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었다는 말은 대답이 되고 말았다. 알고 있었는데도 당신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 이래도 나랑 있고 싶냐고 물었던 랑의 물음은 바보 같았던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생각보다 더 부끄럼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용기있는 사람이다. 넘어지는게 무섭지 않은 사람.) (뛰어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랑은 당신의 방에서 그랬듯이 웃는다.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기꺼이 마음을 말해준 것도 하나같이 고마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 고마움이 넘치는 와중에 당신이 뛰어가겠다고 까지 하니 그게 귀여워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붉혔던 온기가 조금은 남아있는 얼굴로 평범히 웃는다.) 그럼 비밀 하나 알려줄게. (이것 또한 자업자득이다. 처음 자업자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보다는 그 단어의 뉘앙스가 조금 달라졌지만 랑은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당신이 자신에게로 오는 길에, 뛰어오는 길에 헤매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부터 용기를 내었다. 당신이 낸 용기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랑에게는 심호흡이 필요한 일이었다.) 현민아. (데자뷰가 느껴진다면 착각이 아니다. 당신을 부르고서 랑은 당신의 귓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속삭였다.) 난 이런 거 못해. (배시시 웃음 짓는 것까지 똑같았다. 다른 점은 이 두루뭉실한 말이 가르키는 것이 달라졌단 것인데, 랑은 속삭이는 행동 자체를 뜻하고서 하는 말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선 내에서 반복되는 루프물과도 같은 순간. 같은 일이 벌어지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다른 순간. 같은 말, 다른 의미. 단지 랑이 아까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했을 뿐이지만, 현민에게는 왜인지 그게 그렇게 다가왔다.) -네가 못하는 그게 정확히 뭔지 몰라. (그는 실토했다.) 그렇지만 난 개의치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야. 네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거고. (그리고는 다음 곡을 재생했다. 핸드폰의 스피커에서, 다음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말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겁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랑에게는 그저 다른 것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약점이 되고 만다. 말하기로 마음 먹었으면서 두루뭉실하게 말했던 이유.) 응, 내가 잘 말 안 해줬잖아. (랑은 웃었다. 언젠가 정말로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무렇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은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이쪽 귀가 안 들려. (피어싱을 뚫어놓은 쪽의 귀다. 옆머리가 내려와 가리고 있는 귀를 보이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듯 들어올린다. 소리에 있어서 랑의 세계는 왼쪽 뿐이다. 그리고서 다시 머리카락을 내려 감춘다.) 이쪽 귀도 다른 사람들만큼 잘 들리는 건 아냐. (이번에는 옆머리를 땋아서 넘긴 쪽의 귀다. 랑은 이미 드러나있는 귀를 드러나게 할 수는 없고, 땋아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불편한게 아니라는 거야. 방금 노래도, 아까 쓰다듬은 것도. (다 말해버렸다. 말하기 싫은 비밀이지만, 그마저도 다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니 기분은 편했다. 랑은 손에 검지를 가져다놓고 입꼬리를 올린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고, 이건 다 비밀이야. (한 번 또 웃어보인 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다음 노래에 귀 기울였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친구가 있는 학교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떠올려보았다. 랑은 문득 폰을 바라보았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채부끄럼쟁이. 당신을 전화번호부에 별명으로 저장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가자. 이러다 여기서 밤새겠다.
...... (현민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랑에 대한─뭐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어떤 마음을 훼손할 요인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일이기도 했다.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랑을 너무 배려심없이 대해오지 않았었나. 결론이 급작스레 주어지자 현민의 머릿속에 무심결에 남아있던 단서들이 차곡차곡 연결된다. 균형감각이 좋지 않아 자주 넘어진다던가, 시선 밖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다가오면 깜짝 놀란다거나, 귀에 무언가 닿는 걸 거부한다거나... 그래서였구나. 현민은 문득 아까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랑의 귀에 이어폰을 들이댄 걸 떠올렸다. 표정이 침울해진다. 그 동안 자신의 말을 한 번도 되묻지 않고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랑은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민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과 한 마디 하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소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흡사 푸들이 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모양새다. 그렇지만, 현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렇지만 나 그 말을 듣기 전처럼 널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심해야 할 부분은 조심하고, 신경쓸 게 있으면 신경쓰게 될 거야. 그렇지만 너한테 갈 거라는 내 말을 바꿀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집에 가려던 길, 마저 바래다줄게. 너도 내일 데이트, 같이 가줘.
응. 가자. 이야기가... 길어졌네. (현민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랑의 손을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꼭 쥐어본다.)
그러다 울겠다~. 나 이제 아주머니한테 혼나는거야? (랑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분명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약간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겠지만, 랑은 그렇지 않기 위해서 연습했다. 당신은 지금 미안해하고 있을까 싶지만, 그 이유없는 미안함은 닿을 곳이 없다. 오히려 랑은 당신을 놀리는 말과 함께 방긋 웃었다.) 응- 그러면 아파- (당신이 아랫입술을 깨문 것을 보더니 손을 뻗었다. 볼을 꼬집으려고 한건데, 그러면 입술을 못 깨물지 않을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입술을 깨물지 않게 하려던 것 뿐이니 아프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꼬집고 있던 볼은 이어지는 당신의 말을 듣을 때도 쭉 꼬집히고 있었는데, 다 듣고나니 볼을 쭉 당겨 버린다.) 배려는 고맙지만, 배려를 넘으면 그때는 이렇게 꼬집을거야. (랑은 당신이 친구이길 바라고, 보호자가 되길 원치 않았다. 말하기 겁나던 이유들 중에는 분명 이런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지금 먼저 주의를 건넨다. 그렇게 엄하게 말하는 것처럼 하더니 말을 끝내면 꼬집던 볼을 놓았다.) 안 그럴 거라고 믿지만! 많이 아파? 미안해- (꼬집고 있던 부분을 살짝 쓰다듬는다.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나 집에 혼자 간다고도, 내일 데이트 안 간다고도 말 안 했는데~. (랑은 먼저 자신의 집 쪽으로 움직였다. 당신보다 작고 느린 그 보폭의 이유를 알게되어서 신경쓰이지 않았으면 했다. 아침처럼 그저 걸음이 느리니까 보폭을 맞춰주면 하고서 바랐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울긴 뭐가... (꼭 꼬집어서 쭉 늘리니 탄탄하게 늘어난다. 탄력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좀더 타이트한 느낌. ...평소라면 당황해서 또 얼굴을 붉히거나 툴툴대는 소리를 하거나 둘 다 할 만한 스킨쉽이었지만, 함께 건네어진 말이 말이라 현민은 그렇게 가벼운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배려심이 어디까지가 배려심이고 어디까지가 간섭인지 아직 그는 미숙했다. 랑이 뺨을 탁 놓고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건네는 말에 현민은 있는 대로 솔직히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굴지는 않겠지만, 어디까지가 배려고 어디까지가 간섭이 될지 그 경계선을 정확히 몰라. 그래서 앞으로 뺨 꼬집을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해. 그러니까 그런 때가 오면 사정없이 꼬집어야 돼.
(현민은 집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보폭은, 랑이 아침에 느꼈던 보폭 그대로였다. 랑의 보조에 맞춘 좁고 느린 보폭. 미숙한 점이 많아 스스로가 불안한 현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해왔던 배려를 계속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집에 혼자 간다고도 데이트 안 간다고도 안 했는데- 하는 말에, 현민은 대답했다.)
* TMI 현민이도 대충 랑이 체육시간 빠지는 이유를 짐작할 것 같으니 추가설명 랑이는 오른쪽 귀가 안 들리니까 모든 소리가 왼쪽 귀에서 들려 그래서 오른쪽에서 피해! 라고 소리쳐도 왼쪽에서 들리니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여 아니면 어느쪽으로 피해야하나 확인하려다 이미 늦어버리고 사고나기 쉽지 균형감각 떨어지는 것도 한몫해 걷는 것도 느리게 하는 정도니까 일반인들 속도로 걸으면 걷다가 잠시 멈춰서 균형을 잡아야 해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체육 시간에 수업하는 건 힘들어
>>588 운동장, 축구장, 농구장, 강당 다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축구부라고 축구장만 쓰는 건 아니고, 모의경기가 아니라 체력훈련의 경우에는 운동장이나 강당에서 진행하지만 역시 축구장이 좋으려나 인조잔디나마 잔디도 깔려있고(상관없음)
서프라이즈로 오면 그에 걸맞은 반응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마 축구장에서 모의경기 수비훈련 끝난 직후일 테고 현민이는 다른 축구부원들이랑 함께 체육선생님께 피드백받고 있을 거야 랑이가 도착할 때쯤에는 피드백 끝나고 오늘은 해산! 이라는 말을 듣고 삼삼오오 흩어지는 축구부원들 사이에서 자기 짐 챙기고 있겠네
이건 도움이되라는 TMI 왼쪽 귀가 어느 정도 들리냐면 일상대화는 ok 그래도 연습 겸 혹시모를 상황을 대비해 입모양을 보고 있기는 해 목소리가 원래 작거나 속삭거리는 경우는 꼭 입모양을 읽어야해 이어폰은 남들보다 볼륨이 많이 커야합니다 전화할때는 들리긴하지만 애매모호 헷갈리는 단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