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놀고 싶어? (당신에게 물은 것인지 깐쵸에게 물은 것인지 애매모호했다. 랑은 깐쵸의 꼬리가 팔에 닿자 까르륵 웃었고, 그러고서 말했기 때문이다. 랑은 방학에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생각해보았다. 학기 중과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학교에서 시대 도서관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누군가 옆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러길 기대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선을 그어둔 채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문자는 안 돼? (주머니에 들어있던 폰을 꺼낸다. 잠금을 풀고서 키패드를 띄워 당신에게 폰을 건넨다. 번호를 입력해달라는 뜻이었고, 전화를 걸어 당신의 폰에도 랑의 번호를 남기면 된다. 번호 저장까지 당신 마음대로 랑은 굳이 그만두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귀에 무언가 꽂혔을 때 랑은 놀랐고, 노래가 나오면 이것이 무언인지를 알았다. 노래를 얼마 듣지도 않고 꽂아주었던 걸 다시 빼버린다.) 나 노래 이렇게 듣는 거 안 좋아해. (한 마디라도 제대로 들었을까. 곧바로 빼버렸다고 보는게 맞다.) 그냥 듣는게 더 좋아. (뒤늦게 덧붙인 문장은 말하기를 고민한 티가 난다.)
(나랑 놀고 싶어? 하는 말에, 문득 주머니 안에서 랑의 손을 꼭 쥐고 있던 현민의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린다. 아플 정도는 아니고, 말 그대로 조금 더 꾸욱 하는 정도. 그것과 비례해서 조금 더 따뜻해지는 손. 주머니 속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쵸는 능청스레 랑의 질문에 액옭, 하고 또 그 우는 소린지 딸꾹질 소린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한 번 더 할 뿐이다.) (현민은 뭐라 말을 하지 않고, 랑의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번호를 찍어준다. 그리고 번호만 다이얼에 찍어준 채로 랑에게 되돌려준다. 그러다, 도무지, 도무지 참지 못했는지... 현민은 더럭 대답해버리고 만다.) 응. 놀고 싶어. (딱히 노는 게 아니라도 괜찮았다.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분에 넘치게도, 외람되게도, 사고에 가까운 그 충돌로 더럭 가까이 다가온 랑이 현민의 일상에 가져온... 원래라면 현민의 삶에 없었을 그 폭신한 순간들이 그에게는 기꺼웠다. 랑이 그어놓고 맴돌고 있는 선을 더럭 넘어서려 시도할 용기를 내게 만들 정도로.) (그러나 그 시도는 철저한 도어슬램으로 끝나는가 했다- 손 위에 되돌려진 이어버드로 말이다. 그러나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랑이 덧붙인 말에, 현민은 잠깐 숨을 고르고 표정을 가다듬고는 핸드폰 화면을 몇 번 더 눌렀다. 이어폰이 아니라, 핸드폰 스피커로... 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가 이어폰으로 듣는 것보다는 훨씬 덜 선명하게, 그러나 더 잔잔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깐쵸는 느릿하게 일어나서는, 꼬리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어준다.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깐쵸가 먼저 대답했다. 랑은 이대로 자신의 물음이 깐쵸에게 한 것으로 마무리 되는구나 했다. 이기적이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제 당신과 부닥치기 전만 해도 랑은 원래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의 익숙하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뿐이라고, 힘이 실린 당신의 손을 느꼈지만 뭔가 말할 수는 없었다.) (번호가 찍힌 폰을 돌려받으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부재중이 남을 수 있는 시간, 그 잠시만 기다린 후에 전화를 끊어버린다. 당신은 그 번호를 저장하면 된다.) 응? (늦은 답을 들었다. 놀고 싶다는 답을 들어버렸다. 랑은 당신이 용기냈으리라는 것쯤은 알았고, 그것마저 모른 척 훌쩍 당신과 거리를 두려할 수 있을 만큼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바라보아도 지금은 늦었다.) 응, 이렇게. (느릿하게 흔들리는 깐쵸의 꼬리를 보았다. 스피커로부터 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끝나갈 때까지, 랑은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벌어지는 일은 전부 자업자득이라고,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는 기껏 3분 남짓한 시간인데 고민이 많은 듯 했다.) 현민아. (당신을 부르고서 당신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인다.) 난 이런 거 못 해. (작게 속삭인 말은 두루뭉실했다. 한마디를 속삭이고서 귓가에서 멀어진 랑은 배시시 웃을 뿐이다.)
(꼬리를 흔들어 배웅해주고는 깐쵸는 다시 자기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갔다.) (그것은 사실 랑을 배웅해주는 귀갓길에 함께 들으려고 틀었던 노래지만, 랑은 그저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현민도 이제 집에 가자고 랑을 이끌려던 손을 멈추고는, 가만히 서서 랑이 노래 감상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톡, 하고 돌아온 어떤 대답. 너무도 두루뭉실한, 그 소녀다운 거부.) (현민은 그 음악을 사실 별 생각없이 골랐다- 그저, 현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오늘 귀갓길에 함께 듣고 싶은 노래가 그것이었을 뿐이다- 현민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 노래를 선곡했었다. 그러나 배시시 웃고 있는 랑을 보고, 현민은 어쩌면 자기가 스스로 부끄러움으로 파묻어버린 목소리 하나를 노래가 대신 전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민은 랑을 바라보았다. 랑이 무엇을 못한다고 하는지, 정확히 구체적으로 딱 짚어서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안다. 누군가와 보내는 그런 푹신한 순간들... 쉽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따뜻하고 두루뭉술한 그 어떤 무언가를 가리켜, 현민은 랑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나도 그런 거 잘 못해. (뭐만 했다 하면 얼굴이 폭 빨개지고. 부끄러움은 잔뜩 타고. 틱틱거리기 일쑤고.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현민은, 포기하느니 차라리 실패를 택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만두고 싶진 않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그게 뭘 말하는 건지 딱 집어서 말하지 못하는데도, 얼굴은 붉어진다. 얼굴은 붉어지는데도, 현민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대로 랑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랑을 보내버리면, 이 말을 그냥 삼켜버리면 이것이 두고두고 자신의 가슴에 멍자국으로 남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나랑 있는 게 싫지 않다면 난 계속 너랑 있고 싶어.
나 너랑 있는 거 싫지 않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당신이 옆에 있던 이틀, 그마저도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하루도 안 될 시간동안 랑은 즐거웠다. 조곤조곤 차분하게 꺼내는 말은 최대한 상냥한 말로 고르고 고르는 것이었다. 랑은 본인이 이기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붉어진 당신을 바로 응시하고,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오롯이 또렷하게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당신을 담아 비추었다.) 근데 좋다고 말 안 하는게 나야. (당신처럼 쉽게 부끄러워하고, 작은 눈짓에도 몸짓에도 반응하는 당신에게 랑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당신의 몫으로 넘기고서 사라져버리는 사람이 랑이니까. 당신을 밀어내는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으니까.) (조금 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말해보기로 했다. 자업자득이라는 이유로, 조금 더 솔직하게.) 그런데도 너랑 친구하고 싶어. (모순덩어리인 문장 뿐이어서, 랑은 부끄러웠다. 숨기는 것도 거짓말이라면 많은 거짓말을 해버렸다. 랑이 얼굴을 붉힌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뻔뻔함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 수치스러움에 똑바로 바라보던 시야가 아래로 천천히 곤두박질쳤다.) (그래도 랑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바로 봐줬듯이 랑도 그랬다. 겁먹고 움츠려있는 걸 진정시키려는 듯 랑은 숨을 골랐다.) 이래도 나랑 있고 싶어? (차라리 당신이 이렇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도 못한다.)
알아. 왠지... 조금 그랬어. (현민은 랑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는, 랑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무슨 책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 안에 있고, 너는 그 밖에서 날 들여다보는 것 같았어. 비유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 말마따나, 이상한 비유다... 그렇지만 현민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붉은 뺨 위에서 까만 눈동자가 담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걸 캐물을 생각은 없어. 사람과 가까워지는 걸 꺼리게 되는 이유는 많고, 나도 꽤 많이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너도 날 떠나갈 거잖아' 라거나, '내가 너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라거나... 그 외에도 불확실한 이런저런 말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유들까지. 좋다고 말하는 게 싫거나 꺼려질 수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아. 물리적으로 곁에 있다고 마음까지 곁에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네가 오기 힘들다면 내가 너한테 갈게.
사실 너한테 간다고 해서 뭐가 될지도 모르겠고 뭘 하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같이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