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은 상당히 건강하고 튼튼해, 잔병치레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 체온이 모자라서 몸이 떨리거나 하는 느낌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딱히 춥게 느껴지지도 않으니 걱정마- 하고 랑을 다독여줄 수도 있었으나 현민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랑의 으름장에 응수했다. 장난스러운 도발이 미소가 되어 현민의 얼굴에 걸렸다.)
내기라도 할래? 내가 일주일 이내로 감기 걸리면 네 말대로 진도에 한번 질질 끌려가주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멀쩡하면 데이트 한번 더 해줘.
(현민은 축구부원들과 꽤 원만한 인간관계와 돈독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짓궂은 놈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한 애들끼리 장난이란 걸 아니까. 그 와중에도, 현민은 랑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내심 기뻤다... 그래서 현민은 최대한 티나지 않기 위해 평소다운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려 무진 애쓰며, 랑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정도 장난 갖고 빈정상할 사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친한 것도 친한 거지만 그런 걸로 빈정이 상하거나 빈정상할 정도의 장난을 쳐서야, 11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축구부 팀원으로서는 실격이다. 현민은 걱정말라는 듯이 랑의 머리를 한번 살짝 헝클어놓고는 다시 쓸어서 정리해주곤 손을 떼는 것이다... 그러다가 랑에게 손을 쏙 잡혔다.)
──────!── 그────
(손을 더럭 붙잡는 랑의 모습에서, 현민은 그만 어젯밤 꿈을 선명하게 떠올려버리고 만 것이다. 어제 저녁의 그 가로등 아래에서, 랑과 이렇게 손을 마주 꼬옥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는 꿈이었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시리고 애틋한 눈빛이 생생했다. 결과적으로 현민의 얼굴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얼씨구, 손만 잡아도 얼굴에 홍시 농사가 풍년인데 데이트가 뭐 어쩌고 저째?)
(감기로 으름장 놔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말 다음으로, 그것을 조건으로 걸어 데이트 내기. 랑은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당신의 자신만만한 멘트하며 저 미소까지, 당신은 질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있는게 분명했다. 이 내기에 응하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당신과 한 번 더 데이트를 하게 될 것 같다. 이까지 생각이 닿으면, 이제 랑은 아무것도 모른 척 자신이 원하는 선택지에 따라 내기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으면 된다. 데이트가 하고 싶다면 내기에 응하고, 하기 싫다면 응하지 않고. 랑은 이 선택권을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도록 물어보았다.) 나랑- 데이트 한번 더 하고 싶어? (물어보고 있지만 사실 대답은 어느정도 알았다. 데이트하고 싶어서 이길 자신 있는 내기를 걸고, 내기에 이겼을 때의 보상을 데이트로 한 것일테니까. 그래도 당신의 목소리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랑은 대답을 피하지 말란 듯 당신과 눈을 꼭 맞추면서 물어보았고, 물음표를 찍을 때 답을 재촉하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인다.)
(응- 말꼬리를 길게 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에 수긍한다고, 더 걱정하지 않겠다며. 그러고보면 같이 지낸 시간은 분명 랑보다 축구부원들이 더 길 것이다. 랑은 괜한 걱정을 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있어 친한 사람은 분명 축구부일테니까. 그렇다고 다음부터 이러지 않지는 않을테다. 랑은 늘 그랬듯이 구름같다.)
싫어? (당신의 반응을 잘 모르겠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싫어서인가 싶은데, 얼굴을 붉히는 건 싫어서가 아닌 거 같다. 손을 잡은게 부끄러워서 싫다고조차 말 못하는 것일까봐 물어보았다. 랑은 당신이 조금 특별해지는게 부담스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곧잘 놀라는 랑이 당신의 손에 놀라지 않겠다는 건 랑에게도 당신에게도 충분히 특별한 일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랑이 가볍게 다가가고 멀어질 때마다 요동치는게 한눈에 보이던 당신인데, 이렇게 '친구'와 같은 의미가 더해지기 시작하면 무거울까봐서. 당신이 오겠다고, 뛰어오겠다고 했으니 랑이 한 발자국 다가가면 거리가 확 좁혀지는 것 같아서 싫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어보는 목소리는 작았는데 크게 물어보지 못한 이유는 거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갈아입을 때까지 여기서 서 있을 수도 없잖아~. (당신의 손을 잡고 있으면 평범한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래도 보폭 차이 때문에 당신이 답답할까 싶어서 걷다가 한 번 큰 보폭을 디뎠다.) 이만큼이면 너랑 비슷할까? (그래도 매번 걸음을 이만큼 큰 보폭으로는 못 걷겠다. 랑은 큰 보폭으로 한 번 걸어보고는 쿡쿡 웃었다. 그러다 교실 앞에 도착하면,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맞추고서 자물쇠를 풀었다.)
(대답을 피하지 말라는 듯 눈을 꼭 맞추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며 건네어진 싫어? 하는 질문. 현민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필한 게 충분치가 않았나? 현민은 눈을 피하지 않고 랑의 새벽 구름 같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앞으로 쭉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냥, 조금... 쑥스러울 뿐이야... 그러니까, 싫지 않다고. 좋다고. 좋아해. 너랑 같이 있는 거.
(그의 얼굴은 온통 붉었으나, 그럼에도 눈은 흔들림없이 랑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한꺼번에 자신의 쑥스러움 퓨즈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치를 한참 넘은 발언들을 마구마구 쏟아낸 현민은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두 귀에서 스팀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숨을 고르고 나서, 현민은 눈을 뜨고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말해준 게 충분치 않은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 때마다 물어봐. 계속 똑같은 대답을 해줄 거니까.
(그 자리에 서 있어도 좋다. 다가와도 좋다. 물러서면 물러선 만큼 더 다가갈 생각이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이상한 가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감기에 안 걸릴 자신은 있다고 했지만, 감기에 안 걸리는 대신에 다른 엉뚱한 병에 그것도 아주 호되게 걸려버리고 만 모양이다.)
...뭐, 그래. 가자.
(현민은 랑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교실로 향했다. 걸음걸이를 평소보다 조금 빨리 하며, 이따금 보폭을 크게 내딛는 모습에도 현민은 당황하지 않고 용케 발을 맞춰 따라온다. 저 발재간은 축구부라서 그런 걸까? 현민은 당신이 교실문을 열 때까지 당신 옆에서 같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정도 알고 있던 답과 같은 답이다. 조금은 다른 부분은 있었다. 당신이 너무 빨갛다는 점. 데이트도 긍정. 싫냐는 대답에는 부정. 구름은 하늘에 있을때나 구름이고, 땅으로 내려오면 안개라는 이름을 가진다. 랑은 안개 속에서 당신이 겁나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계속 구름 속에 숨어있었는데 당신이 땅으로 내려와도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주는 것만 같다. 랑은 아직 구름 속에 숨어있지만, 땅에 있는 당신을 쏙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가끔은 웃어주고 숨는 것은 계속 숨어있기만 하는 것이랑 명백히 다른 것이다.)
고마워. (당신의 부끄럼 가득어린 그 대답이 좋아서 웃었다. 비록 마주 좋아한다고 답하지는 못하겠으면서 당신의 대답으로 인해 기쁘다는게 전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당신처럼 솔직하게 말로서 마음을 고백하지 않는 랑은 다른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고, 생각나는 것은 하나였다. 처음 당신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 이미 랑은 당신의 품에 들어갔었다. 들이박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만 랑은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당신은 부끄러워할 것 같지만 랑은 부끄러움에 얼굴 붉힐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을 포옥 끌어안았다. 조심스럽지는 않았지만 살포시 당신을 끌어안더니 품에 톡 기댄다. 팔락이던 담요에서 나던 향이, 곰인형에 살짝 남기고 간 향이 물씬 당신의 품에 닿았다.) 부끄러울텐데 미안- 근데 나 엄청 기뻐서.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부끄러움만 있지 않다. 랑은 당신처럼 새빨갛지는 않더라도 분홍빛 뺨을 하고서 웃었다. 그러고서 당신의 품에서 꼭 닿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신은 계속 더 부끄러워할테니까, 랑은 살포시 안은 잠깐 동안이라도 이 마음이 전해졌길 바라면서 금방 떨어졌다.) 충분하다고 생각해도 물어보고 싶어- 그래도 돼? (당신이 건네주는 온기가 좋아서 물어본다.)
(자물쇠가 달칵 열리면 교실문를 열고, 고리에 자물쇠를 걸어둔다.) 응, 내가 제일 일찍 오고~ 제일 늦게 가고~. (교실로 들어간 랑은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가더니 담요부터 찾았다. 의자에 차곡 개어져있던 담요를 집어 펼치니, 랑보다 당연히 컸고 당신도 넉넉히 두를 크기였다.)
랑이가 다른 남자애 손 잡고 가고 있는데 우연히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이 많아지는 현민이 다가오는 시합 앞에서 현민이는 랑이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예민해져 있는 현민이에게 또 랑이 갖고 고약한 농담을 해버린 축구부원 다음날 아침 학교에 "교내 쌍방폭행 사유로 교칙에 의거 이하 학생 2명을 정학에 처함. 채OO 박OO" 라는 공고가 나붙게 되며, 팀의 허리축이 되는 선수 두 명이 빠져버린 학교 축구팀은 예비선수를 투입했으나, 지역대항전에서 약팀으로 인식되고 있던 상대학교를 만나 1:1 상태로 연장전까지 끌려가는 뜻밖의 고전을 하다가 승부차기에서 쐐기골을 맞는 충격적인 석패를 겪게 되고...
같은 우울한 이야기는 만약의 이야기로 남겨두고 현민이 자리에서 랑이가 덩그러니 자고 있으면 현민이는 아마 옆에서 쭈그려앉아서 랑이 자는 걸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 다른 애들이 오는 기척이 나면 호닥닥 랑이 깨우고... 랑이가 남긴 포스트잇 같은 건 일단 없어져있는데 책상 아래쪽에 손넣어보면 새로 산 것 같은 수첩이 있고 거기다가 랑이가 남긴 낙서 포스트잇 차곡차곡 모아놓은
현민이가 거리두면 랑이는 현민이도 결국은- 같은 생각이나 하고 거리두면 두는대로 있을텐데..... 상황 더 악화되겠지 하지만 공고보면 현민이 찾아갈거야 무슨일인지 괜찮은지 ㅜ.ㅜ.... 자기 때문인거 알면 너랑 가까워지질 말 걸 그랬다고 할 거 같다 정학이 작은 일도 아니고 축구부 명성도 꺾이고..... 너무 맵다
(현민은 개의치 않았다. 때로는 안개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기엔 많은 결심을 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얼굴이 터져나갈 듯이 빨갛더라도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랑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은 이 곳에 있다고. 계속 너에게로 나아가고 있다고. ...그런 소년에게, 랑은 방글방글 웃어주었다. 폭, 하고 덥석 그의 품에 몸을 던지면, 단단한 근육질로 짜여있는 몸뚱아리가 그 험악한 야성미에 걸맞지 않게 수줍은 체온을 머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코끝에 걸리는 데오도란트와 스킨 냄새. 그리고 당신이 예상한 대로, 소년은 뭐라 말도 못 하는 어버버 상태가 되었다. 외간 남자한테 뭐 하는 거냐느니, 열나게 뛰고 와서 옷도 못 갈아입어서 땀냄새가 날 텐데 괜찮겠냐느니,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느니... 하는 말들이 입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얼레벌레.) (현민은 고장난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품 안에 쏙 안겨들어온 랑을 조심스레 꼭 마주안아주는 것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대신했다. 그리곤 랑을 놓아준다.)
얼마든지 그래도 돼.
(온통 수줍고 간질간질하고 몽실몽실한 낯선 감정들 때문에 빨갛게 된 얼굴이지만, 현민은 뭔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랑을 마주보았다.)
대신에, 나중에는 나도 물어볼 거야.
(그러고서야 교실에 따라 들어간다.)
학원 같은 데는 안 다니고?
(그리고, 랑이 담요를 펼쳐보이자, 현민은 그제사 아까 어버버하느라 못 했던 말들 중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현민이가 이전에도 사람 좋아했다가 배신당한 경험이 몇 번 있어서, 이번에 랑이랑도 그렇게 되면 사회성 자체를 포기해버리고 히키코모리가 될 확률 매우 농후
이건 랑이가 향후 현민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알아보려고 한다면 알게 될 이야기지만, 예전에 따돌림도 자주 당하고, 힘센 애들한테 장난감 샌드백마냥 굴려지던 애가 있어서 현민이가 말도 걸어주고 다독여도 주면서 나름대로 친구처럼 살갑게 지내줬는데, 어느 날에는 그 애가 원래 자길 괴롭히던 놈에게 엄청 두들겨맞아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선생님이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고 다그치니까 그 놈 이름 대기는 무섭고 대충 만만한 현민이 탓으로 돌리면 대충 무마될 거라고 생각해서 현민이가 자길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현민이가 선생님한테 엄청나게 혼났던 적이 있어
과거사이기에 이미 한번 겪은 일입니다 그것도 중학교 3학년 작년에 따끈따끈하게 겪어본 배신
(마주 안아주는 손길에 랑은 살짝 놀랐다. 당신을 꼭 안아주고서 떨어지기만 할 줄 알았다. 당신이라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할 것 같았는데, 행동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랑은 당신의 품에서 나오고, 당신이 랑을 놓아줬을 때. 랑의 시선은 잠시 당신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내 곧 눈을 맞추고서 웃었지만. 욕심스러운 요청에 긍정이 돌아왔다. 긍정의 답이 기뻐서 눈웃음 짓다, 굳게 결심한 표정과 그 말을 듣고서는 짓궂게 웃는다.) 물면 아파~. (물어본다는 게 그게 아닌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이렇게나 새빨갛게 오른 당신을 보고도 정말이지 제멋대로 흘러가버린다.)
응, 교과서 위주로 공부합니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잘 모르는 학생들과 함께 수업받게 되는 학원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있고 말아서 꺼려졌다. 학교에서도 담임 선생님과 보건 선생님, 체육 선생님을 제외하고서는 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들끼리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그저 알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꼭 당부할 뿐이다. 알리고 싶지 않은 랑에게는 혹시를 대비해서라도 누군가와의 접촉을 최소화 하는게 나았다.) 응, 괜찮아. 나도 땀 흘려~. (랑은 당신에게 다가갔는데, 취하는 폼이 담요를 덮어주려는 건 아닌 것 같다. 당신의 앞에 바짝 서더니 담요를 쭉 당신의 뒤로 돌아 한 바퀴 둘렀다. 이미 안기도 했는데, 이렇게 반쯤 안는 것과 별다를 없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을 리가 없다. 무튼 랑은 당신의 허리춤에 빙 두른 담요를 말아넣어서 고정한다. 담요를 치마처럼 둘러 버렸다. 으레 또래 여자 아이들이 담요로 많이 하는 그것이다.) 쨘~. (아무래도 장난친 것이다. 뿌듯하게 웃어보이는 표정에 짓궂은 장난기를 숨기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