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은 아직 도서관에 있어야할 시간이다. 당신을 기다리면서 공부를 하고 있어야할 시간이지만 축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 첫번째 이유로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로 인해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아서가 있다. 데이트를 한다고 하면 뭘 하는지만 생각해도 해본적이 없으니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로는 당신이 랑에게로 오겠다고 한 말이 어젯밤부터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랑은 당신은 모를테지만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어차피 공부도 안 되고, 당신은 축구부 훈련 때문에 밖에 있으니 자신이 찾아가는게 하교가 빠를거고, 굳이 훈련을 하고 피곤할 당신이 도서관까지 번거롭게 왔다갈 필요도 없고,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해줬으니까 라는 여러 합리화가 붙었다. 그렇게 이유를 여러개 붙이지 않으면 당신을 보러 축구장으로 간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못견딜 것 같았다.) (어제 외투를 당신에 집에 두고서 와버렸기 때문에 오늘은 마땅히 외투가 없었다. 대신 자켓까지 꼭 입고서 목도리를 하고 나왔다. 당신의 후리스는 오늘 아침 등교전에 세탁에 건조를 돌린 채로 얌전히 집에 있다. 이따 데이트에서 돌려주면 되지 않을까. 축구장으로 가는 내내 당신과 관련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축구장을 가는 일도 드문 일이다. 구경만 해봤다. 가까이 갈수록 축구장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랑은 넌 여기를 가로질러 뛰어다니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만 뛰어다니고 있지는 않았다. 타이밍 좋게 왔는지 흩어지는 축구부원들이 보였다. 아마도 오늘 훈련은 끝난 모양이다. 아직 선생님이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면 하얀 선 위로 발을 못 넘겼을텐데, 성큼 넘어버린다. 당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름을 불렀다. 목도리가 입가까지 올라와서 한 손으로는 목도리를 내렸고, 다른 한 손은 당신에게로 흔들었다.) 현민아- (깜짝 놀라지 않을까 기대를 하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서 미소지었다.)
선생님 아직 현민이가 경기뛰는 장면 못보셨잖아요 랑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현민이 못보셨잖아요 겨울 주말에 늦잠자다가 이불 사이에서 ( 3 3) 상태로 밍기적거리는 현민이도 못보셨잖아요 봄에 벚꽃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다리 흔들며 기타치는 현민이도 못보셨잖아요 여름에 현민이 수영복차림도 보셔야죠
>>607 학교 축구팀 지역결승전 응원하러 나가서 현민이만 바라보는 랑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밴드 형들이랑 인사 나누고 기타 이고 내려왔더니 웃으면서 기다리는 랑이 겨울 주말에 푸들된 현민이 몰골을 보면서 함박웃음지으며 흔들어 깨우는 랑이 벚꽃나무 그늘 아래서 현민이 뒤 잡고 눈 샥 가리면서 누구게~ 하는 랑이 여름에 수영복 랑ㅇ... (체포당함)
(역대급으로 체육선생님의 피드백이 귀에 안 들어오는 날이었다. 도서관이 있는 A관 쪽을 힐끔힐끔 보고, 시계를 보고, 분침이 원래 저렇게 느려터진 놈이었나 속으로 불평도 해보고, 채현민 니 포지션 이야기 아니라고 안 듣냐? 하는 체육선생님의 야단도 맞고 나서야 사후강평이 끝났다. 원래같으면 채현민은 다른 축구부원들이 다 빠져나갈 때, 체육선생님을 따라 사후강평과 전술강의에 사용한 화이트보드나 운동용품 따위를 치워드리는 일을 도와드린 다음에 느긋하게 자기 짐을 챙겨 떠나곤 했다. 축구부 활동이 끝난 직후의 라커룸은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가 되기 마련이었고, 현민은 그걸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선생님을 도와드리며 다른 축구부원들이 얼추 옷 갈아입고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는 평소의 관례를 무시하고 빨리 라커룸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급히 챙겼다. 아니, 챙기려고 일어서는 참이었다. 그 때였다. 현민아- 하고 명랑하게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퍼진 건.)
(저마다 빨리 짐 챙기고 하교할 생각에 어수선하던 축구장이, 잠깐 멈췄다.)
(현민은 어정쩡하게 일어나다 만 자세로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체육 선생님은 랑과 현민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모양으로 '저놈 저거 어디다가 정신머리를 팔고 있나 했다' 하고 탄식을 했고, 축구부원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흩어지려다 말고 뜬금없이 축구장을 찾아온 당돌한 1학년생을 보고 잠깐 상황판단을 했다. 이 잠깐의 침묵, 교실에서 다함께 떠들다가 일순간 별 이유도 없이 조용해지는 침묵. 유럽권에선 이걸 보고 천사가 지나갔다고 하던가? 그리고, 현민의 얼굴이 보기좋은 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그 순간...)
"이─여어어얼~ 채현민~~" "야 넌 주장한테 보고도 안 하고 연애를" "와 찐쇼크네 무슨 돌하르방처럼 해가지고 연애랑은 담쌓을것처럼 하던 놈이" "채현민 얼굴 빨개진닼ㅋㅋㅋㅋ 와 사람 얼굴이 이렇게까지 빨개지냐"
(현민의 곁에 있던 축구부원 두셋이 현민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생각해보라. 오늘은 11월 11일이다. 빼빼로데이에 자기 부원을 당돌하게 찾아온 여자애? 빼빼로데이에 데이트를 하는데 연인이 아닐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축구부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축구부원들 중에서도 솔로가 아닌 축구부원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그런 애인들은 보통 축구장 밖이나 자기 반, 아니면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에서 상대를 기다리게 마련이고, 축구부원들이 다 집합해있는 축구장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자기 애인(?) 이름을 덜컥 불러버리는 건 드문 센세이션이라 할 만했다.)
아니, 좀 빠져봐 미친 놈들아... 그런 거 아냐... 주장님 저 가보겠습니다. 아니 한번만 놔주십쇼...
(현민은 몇 차례의 거친 몸싸움 끝에 장난어린 악우들의 무수한 헤드락의 요청을 뚫고 축구부원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이제 현민의 축구부 생활의 약 3할 정도가 놀림으로 채워지게 생겼다. 그렇잖아도 곱슬거리는 머리는 더 엉망진창이 돼 있었고, 어깨에 체온보존용으로 덮어놓은 후드티는 어디로 도망갈 뻔한 걸 겨우 손에 쥐었다. 긴 소매의 축구부 셔츠에, 반바지와 긴 양말, 축구화. 그리고, 홍시 풍년이라도 온 듯한 보기좋은 홍시색으로 물들어 있는 얼굴. 랑은 현민의 등번호가 14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민은 후드티를 잡지 않은 쪽 손으로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겨우겨우 정돈했다.)
웬일로 축구장에까지 왔어. 도서관에서 안 기다리고. ...지금 땀냄새 날 텐데.
(빨개진 얼굴로, 조금 머뭇거리는, 최대한 무뚝뚝하게 내려 애쓰는 목소리. 그렇지만 수줍음과 설렘이 숨겨지지 않는 목소리다.)
(정적이다. 분명 다들 흩어지고 있었고, 분주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서 덥썩 축구장에 발을 들였고, 당신의 이름을 부른 거였는데 이 정적은 무엇인가. 랑은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더 다가가지 못 하고 우뚝 서고 말았다. 하면 안 될 짓을 해버린 것 같다는 짐작에 축구장 밖으로 돌아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분명 자신이 부른 건 현민 뿐인데 어째서 축구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설명이 필요한데 설명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당신도 랑이 걷다가 멈춘 것처럼, 일어나다 만 자세로 멈춰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라고는 당신 밖에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붉어진다. 당신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면서, 아까와는 다른 소란이 축구장에 번졌다.) (축구부원들이 어째 당신에게로 모여들었다. 순간 자신이 축구장에 들어선 것 때문에 당신이 혼나는 건가, 하는 착각이 1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모두의 입 모양을 읽을 수는 없으니 귀 기울여 들을 수 밖에 없었고, 소리가 들리긴 해도 여러 명의 것이라 복잡했지만 온전히 듣지 않아도 대화의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분위기가 무슨 분위기인지, 당신이 헤드락에 걸리고 마는 이유가 무엇인지 쯤이야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랑은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얼굴에 열이 올랐다는 걸 알았다. 분명 저 상황에 도움은 안 되겠다. 당신만큼이나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하얀 피부는 작은 열기조차 돋보이게 했다. 귀 끝과 뺨을 붉혀버리고서 어쩌면 좋은지에 대하여 계속 고민하고 있으니 당신이 빠져나왔다.) (오늘 데이트를 하는 건 맞지만 그런 데이트는 아닌데, 그치- 하고 웃는게 나을까 고민했다. 아니면 우리 그런 사이 아닌데 장난 너무 심하다- 하고 웃는게 나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리고 랑은 이내 차라리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엉망진창이 된 머리와 분명 걸치고 있었던 것 같은 후드티를 손에 쥐고서 제게로 다가오는 당신을 보고서 그저 웃기만 했다. 부끄러워 웃는 것과 당신의 모습을 보고서 웃는 것이 뒤죽박죽 섞였다.) 내가 축구장에 왜 오겠어- 너 만나러 왔지. (정말 그 뿐인데, 축구장에서 만들어진 분위기가 이 몇마디에 마법을 건 것 같다. 랑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도 말을 끝내고서 얼굴을 조금 더 붉히고 말았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마법을 거는데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아, 아냐! 괜찮아. 그리고 축구부 유니폼 입은 거 멋지잖아. 진짜 선수들 같아. (마법이 걸린 건 앞선 문장들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이 순간에 계속 걸려있는 건지, 랑은 매우 곤란했다. 축구장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목도리를 하고 있는게 답답하고 더웠다.)
(축구부 부원들은 삼삼오오 갈라지기 시작했다. 으레히 그렇게 갈라지면서 뭉친 사람들끼리 떠들곤 하는 수다의 화제가 절반 정도는 랑과 현민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같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자. 현민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투덜댔다.)
기왕 유니폼을 보여줄 거면 좀더 깔끔하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현민도 그렇고, 랑도 온통 빨개져 있다. 서로 얼굴을 붉힌 소년과 소녀가 쭈뼛대면서 다가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만치에서 또 주접 한 마디가 슝 하고 날아왔다.)
"야 채현민 뭘 그렇게 쩔쩔매냐~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랑에게 다가오던 현민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접이 날아온 쪽을 홱 돌아보며 째려보았다. 자기가 잘 아는 자기 동기 목소리였기에, 그게 진짜로 자기 동기 목소리라는 걸 확인한 현민은 오만상을 쓰며 마주 소리질렀다.)
시끄러워, 멍청아!
(피부가 빨개졌음에도 차분하려 애쓰고 있던 현민의 표정마저 흔들렸다. 랑의 웃음에도 수줍다 못해 곤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현민은 어쩌지, 하는 듯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후드티를 랑이 볼 수 있도록 펼쳐들었다.)
배하랑. 이거 씌워줄 테니까, 우선은 도서관으로 가자. 좀 빨리 걸을 수 있겠어? 손 잡아줄게.
(이걸 씌우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현민은 손을 뻗어 랑의 어깨에 후드티를 씌워주고는 후드까지 랑의 머리에 깊숙히 눌러씌워 주었다. 그렇게 후드를 눌러쓰니, 주변의 시야가 한결 좁아지면서 주변의 소리도 조금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랑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꼭 잡고는, 도서관이 있는 A관 쪽으로 랑을 이끌기 시작했다. 멀리서 우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낯설고 당혹스런 마법은 차츰차츰 후드 너머로 등 뒤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또 보여주면 되니까- (투덜대는 목소리에 조그맣게 웃었다. 얼굴은 붉어졌고, 이 분위기에서 곤란한 것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당신과 있으면 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앞에서는 이 상황을 잠시 잊고 편하게 웃고 있었는데, 어디서 큰 목소리가 난다. 예기치 못한 소리에, 랑은 늘 소리에 신경을 쓰다보니 갑자기 나는 소리에는 깜짝 놀라버리고 만다. 심지어 그 말 또한 당황하기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랑은 몸을 흠칫 떨며 놀랐다. 그러고서 저 목소리는 당신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황한 채로 당신을 바라보니 오만상을 쓰고 있다. 한 마디 대꾸를 하려나 생각했고, 정답이었다.) 그렇게 소리지르다 목 상하겠다~. (랑은 분명 깜짝 놀랐었고 당황했다. 당신이 대꾸를 하리라 생각치 못했다면 당신의 목소리에도 놀라버렸을게 분명하다. 근데 예상에 맞아떨어진 당신의 반응에도 또 웃어버렸다. 예상한 상황을 맞추어서 나는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응? 응, 손 잡으면 상관없는데- (그러면 너 더 놀림받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당신이 펼쳐서 보여준 후드티가 씌워지는게 빨랐다. 후드도 머리 위에 씌워지고, 당신의 손이 잡아온다. 랑도 당신의 손을 꼭 잡았고 당신이 내는 속도에 맞춰서 발을 옮겼다. 이래서야 도서관에서 굳이 당신을 마중 나온 이유가 없어지고 마는데, 이상하게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상황 자체가 즐거운 것 같다. 그래서 랑은 생각해보았다. 아까같은 상황에 또 처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사실이 아닌 말들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별로다. 그리고 분명 당신은 오늘 일로 인해 축구부에서 놀림받을 일이 늘어날 것이다. 안 좋은 것 뿐인데, 왜 당신이 손을 이끌고 있는 지금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다.)
(현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랑의 손을 잡았다. 기왕 놀림거리가 된 것, 손 마주쥐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목격담 하나 정도 더 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예상 외의 소란이 질색인 것은 현민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와락 지른 고함에 필요 이상의 힘이 실려있었던 것은 비단 부끄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더플백을 쥐고, 한 손에는 랑의 손을 쥐고 이끌며 현민은 말했다.)
적어도 지금 여긴 아냐.
(잠시 뒤, A관 건물의 문이 랑의 등 뒤로 닫히고, 위익 하고 바람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닫히자 언제 그렇게 소란스러웠냐는 듯 축구장과 운동장에서의 소음이 훅 잦아들고 학생들이 없는 고요한 복도만이 남는다. 확실히, 앞으로 축구부에서 나도는 농담거리들 중에 자신과 랑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기야 할 것이다.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농담이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겪을 필요 없는 일들을 제쳐놓고 나니... 사랑의 도피만이 남았다.)
일단 라커룸에서 사람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갈아입고 싶은데... 떠오르는 데가 도서관밖에 없네. 뭐, 도서관이 아니라도 어디든 가자. 까짓거 안 갈아입고 그냥 유니폼 차림으로 집에 가도 되고.
(실제로 축구부원들 중에는 이후 일정이 없고 락커룸에 들리기 귀찮으면 그냥 유니폼 차림으로 귀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A관 건물까지 들어오고 나니 조용해짐과 동시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까 왜 그렇게 부끄러웠던건지 의문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여지라고는 없었던 것 같은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굴의 열기도 식어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만드는게 정말 마법같이 사람의 마음도 흔들리게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당신과 같이 있어서 즐거운 것 하나는 마법이 아니라 진실인 것 같다.) 안 돼, 그것만 입고 가면 추워- 유니폼 두껍지도 않잖아! 아래는 반바지고- (랑은 당신이 씌워주었던 후드티를 후드부터 훌렁 벗어 당신에게로 건넨다. 목도리도 훌렁 목에서 푸르더니 같이 건넨다. 반바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안 추워? 맞다, 아까 안 다쳤지? (헤드락 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던 당신이 축구부원들과 툭탁거린 것을 다 보았으니 그것에 대한 걱정이다. 그것에 대한 걱정을 하자니, 앞으로 당신이 축구부에서 곤란할 것도 문제고 당신에게 미안함이 커졌다.) 훈련 끝난 거 같아서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 생각나서 보러 간 거였는데.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문제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풀이 꺽였다. 미안해- 하고 덧붙은 목소리가 참 시무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