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다가갔다가, 쉽게 멀어지고. 머무르지 않는 가벼운 구름같은 삶. 그런데 웬 푸들 한 마리가 구름을 졸졸 쫓아오기 시작했다. 랑은 이 소년의 삶에 '쉽게 다가갔다' 기에는 너무 많은 흔들림을 남겼고, 너무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랑과 꽤 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몇 없었으나 모두 오래된 친구들뿐이었다. 사람을 사귀는 것을 귀찮아했으나, 한번 이끌리기 시작한 사람에게서는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밀치지 않았고, 멀어지려 하면 뒷걸음질친 만큼 다가올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 따라올까. 어디까지 가게 될까.) (현민은 가볍게 스니커즈에 발을 푹 꿰었다.) 깐쵸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게? (랑이 신발을 신는 동안 혹시 손을 놓으려 했다면 현민은 손을 놓아주었을 것이다. 다만, 신발을 다 신고 나서 고개를 들면 다시 손을 내밀어줄 것이고. 랑이 거절하면 다시 손을 거두어들이겠지만.) 가봐야 알아. 걔 생활패턴이 제멋대로라. (현민은 현관 패드락 잠금해제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늦가을 밤 공기가 신선하고 차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응,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 (신발을 신는 동안 당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 하나만으로 신발을 신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고, 랑은 손을 잡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랑은 자신이 당신에게 한 짓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가벼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깐쵸가 오늘은 늦잠 자기로 했으면 좋겠다~. (도어락이 열리고서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얼굴에 닿은 공기만 그랬다. 밤공기 특유의 냄새와 온도가 물씬 느껴졌는데, 후리스가 따뜻했다.) 맞다, 이거 봐. (입고 있는 것을 보라는 듯 팔을 들어올리면 품이 남아도는 검은 후리스 자락이 팔락거린다.) 갈아입는 거 깜빡했어- 세탁해서 돌려줄게.
반대항으로 축구하는거 현민이 나간거 랑이가 응원가는 것도 보고 싶다 2학년이나 3학년 때 반 갈렸는데 자기 반말고 현민이 응원하기 수행평가 조별로 하는 거 현민이랑 랑이 다른 조로 나뉘어서 서로 다른 애들이랑 있는 거 신경쓰여하면 좋겠다 교실에서 옆자리 되는 것도 보고싶고 지금은 춘추복이나 동복입고 있겠지 날 더워져서 현민이 상큼한 하복 입은것도 보고싶다
현민(장렬한 자폭도 무릅쓰는 편)(그러나 이제 홍익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아 축제도 좋아.. 정말... 현민주가 고등학교때 못해본 거 현민이로 대리만족 10000% 해버릴듯 도서관에서 깨볶는 건 나중에는 되겠는데 지금은 조금 힘들지도..? 아마 지금의 두 사람 시점에서 도서관에서 속닥거리며 소리죽여 웃는다면 랑이가 웃는 거일테고 현민이는 여지없이 홍시농사 풍년 짓고 있지 않을까
(현민은 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짐짓 다른 데로 돌리고 말했다.) 보러 오면 되잖아. (...목적어는,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 작은 욕심이라면 욕심일까. 이건 욕심이자 동시에 체념이기도 하다. 랑에게는 이 '보러 오면 되잖아'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야기를 꺼낸 깐쵸에 대한 이야기인 줄로 들릴 테니까. 현민이 '보러 오라' 는 말에 담은 마음은, 그것보다 좀더 포괄적인 이야기였지만.) (뭐 가보자, 하며 가볍게 말하면서 현민은 랑의 손을 쥔 채로 현관을 나선다. 그러다 랑이 팔락거리는 누가봐도 남의 옷 뺏어입은 핏의 후리스를 보고 눈을 깜빡인다. 가만, 그러면 쟤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내 방에 있다는 이야기잖아.) (다시 가지러 가지 않아도 되겠어? 하고 되물을까도 했지만, 현민은 그냥 그것을 손대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뒀다가 내일, 아니면 그 이후로라도 시간날 때 랑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현민은 랑의 원래 외투 이야기는 안 하고, 세탁해서 돌려주겠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어디 넘어져서 찢어먹지만 않으면 돼. (대문이 다시 열린다. 삐이걱 하고 대문을 열고 나오자, 사거리에 면해 있는 현민이네 집 담장 밖으로 나온다. 사거리의 맞은편 귀퉁이를 보면 아까 깐쵸가 돌아갔던 슈퍼가 있다. 슈퍼의 창고 쪽으로 다가가면 익숙한 사람 발소리라는 걸 알아챈 건지, 깐쵸가 상자에 난 입구로 털북숭이 꼬리를 높게 치켜들고는 부시럭대며 걸어나와 기지개를 한번 쭉 피고는 두 사람의 발치로 다가온다.) 얘가 네 발소리를 기억했나 보다.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 라는 문장에서 가르키는 건 깐쵸가 맞았지만, 당신과의 등교길과 하교길을 포함하고 있었다. 등교길에 만난 깐쵸는 당신을 만나게 했고, 하교길에 만난 깐쵸 또한 당신과의 하교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당신과 언제 등하교를 같이 할 지는 모르니 언제 또 볼지 모른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좋아해주면 그럴텐데. 간식이라도 챙겨 다닐까~. (랑은 당신이 쥐고 있는 손을 후리스 주머니 쪽으로 향했다. 후리스 주머니 속에 서로 잡고 있는 손을 넣으려고서 한 행동이었다. 밤공기에 손이 찰까봐서 자연스레 한 행동이다.) 오늘은 안 넘어져. 손 잡았잖아- (누가 손을 잡아주고 있는데도 넘어질 만큼은 아니라는 듯 조금 툴툴거렸다.) (대문을 지나서 슈퍼 쪽으로 다가갈 때만 해도 깐쵸가 자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깐쵸가 상자에서 나오더니 기지개를 피고서 다가와준다.) 깐쵸는 자기 귀여운 거 알고 있겠지? (발치까지 다가와준 깐쵸를 보고서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 진짜? 정말 기억해준 거면 좋은데~.
(당신이 깐쵸를 보러 올 수도 있지만 깐쵸가 당신을 찾아올 수도 있다.) 계속 보면 좋아하게 될 거라 생각해. 나도 그랬으니까─ (하다가 현민은 자신의 손이 어디로 쑥 딸려들어가는 걸 느꼈다. 부들부들하고 따뜻한 걸 보니 후리스 주머니인가 보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현민은 별 반항 하지 않고 허리를 조금 구부정하게 숙여서 높이를 대충 맞추어주었다. 랑이 깐쵸를 발견하고 쪼그려앉자, 현민도 그 옆에 쪼그려앉았다.) 자기 아는 발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내다보거든. (깐쵸는 꼬리를 세운 채로 다가와 랑과 현민의 다리 사이를 오가며 몸을 부벼, 길다란 털을 한가득 묻혀놨다. 조그맣게 골골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사람들이 자길 좋아해주는 거. (문득 현민은 깐쵸가 부럽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지우고, 손을 뻗어 깐쵸의 정수리를 살살 문질러주었다. 깐쵸의 골골대는 소리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너도 쓰다듬어볼래?
그럼 깐쵸한테도 출석해야겠다. (그러다 의아함을 느낀다. 당신이 낮아졌다. 랑은 당신이 왜 낮아진 건가, 올려다보는 각도가 낮아짐에 고개를 갸웃이다 자신 때문임을 알았다. 후리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당신의 손을 잡고 있지 않던 남은 손으로 당신의 손을 폭 감쌌다.) 미안, 손 시릴까봐 그런건데 내가 너무 작네- 까치발 해볼까? (잠깐 까치발을 들었지만, 잘 넘어진다면서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금방 다시 내렸다. 까치발 하나마나 좁혀지는 효과가 별 없는 키차이인 탓도 있다. 별로 달라지는게 없는 키차이에 푸스스 웃었다.) 깐쵸 대단하네- 오늘 하루만에 내 발자국 소리 외운거야? (깐쵸가 다리 사이를 오가며 몸을 부비는 것에 간지러움을 타는 듯하다. 간지러워하며 웃다가, 당신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깐쵸를 쓰다듬어본다.) 여기서 계속 놀고 싶다~.
그것보단, (현민은 랑의 손을 조금 더 들어올려 자기가 입은 트랙탑 주머니에 자기 손과 마주쥔 랑의 손을 쏙 집어넣었다. 부들부들한 재질이 아니라 매끄러운 재질이라 조금 아쉽다마는- 이것도 그럭저럭 따뜻하다. 늦가을 저녁바람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만큼.) 걔 되게 똑똑해. 명절이 되면 명절이란 것도 알아채는걸. (랑의 다른 손이 깐쵸를 쓰다듬자, 깐쵸는 꼬리를 살래살래 저으면서 숫제 랑의 손에 자기 머리를 꾹꾹 밀어대며 골골대고 있다. 랑의 말에 현민은 랑을 바라보다가 깐쵸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ㄸ.. 또 놀러오면 되잖아. 또 놀러와. (그러다가 아무래도 시선을 피하는 건 아니다 싶었는지, 현민은 용기를 내어 다시 랑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언제라도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