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를 흔들어 배웅해주고는 깐쵸는 다시 자기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갔다.) (그것은 사실 랑을 배웅해주는 귀갓길에 함께 들으려고 틀었던 노래지만, 랑은 그저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서 현민도 이제 집에 가자고 랑을 이끌려던 손을 멈추고는, 가만히 서서 랑이 노래 감상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톡, 하고 돌아온 어떤 대답. 너무도 두루뭉실한, 그 소녀다운 거부.) (현민은 그 음악을 사실 별 생각없이 골랐다- 그저, 현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오늘 귀갓길에 함께 듣고 싶은 노래가 그것이었을 뿐이다- 현민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 노래를 선곡했었다. 그러나 배시시 웃고 있는 랑을 보고, 현민은 어쩌면 자기가 스스로 부끄러움으로 파묻어버린 목소리 하나를 노래가 대신 전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민은 랑을 바라보았다. 랑이 무엇을 못한다고 하는지, 정확히 구체적으로 딱 짚어서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안다. 누군가와 보내는 그런 푹신한 순간들... 쉽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따뜻하고 두루뭉술한 그 어떤 무언가를 가리켜, 현민은 랑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나도 그런 거 잘 못해. (뭐만 했다 하면 얼굴이 폭 빨개지고. 부끄러움은 잔뜩 타고. 틱틱거리기 일쑤고.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현민은, 포기하느니 차라리 실패를 택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만두고 싶진 않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그게 뭘 말하는 건지 딱 집어서 말하지 못하는데도, 얼굴은 붉어진다. 얼굴은 붉어지는데도, 현민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대로 랑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랑을 보내버리면, 이 말을 그냥 삼켜버리면 이것이 두고두고 자신의 가슴에 멍자국으로 남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나랑 있는 게 싫지 않다면 난 계속 너랑 있고 싶어.
나 너랑 있는 거 싫지 않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당신이 옆에 있던 이틀, 그마저도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하루도 안 될 시간동안 랑은 즐거웠다. 조곤조곤 차분하게 꺼내는 말은 최대한 상냥한 말로 고르고 고르는 것이었다. 랑은 본인이 이기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붉어진 당신을 바로 응시하고,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오롯이 또렷하게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당신을 담아 비추었다.) 근데 좋다고 말 안 하는게 나야. (당신처럼 쉽게 부끄러워하고, 작은 눈짓에도 몸짓에도 반응하는 당신에게 랑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당신의 몫으로 넘기고서 사라져버리는 사람이 랑이니까. 당신을 밀어내는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으니까.) (조금 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말해보기로 했다. 자업자득이라는 이유로, 조금 더 솔직하게.) 그런데도 너랑 친구하고 싶어. (모순덩어리인 문장 뿐이어서, 랑은 부끄러웠다. 숨기는 것도 거짓말이라면 많은 거짓말을 해버렸다. 랑이 얼굴을 붉힌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뻔뻔함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 수치스러움에 똑바로 바라보던 시야가 아래로 천천히 곤두박질쳤다.) (그래도 랑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바로 봐줬듯이 랑도 그랬다. 겁먹고 움츠려있는 걸 진정시키려는 듯 랑은 숨을 골랐다.) 이래도 나랑 있고 싶어? (차라리 당신이 이렇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도 못한다.)
알아. 왠지... 조금 그랬어. (현민은 랑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는, 랑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무슨 책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 안에 있고, 너는 그 밖에서 날 들여다보는 것 같았어. 비유가 조금 이상하지만. (그 말마따나, 이상한 비유다... 그렇지만 현민은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붉은 뺨 위에서 까만 눈동자가 담담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걸 캐물을 생각은 없어. 사람과 가까워지는 걸 꺼리게 되는 이유는 많고, 나도 꽤 많이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너도 날 떠나갈 거잖아' 라거나, '내가 너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라거나... 그 외에도 불확실한 이런저런 말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유들까지. 좋다고 말하는 게 싫거나 꺼려질 수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아. 물리적으로 곁에 있다고 마음까지 곁에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네가 오기 힘들다면 내가 너한테 갈게.
사실 너한테 간다고 해서 뭐가 될지도 모르겠고 뭘 하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같이 생각해보자.
(알고 있었다는 말은 대답이 되고 말았다. 알고 있었는데도 당신은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다. 이래도 나랑 있고 싶냐고 물었던 랑의 물음은 바보 같았던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생각보다 더 부끄럼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더 용기있는 사람이다. 넘어지는게 무섭지 않은 사람.) (뛰어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랑은 당신의 방에서 그랬듯이 웃는다. 물어보지 않는 것도,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기꺼이 마음을 말해준 것도 하나같이 고마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 고마움이 넘치는 와중에 당신이 뛰어가겠다고 까지 하니 그게 귀여워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을 붉혔던 온기가 조금은 남아있는 얼굴로 평범히 웃는다.) 그럼 비밀 하나 알려줄게. (이것 또한 자업자득이다. 처음 자업자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보다는 그 단어의 뉘앙스가 조금 달라졌지만 랑은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당신이 자신에게로 오는 길에, 뛰어오는 길에 헤매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부터 용기를 내었다. 당신이 낸 용기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랑에게는 심호흡이 필요한 일이었다.) 현민아. (데자뷰가 느껴진다면 착각이 아니다. 당신을 부르고서 랑은 당신의 귓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속삭였다.) 난 이런 거 못해. (배시시 웃음 짓는 것까지 똑같았다. 다른 점은 이 두루뭉실한 말이 가르키는 것이 달라졌단 것인데, 랑은 속삭이는 행동 자체를 뜻하고서 하는 말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선 내에서 반복되는 루프물과도 같은 순간. 같은 일이 벌어지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다른 순간. 같은 말, 다른 의미. 단지 랑이 아까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했을 뿐이지만, 현민에게는 왜인지 그게 그렇게 다가왔다.) -네가 못하는 그게 정확히 뭔지 몰라. (그는 실토했다.) 그렇지만 난 개의치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야. 네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거고. (그리고는 다음 곡을 재생했다. 핸드폰의 스피커에서, 다음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말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겁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랑에게는 그저 다른 것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약점이 되고 만다. 말하기로 마음 먹었으면서 두루뭉실하게 말했던 이유.) 응, 내가 잘 말 안 해줬잖아. (랑은 웃었다. 언젠가 정말로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무렇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은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이쪽 귀가 안 들려. (피어싱을 뚫어놓은 쪽의 귀다. 옆머리가 내려와 가리고 있는 귀를 보이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듯 들어올린다. 소리에 있어서 랑의 세계는 왼쪽 뿐이다. 그리고서 다시 머리카락을 내려 감춘다.) 이쪽 귀도 다른 사람들만큼 잘 들리는 건 아냐. (이번에는 옆머리를 땋아서 넘긴 쪽의 귀다. 랑은 이미 드러나있는 귀를 드러나게 할 수는 없고, 땋아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불편한게 아니라는 거야. 방금 노래도, 아까 쓰다듬은 것도. (다 말해버렸다. 말하기 싫은 비밀이지만, 그마저도 다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니 기분은 편했다. 랑은 손에 검지를 가져다놓고 입꼬리를 올린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고, 이건 다 비밀이야. (한 번 또 웃어보인 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다음 노래에 귀 기울였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친구가 있는 학교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떠올려보았다. 랑은 문득 폰을 바라보았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채부끄럼쟁이. 당신을 전화번호부에 별명으로 저장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가자. 이러다 여기서 밤새겠다.
...... (현민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랑에 대한─뭐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어떤 마음을 훼손할 요인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일이기도 했다.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랑을 너무 배려심없이 대해오지 않았었나. 결론이 급작스레 주어지자 현민의 머릿속에 무심결에 남아있던 단서들이 차곡차곡 연결된다. 균형감각이 좋지 않아 자주 넘어진다던가, 시선 밖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다가오면 깜짝 놀란다거나, 귀에 무언가 닿는 걸 거부한다거나... 그래서였구나. 현민은 문득 아까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랑의 귀에 이어폰을 들이댄 걸 떠올렸다. 표정이 침울해진다. 그 동안 자신의 말을 한 번도 되묻지 않고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랑은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민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과 한 마디 하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소년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흡사 푸들이 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모양새다. 그렇지만, 현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렇지만 나 그 말을 듣기 전처럼 널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조심해야 할 부분은 조심하고, 신경쓸 게 있으면 신경쓰게 될 거야. 그렇지만 너한테 갈 거라는 내 말을 바꿀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집에 가려던 길, 마저 바래다줄게. 너도 내일 데이트, 같이 가줘.
응. 가자. 이야기가... 길어졌네. (현민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는 랑의 손을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꼭 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