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다. 분명 다들 흩어지고 있었고, 분주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서 덥썩 축구장에 발을 들였고, 당신의 이름을 부른 거였는데 이 정적은 무엇인가. 랑은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더 다가가지 못 하고 우뚝 서고 말았다. 하면 안 될 짓을 해버린 것 같다는 짐작에 축구장 밖으로 돌아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분명 자신이 부른 건 현민 뿐인데 어째서 축구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설명이 필요한데 설명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당신도 랑이 걷다가 멈춘 것처럼, 일어나다 만 자세로 멈춰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라고는 당신 밖에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붉어진다. 당신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면서, 아까와는 다른 소란이 축구장에 번졌다.) (축구부원들이 어째 당신에게로 모여들었다. 순간 자신이 축구장에 들어선 것 때문에 당신이 혼나는 건가, 하는 착각이 1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모두의 입 모양을 읽을 수는 없으니 귀 기울여 들을 수 밖에 없었고, 소리가 들리긴 해도 여러 명의 것이라 복잡했지만 온전히 듣지 않아도 대화의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분위기가 무슨 분위기인지, 당신이 헤드락에 걸리고 마는 이유가 무엇인지 쯤이야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랑은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얼굴에 열이 올랐다는 걸 알았다. 분명 저 상황에 도움은 안 되겠다. 당신만큼이나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얀 피부는 작은 열기조차 돋보이게 했다. 귀 끝과 뺨을 붉혀버리고서 어쩌면 좋은지에 대하여 계속 고민하고 있으니 당신이 빠져나왔다.) (오늘 데이트를 하는 건 맞지만 그런 데이트는 아닌데, 그치- 하고 웃는게 나을까 고민했다. 아니면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장난 너무 심하다- 하고 웃는게 나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리고 랑은 이내 차라리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엉망진창이 된 머리와 분명 걸치고 있었던 것 같은 후드티를 손에 쥐고서 제게로 다가오는 당신을 보고서 그저 웃기만 했다. 부끄러워 웃는 것과 당신의 모습을 보고서 웃는 것이 뒤죽박죽 섞였다.) 내가 축구장에 왜 오겠어- 너 만나러 왔지. (정말 그 뿐인데, 축구장에서 만들어진 분위기가 이 몇마디에 마법을 건 것 같다. 랑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도 말을 끝내고서 얼굴을 조금 더 붉히고 말았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마법을 거는데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아, 아냐! 괜찮아. 그리고 축구부 유니폼 입은 거 멋지잖아. 진짜 선수들 같아. (마법이 걸린 건 앞선 문장들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이 순간에 계속 걸려있는 건지, 랑은 매우 곤란했다. 축구장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목도리를 하고 있는게 답답하고 더웠다.)
(축구부 부원들은 삼삼오오 갈라지기 시작했다. 으레히 그렇게 갈라지면서 뭉친 사람들끼리 떠들곤 하는 수다의 화제가 절반 정도는 랑과 현민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자. 현민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투덜댔다.)
기왕 유니폼을 보여줄 거면 좀더 깔끔하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현민도 그렇고, 랑도 온통 빨개져 있다. 서로 얼굴을 붉힌 소년과 소녀가 쭈뼛대면서 다가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만치에서 또 주접 한 마디가 슝 하고 날아왔다.)
"야 채현민 뭘 그렇게 쩔쩔매냐~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랑에게 다가오던 현민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접이 날아온 쪽을 홱 돌아보며 째려보았다. 자기가 잘 아는 자기 동기 목소리였기에, 그게 진짜로 자기 동기 목소리라는 걸 확인한 현민은 오만상을 쓰며 마주 소리질렀다.)
시끄러워, 멍청아!
(피부가 빨개졌음에도 차분하려 애쓰고 있던 현민의 표정마저 흔들렸다. 랑의 웃음에도 수줍다 못해 곤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현민은 어쩌지, 하는 듯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후드티를 랑이 볼 수 있도록 펼쳐들었다.)
배하랑. 이거 씌워줄 테니까, 우선은 도서관으로 가자. 좀 빨리 걸을 수 있겠어? 손 잡아줄게.
(이걸 씌우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현민은 손을 뻗어 랑의 어깨에 후드티를 씌워주고는 후드까지 랑의 머리에 깊숙히 눌러씌워 주었다. 그렇게 후드를 눌러쓰니, 주변의 시야가 한결 좁아지면서 주변의 소리도 조금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랑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꼭 잡고는, 도서관이 있는 A관 쪽으로 랑을 이끌기 시작했다. 멀리서 우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낯설고 당혹스런 마법은 차츰차츰 후드 너머로 등 뒤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또 보여주면 되니까- (투덜대는 목소리에 조그맣게 웃었다. 얼굴은 붉어졌고, 이 분위기에서 곤란한 것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당신과 있으면 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앞에서는 이 상황을 잠시 잊고 편하게 웃고 있었는데, 어디서 큰 목소리가 난다. 예기치 못한 소리에, 랑은 늘 소리에 신경을 쓰다보니 갑자기 나는 소리에는 깜짝 놀라버리고 만다. 심지어 그 말 또한 당황하기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랑은 몸을 흠칫 떨며 놀랐다. 그러고서 저 목소리는 당신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황한 채로 당신을 바라보니 오만상을 쓰고 있다. 한 마디 대꾸를 하려나 생각했고, 정답이었다.) 그렇게 소리지르다 목 상하겠다~. (랑은 분명 깜짝 놀랐었고 당황했다. 당신이 대꾸를 하리라 생각치 못했다면 당신의 목소리에도 놀라버렸을게 분명하다. 근데 예상에 맞아떨어진 당신의 반응에도 또 웃어버렸다. 예상한 상황을 맞추어서 나는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응? 응, 손 잡으면 상관없는데- (그러면 너 더 놀림받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당신이 펼쳐서 보여준 후드티가 씌워지는게 빨랐다. 후드도 머리 위에 씌워지고, 당신의 손이 잡아온다. 랑도 당신의 손을 꼭 잡았고 당신이 내는 속도에 맞춰서 발을 옮겼다. 이래서야 도서관에서 굳이 당신을 마중 나온 이유가 없어지고 마는데, 이상하게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상황 자체가 즐거운 것 같다. 그래서 랑은 생각해보았다. 아까같은 상황에 또 처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말들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별로다. 그리고 분명 당신은 오늘 일로 인해 축구부에서 놀림받을 일이 늘어날 것이다. 안 좋은 것 뿐인데, 왜 당신이 손을 이끌고 있는 지금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다.)
(현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랑의 손을 잡았다. 기왕 놀림거리가 된 것, 손 마주쥐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목격담 하나 정도 더 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예상 외의 소란이 질색인 것은 현민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와락 지른 고함에 필요 이상의 힘이 실려있었던 것은 비단 부끄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더플백을 쥐고, 한 손에는 랑의 손을 쥐고 이끌며 현민은 말했다.)
적어도 지금 여긴 아냐.
(잠시 뒤, A관 건물의 문이 랑의 등 뒤로 닫히고, 위익 하고 바람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닫히자 언제 그렇게 소란스러웠냐는 듯 축구장과 운동장에서의 소음이 훅 잦아들고 학생들이 없는 고요한 복도만이 남는다. 확실히, 앞으로 축구부에서 나도는 농담거리들 중에 자신과 랑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기야 할 것이다.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농담이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겪을 필요 없는 일들을 제쳐놓고 나니... 사랑의 도피만이 남았다.)
일단 라커룸에서 사람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갈아입고 싶은데... 떠오르는 데가 도서관밖에 없네. 뭐, 도서관이 아니라도 어디든 가자. 까짓거 안 갈아입고 그냥 유니폼 차림으로 집에 가도 되고.
(실제로 축구부원들 중에는 이후 일정이 없고 락커룸에 들리기 귀찮으면 그냥 유니폼 차림으로 귀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A관 건물까지 들어오고 나니 조용해짐과 동시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까 왜 그렇게 부끄러웠던건지 의문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여지라고는 없었던 것 같은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굴의 열기도 식어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만드는게 정말 마법같이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게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당신과 같이 있어서 즐거운 것 하나는 마법이 아니라 진실인 것 같다.) 안 돼, 그것만 입고 가면 추워- 유니폼 두껍지도 않잖아! 아래는 반바지고- (랑은 당신이 씌워주었던 후드티를 후드부터 훌렁 벗어 당신에게로 건넨다. 목도리도 훌렁 목에서 푸르더니 같이 건넨다. 반바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안 추워? 맞다, 아까 안 다쳤지? (헤드락 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던 당신이 축구부원들과 툭탁거린 것을 다 보았으니 그것에 대한 걱정이다. 그것에 대한 걱정을 하자니, 앞으로 당신이 축구부에서 곤란할 것도 문제고 당신에게 미안함이 커졌다.) 훈련 끝난 거 같아서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 생각나서 보러 간 거였는데.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문제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풀이 꺽였다. 미안해- 하고 덧붙은 목소리가 참 시무룩하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하얗고 깨끗하게 가라앉는 랑의 얼굴을 현민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열의 흔적이 남아, 아까처럼 홍시풍년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랑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정도로는 붉다. 왜인지 아깝고 섭섭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하얀 피부 위에 한가득 만발하는 것만 같던 그 열꽃들이 너무 예뻤는데, 덧없다는 말마저 붙이기 힘들 정도로 말끔히 사라져버린 것이. 그러나 현민은 이내 잡생각을 떨치기로 했다. 열꽃을 띄운 랑은 어쩔 줄 몰라하는 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랑이 불안해하는 건, 더욱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
(갈 길이 한참 멀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슬프다.)
(현민은 후드티와 목도리를 받아들었다. 후드티는 걸쳐입고 지퍼를 지익 올렸지만, 목도리는 랑의 목에 다시 얹어주었다.)
아직- 훈련 때 난 열이 몸에 많이 남아있어서 괜찮아. 이 안에 외투가 한 벌 더 있고. 락커룸까지 가기 귀찮으면 화장실에서 갈아입어도 그만이고.
(그는 더플백을 흔들어보인다. 랑이 시무룩하게 덧붙인 질문에 현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친 데는 없어. 그리고 걔들이 날 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장난삼아 놀리는 건데 뭐. 별일 아냐.
(현민의 손이 들려올라온다. 랑의 시선 앞을 거쳐, 랑의 정수리에 올라 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삭삭 쓰다듬는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뗀다. 그러나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 채다. 시선도 맞추지 못하고 두어 번 더 시도를 하고 나서야, 모기같은 목소리로나마 말이 나온다. 물론 복도는 아주 조용해서 그 정도 목소리도 충분히 랑의 귀에 전해질 만했고, 입술 모양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기에...)
(후드티는 받아주고, 목도리는 다시 랑에게로 돌아왔다. 랑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을 뾰루퉁해져서 쳐다보았다. 자신은 그래도 셔츠에 조끼, 자켓까지 다 입고 있어서 아무래도 당신이 더 얇게 입은 듯 하니까. 외투가 가방 안에 하나 더 입있다니, 툴툴대는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감기 걸리면 진도 빨리 뺄거야. (대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전교 1n등이 진도를 빨리 뺀다는데, 그 대상이 1~2교시 수업을 곧잘 빼먹는 축구부를 향했다. 어제처럼 쉬다가 하자고 해도 노는 일은 없이 10분만 깔끔한 휴식을 취하게 할 것이다. 랑은 이 으름장이 효과가 톡톡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친 데 없으면 다행인데... 그래도. 계속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고. (랑은 축구부원들을 만날 일이라고 해봤자, 오늘처럼 당신을 보겠다고 축구부가 훈련중일때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없을 일이다. 복도에서 엇갈려 마주쳐도 알아볼 수는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당신은 축구부라서 지겹게 볼 사이인지라, 까지 생각하고 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일 아니라고 했으니까 혼자 이러지 말자는 의미에서 저은 거였다. 그러고보니 시야에 당신의 손이 있다. 랑은 시야에서 위로 사라지는 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서 웃었다.) (쓰다듬는 손길이 이렇게 부드럽고 조심스러운데, 랑은 당신에게 마음을 좀 더 열기로 했다. 분명 아까 후드티를 보여준 것도 그런 배려에서 비롯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붉히고서 말하려고 몇 번 정도 다시 시도해서 낸 목소리. 입술 모양도 읽었고, 제대로 듣기도 했다. 당신의 손이 쓰다듬고서 떠나기 전에 그 손을 붙잡았다.) 이 손에는 안 놀랄려고 해볼게. (친구라는 이름 아래 있는 당신이고, 당신이 얼마나 상냥한지는 충분히 알았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에도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당신의 손길을 믿기로 했다. 당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모르는 중에 쓰다듬어도 정도에 안 놀랄 수 있을 것 같다.) 반으로 가자. 너 담요 덮어줄래- (외투가 있다고 해도 반바지는 어떻게 못하니 신경쓰이나 보다. 담요는 반에 있었고, 랑이 늘 쓰는 그 담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