의 머리에서 손을 거둔다.)
......알아서 해.
(현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랑이 경기를 관람하러 오는 것을 막거나 제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관중석에서 갑자기 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해서 꼴사나운 실수를 하거나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생각도 못한 타이밍에 랑이 불쑥 보이면 한창 볼을 놓고 경합을 벌이다가도 얼굴이 시뻘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경기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는데, 화들짝 놀라서 발을 접질려 나자빠지는 모습보다는 멋진 슈퍼플레이로 팀의 득점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겠는가.)
(빼빼로 통은 텅 비었다. 현민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이들은 이미 제 갈 길로 다 흩어져 간 모양이었다.)
(좋을 대로 하셔- 그 말이 랑을 지나가지 못 했다. 랑은 이 한 마디를 곱씹었다. 당신은 그런 의도를 담은게 아닐테지만, 랑은 난 이미 네게 제멋대로 굴고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어떻게 사귀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는게 없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건 오답일테고 인간관계는 서로 맞춰나가야하는 것인데, 뜬구름 생활을 하더니 땅을 딛고 서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직 겁나고 아직 무서우니 지금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괜찮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에게 랑은 응- 하고서 웃어보이기만 했다.)
그럼 정말 너 말고 아무도 몰라. 그럼 그냥- (당신을 제외한 축구부가 랑을 알아볼 일도 없을 것 같고, 랑 또한 당신을 제외한 축구부에 관심이 없다. 랑은 본인이 말했던 대로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운동을 하는 장소에 가는 것만으로도 일반인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사람이니까. 괜히 늪에 빠지기 싫어서 당신을 알기도 전에는 근처에 얼씬도 안 했다. 체육 시간에만 해도 매번 빠지고,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계속 너만 알고 있을래. (랑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게 얼마나 얄궂고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물어보지 않았다.)
내 향은 모르겠어. 네 향은 나! 지금도 나. (당신이 랑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그 반대로 랑도 당신의 향을 맡았다. 커다란 곰인형이 떠오르고 당신과 겹쳐진다. 당신을 보면 또다. 또 얼굴 붉히고 있는 당신을 보고서는 웃어버린다.) 이번에는 뭐야? (쓰다듬을 때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고, 대화 주제도 방금까지만 해도 잘 대화하고 있던 주제다. 의문이 샘솟는 질문이 아니었다. 당신에게 갖고 있는, 이름 붙이지 못한 따스한 감정이 감싸고 있는 물음이다. 랑은 무심코 당신을 쓰다듬어버렸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닿은 손길은 조금 개구지고 조금 부드러워서 금방 떠난다.)
기다려진다니까 다음에는 말하고 갈래. 그 다음은 비밀- 그러니까 경기 나가게 되면 꼭 말해줘야 해? (랑은 짐짓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뜻 손을 내밀었다. 살포시 주먹을 쥔 모양에서 새끼 손가락만 펼치고 있다.) 약속해~. (약속하자고 건넨 손의 새끼 손가락은 재촉하듯이 조금 까딱거렸다.)
왜 혼자 가- 같이 가. 같이 있는 거 좋다며.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리더니, 장난인 듯 그새 그쳤다. 가방을 챙겨들며 일어나는 당신을 따라 일어나더니 랑의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긴다. 그리고 물끄럼 당신을 바라본다.) 그러고 갈거야? (허리춤에 랑의 담요가 둘러져있다. 랑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민은 걱정스럽게 자기 냄새를 맡아본다. 데오도란트의 스파이스한 향과 스킨의 우디한 향 사이에 확실히 땀냄새가 섞여 있다. 데오도란트와 스킨의 향에 익숙해져 있는 현민의 코에는 땀냄새만이 거슬리게 다가올 뿐이지만. 빨리 옷 갈아입고 집에 가서 씻어야겠다고 현민은 생각했다. 라커룸에 샤워실도 딸려 있지만 이 늦가을에 쓰기엔 물이 너무 차고.) (급하지 않아도 좋다. 애쓰지 않아도 좋다. 조금씩 조금씩. 서로가 달가운 만큼씩만 거리를 좁혀가도 충분하다. 길들이고, 길이 드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너만 알고 있을래... 하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현민은 손을 떼고는 랑의 손길에 머리를 내맡긴다. 발갛게 물든 얼굴을 하고서도, 무슨 손 잘 타는 대형견처럼 랑의 손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덮인 머리를 꾹 디민다. 이번에는 뭐야? 하는 말에, 그는 나직이 대답한다.)
몰라. 알게 되면 말해줄게.
(랑이 손을 거두자, 현민은 머리를 다시 든다. 워낙에 곱슬곱슬하고 숱이 많은 머리라 평소에도 헝클어져 있지만, 랑의 손이 쓸고 간 자리에는 랑만이 알아볼 수 있는 모양으로 헝클어진 자국이 남는다. 랑의 말에, 그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출장하게 되면 말해줄게.
(랑의 새끼손가락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두지 않고, 현민은 새끼손가락을 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사실 굳이 그가 전해줄 필요 없이, 교내 게시판의 월간 학교 일과표에 교내 축구팀 경기 일정도 표시되어 있으니 그걸 보라고 해도 될 일이다. ─그렇지만 이 약속을 수락하면 랑에게 연락을 보낼 빌미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 아닌가. 이런 이득을 놓칠 수는 없다.)
혹시나 해서.
(랑이 툴툴대자, 현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 아무리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있으면 곤란한 상황이나,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나, 둘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게 더 편한 상황 같은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현민은 랑의 선택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러다 랑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건넨 말에, 현민은 그제서야 자기 허리에 둘러진 물고기 무늬 킬트를 바라본다.)
Aㅏ.
(그는 후다닥 허리에서 담요를 끌러낸 뒤 가볍게 탁탁 털고 차곡차곡 개어서 랑에게 돌려주었다.)
응, 꽃향기 나~. (당신이 너무나 걱정하는 것 같아 향긋한 향의 대표인 꽃 향기를 언급했다. 당신에게서 나는 향은 꽃향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만큼이나 불쾌하지 않으니 괜찮다- 말해주고 싶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축구장에서 뜀박질 하고 있었을텐데 땀은 흘릴 수 밖에야 없다. 당신이 개의치 않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졸업하기 전에는 들을 수 있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다. 랑은 평소에도 헝클어져있는 이 머리카락이 좋았다. 당신의 머리카락이라서 좋았다. 손에 구불거리며 닿는 느낌하며, 손에 꾹 디밀며 조금 더 가까워지는 거리감도 좋았다. 당신은 랑에게 미안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고마운 사람이라서, 작은 손길이 닿아 머금게 되는 온기가 반가웠다. 머리를 디밀었다는 것은 당신도 이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당신이 하듯 부드럽게 쓰담듬었고, 랑이 장난치곤 하는 것처럼 개구지게 헝클었다. 친구라는 사이가 주는 감정이 이런 것이었던가 랑은 기억 여행을 떠나려다,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응, 약속. 어기면 다른 팀이나 다른 선수 응원해버릴거야~. (랑은 엄지 도장까지 찍고, 약속의 증표로 얽힌 손가락이 풀리기 전에 가볍게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말. 당신을 약속을 어기지 않으리라 믿음과 약속이 만에 하나 어겨지더라도 저 말을 이행할 리 없다는 가벼움.)
뭐가 혹시나야- 나한테 뛰어온다며. 같이 있어야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당신이 해주었던 말. 그 말을 고스란히 당신을 놀리는데 이용해먹어 꺄륵거리는데 삼매경이었다가, 뒤늦게 차곡차곡 개어진 담요를 받았다. 랑은 제자리 의자 위에 그 담요를 올려두고 의자를 밀어넣었다.) 이거 갖고 뭘~. 가자!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당신과 팔짱을 낀다. 손를 잡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가 되고 마는데, 랑은 정말로 별 생각이 없었다. 팔짱을 꼭 끼고서 당신을 바라본다.)
꽃향기 나는 걸 뿌린 적은 없는데. (현민은 조금 당황하며 다시 자기 냄새를 맡아본다. 의외로 그는 이런 은유를 못 알아들으니, 어느 정도의 땀냄새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해주는 게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일단 지금 랑이 현민의 냄새 때문에 불쾌하다거나 한 건 아니라는 것은 전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모르겠어.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말해주고 싶어. (랑의 부드럽고 때론 짓궂은 손길에도 현민은 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까지 감고서는 랑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다. 그의 머리가 조금 더 길었더라면 머리를 땋으며 놀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이 정도 길이면-그는 곱슬머리였기에 보기보다 모발이 길었다-짧게나마 브레이드를 땋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나중에 좀더 느긋하게 쓰다듬어볼 수 있을 때 이런저런 장난을 더 쳐볼 수 있을지도. 미안한 사람, 고마운 사람. 하나씩 늘려나가보자. 반가운 사람. 좋은 사람. 친구이면서 동시에 친구보다 소중한 어떤 존재.)
(왠지 구름의 끄트머리를 손끝에 부드럽게 거머쥔 느낌이라, 현민은 손끝에 쥐여 흔들리는 한참 작은 랑의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뛰어온다며- 하는 말에 랑을 가만히 바라본다. 얼굴의 홍조는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어째 랑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반응. 부끄러움보다는, 애정에 조금 더 잠겨있는 표정.) 그렇구나. (하고 현민은 담요를 건네주었다. 랑의 다음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잡자고 내민 손인데 손끝을 잡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면적에 따뜻한 체온이 닿아왔고, 현민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얼어버리고 말았다. ...오. 홍시가 아주 잘 익었다. 놀려먹으려고 한 말보다 이게 더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홍시처럼 됐는데, 자신의 팔을 꼭 끼고 있는 랑을 보고 뭐라 하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던 현민은... 기계처럼 뻣뻣하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끼기긱 소리라도 날 것처럼.) 응, 가자. (이런 쑥맥인 주제에 데이트라는 말은 용케도 꺼냈다.)
(반에서 나오자, 아까의 경로를 되짚어서, 축구장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마련되어 있는 B관 1층의 축구부 라커룸까지 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확실히 다른 아이들은 다 하교했거나, 자기 교실이나 부실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라커룸까지 오는 길에 따로 누군가를 마주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랑의 비유를 당신이 이해하지 못 했고, 랑은 다시 설명하지 않았다. 짓궂게 웃었다.) 진짜? 꽃향기 나는데~. 그럼 이건 무슨 향이야? (그러더니 답을 듣기도 전에 푸스스 웃음지었다. 장난인게 들켜버렸겠다. 당신이 꽃이라서 당신에게서 나는 향이 꽃향기라거나, 당신에게서 나는 향이 꽃처럼 향긋하다거나- 그렇게 이해해버린 당신이 부끄러워할까 꺼낸 얘기였다. 그런데 막상 소리내어보니 오글거리는 것 같아서, 웃으며 얼버무리고 당신이 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도록 했다.)
할머니 되기 전에는 알려줘~. 너도 나도 까먹으면 어떡해. (열입곱의 끄트머리, 스물도 되지 않아 어른이 되는게 한참 남은 것처럼만 느껴지는 나이. 확신할 수 없는 말이 한 번 더 뱉어졌다. 어른되면 할 타투를 보여주겠다- 다음으로는 할머니 되기 전에 당신이 무얼 부끄러워한 건지 알려주기까지. 당신이 보는 하늘에 랑이 숨은 구름은 점점 커진다. 그렇게 무거워져 아래로 가라앉아버릴까, 먹구름이 되어 한바탕 비를 쏟고 사라져버릴까. 아직은, 아직은 불투명하다.)
(그리고 랑은 얼굴을 붉혔다. 랑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상상을 해버렸고, 그 상상이 너무나도 헛된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얼굴을 여전히 붉게 띄우고 있는 당신이 애정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니 순간 착각할 수 밖에 없었다. 랑은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착각이라고 확신했다. 착각이 아니라고 해도 랑은 다시는-) 응, 그랬어. (붉혔던 뺨의 색은 흐려진다. 놀리려고 한 말인데 얼굴 붉힌 건 랑이 되었다. 예상 밖의 일은 하나 더 있다. 팔짱은 팔만 얽힐 뿐이다. 서로의 품에 서로의 팔이 닿아 온기가 더 많이 느껴지겠지만, 랑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랑은 당신을 안아보았고, 당신은 랑을 받아주었다. 그럼 괜찮다고 생각해버린다. 고개를 돌리길래 조그맣게 웃고서 당신의 어깨에 짧게 톡 기댔다. 온기와 함께 그만큼의 무게감도 느껴진다. 아주 잠시동안, 아주 잠깐동안 기댔다 떨어진다.)
다들 갔나 봐. (조용한 라커룸 앞에서 랑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당신은 라커룸에 들어가야고, 랑은 그런 당신에게 팔을 먼저 풀고서 손을 흔들었다. 이대로 가버릴 것처럼 구는데, 랑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의식했다.) 기다릴게, 다녀와- (그래서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