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고 있으니까. (그의 말마따나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더 조심할게, 하고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랑의 소매를 걷어주었다. 랑이 손을 쥐었다 폈다 잼잼하고 있는 게 귀여워서, 현민은 그걸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정수리께를 조심스레 쓰다듬어보았다. 품이 큰 옷이니 다시 벗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민도 당신이 그 옷을 입고 가겠다면 기꺼이 빌려줄 생각을 하고 있을 뿐, 당신이 정말로 그걸 입고 갈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담요가 자신한테도 크다는 말에 현민은 문득 땅바닥에 질질 끌리던 담요자락이 생각났다.) 그 담요 세탁은 제대로 하고 있냐? (하고, 무심코 나이들어 보이는 잔소리성 질문을 하고 만다. 그 바람에 귓가에 힘겹게 매달려있는 해골이 대롱거린다. 랑마저도 웃어버리자, 현민은 거울을 곁눈질해 본다. 그리곤 랑이 고양이처럼 툭툭 버릊는 손길에 애처로이 흔들리는 해골을 보고 마찬가지로 웃고 만다.) 이거 완전 클리프행어잖아. (현민은 손을 들어올려서 가볍게 귀 뒤편의 피스를 떼어내고 해골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귓가에서 구해주고는, 그걸 피어싱 함에 넣는다. 갑자기 집 밖에서 대문 열리는 삐이걱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어... 엄마 오셨나 보다. (그는 케이스를 닫지도 않고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기 무섭게 현관 쪽에서 삑삑삑 하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문 열리는 삐리릭 소리가 난다.) 잠깐 어머니한테 인사드리고 올게. (현민은 랑을 두고 일어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방에서 얌전히 기다릴 수도 있고 따라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살짝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인 것이 랑이가 따라나가면 현관에서 현민이랑 현민이네엄마랑 랑이랑 삼자대면하는 거고, 랑이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현관에서 랑이 신발을 발견한 현민이 엄마가 이 막내아들쇅ㅎㅎㅎㅎㅎㅎ 이러면서 주책바가지웃음 한가득머금고 현민이네 방으로 올라옵니다 장소만 바뀔 뿐 삼자대면을 하게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조심하고 있다는 말에 말없이 살짝 눈웃음 지었고, 더 조심하겠다고 중얼거리는 입모양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꼬리도 미소지었다.) 응- 고마워. (당신의 손길이 다시 한번 머리에 닿는다. 옆머리가 아니라 윗쪽에 닿았고, 랑은 멈칫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쓰다듬는 손길을 반기듯 헤실거리는 웃음을 보였다.) 우와, 잔소리. 하고 있어- (추워지면 가끔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데, 겨울철이 되야 담요를 꺼내기 때문이다. 담요를 세탁하러 집에 들고 왔다갔다거리는 쇼핑백이다. 그러다 당신도 해골 인형 피어싱이 어떤 모습으로 당신의 귀에 있는지 알고서 웃으면 쿡쿡 거리던 웃음이 조금 커졌다. 꺄르르 웃더니, 당신의 손이 귀로 올라가면 설마하고서 조금 놀란다. 설마하던 생각대로 당신이 피어싱을 빼면 눈을 꼭 감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때부터였다. 랑이 정신없어지기 시작한 건.) 아. 나도 같이 인사, 아니다. 인사드리고 이제 갈게! (당신의 어머니도 귀가한데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꽤 많이 놀았는지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가방에 서둘러 챙겼다. 교과서와 노트들, 필기도구까지 차곡차곡 가방에 넣었는데, 이때 깜빡한 건 외투다. 방 밖으로 나간 당신을 쫓으려다 하필 외투를 깜빡해버렸다. 당신의 후리스를 입은 채로 발을 재촉해서 당신을 쫓았다. 원래 입고 왔던 외투는 처음 방에 들어서서 옷걸이에 걸어둔 채, 그대로 남게 되었다.) 같이 가- (랑은 당신의 소매라도 붙잡으려 했다.)
(자신은 인간관계에 퍽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지만- 만일 이렇게 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은 가질지언정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은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자기딴에는 조심하게 되었다.) (랑이 헤실헤실 웃자 현민은 잠깐 이대로 영원히 이러고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은 도어락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뭐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 (하다가, 현민은 잠깐 아 이걸 어쩌지? 하는 말을 온 얼굴로 하는 것 같은, QHD 화질로 선명하게 난감해하는 표정을 온 얼굴에 띄웠다. 그러나 그도 잠시 현민은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매를 후다닥 붙잡아오는 랑의 손을 고쳐쥐어,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그래, 그럼. (현민은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오늘은 좀 늦게 오셨네. "그래- 요즘 세관이 하도 시끄러워서 나도 도무지 정신이 없는, 이거 누구 신발이니?" (현관으로 들어서는 늘씬한 여인이 있었다. 겉보기로는 삼사십쯤 되어 보일까? 입다물고 있으면 무게잡는 것처럼 보이는 현민과는 달리 얼굴에 명랑이라는 글자를 써붙인 것 같은, 현민의 가무잡잡한 피부의 출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눈이 랑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에 딱 멎었다. 그리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반짝이는 노란 눈동자가 들려올라왔고... 자, 그러면 이제 당신이 나이터울이 많이 나는 두 형제를 슬하에 둔 50대의 여인이며, 그 중 맏이는 적잖이 사랑꾼 기질이 있어 연애를 잘 했는데 둘째는 좀 꽉막힌 성격이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학창시절에 연애도 제대로 못해볼 것 같았던 둘째아들이, 조그맣고 귀여운 동급생의 손을 꼭 맞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 때 당신이 할 반응으로 알맞은 것은?) "어머." (현민과 랑을 번갈아 바라보던 가무잡잡한 피부의 아주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곤 온 얼굴에 보기 좋은 함박웃음이 핀다.) "뭐야 채현민~ 제 형이랑은 달리 무슨 절간에라도 들어갈 것처럼 굴어서 걱정했는데, 그런 예쁜 친구가 집에 놀러온다고 하면 엄마한테 톡이라도 한 마디 남겼어야지~ 케이크라도 사다둘 걸 그랬네." (현민의 얼굴이 죽상이 됐다. 맞잡은 손이 실시간으로 따뜻해지는 게 랑에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니까 얘는- 내 공부 도와주러 온 거야. (얘는- 이후에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야 현민은 간신히 대답했다. 공부 도와주러 온 거라는 말이 딱히 어려운 말은 아닐 텐데.) "그렇구-만-?" (다 안다는 듯이 싱글벙글하면서 고개를 까닥 기울이는 아주머니를 현민은 불퉁스레 쏘아보았다.) 아무튼 얘는 하랑이... 배하랑. 공부 잘하는 애야. 하랑아. 저 분이 우리 어머니. (소년의 얼굴을 보면 올 가을에 홍시가 풍년이다.) "그렇구나. 하랑이라고 하는구나? 우리 아들이 실례되거나 눈치없는 짓은 안 했으려나 모르겠네~"
(커다란 후리스 위에서 가방이 헛돌았다. 랑은 당신이 소매를 잡은 손을 고쳐쥐어서 맞잡았을 때도 후리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후리스 위에서 한쪽 가방끈이 정처없이 어깨 아래로 주륵 흘러내릴 때도 눈치채지 못했다. 가파르다는 계단을 당신의 손에 의지해서 다 내려왔을 때. 이때 가방끈을 어깨 위로 올리며 고쳐 메다가 눈치챘다. 손에 왜 부드럽고 따뜻한게 닿았는지 모르겠다. 코트에 털이 있기는 하지만, 안감으로 있는 양털이다. 교복 자켓까지는 챙겨놓고 정작 외투는 까맣게 잊어먹었다. 다시 외투를 챙기러 올라갈 수도 없고, 이미 당신의 손을 잡고서 당신의 어머니와 마주해버렸다.) (당신의 어머니에 시선이 랑에 닿았다. 번갈아 바라보던 시선이 랑에게 왔을 때, 방긋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총 다섯 글자일 뿐인데도 구김없이 성격 좋고 밝다는 것은 캐치할 수 있을 만큼 사람 좋은 인사였다. 동글한 눈은 시선을 거두기 전까지 꼭 눈을 맞추고서 웃어보였다.) (그리고서 랑은 모자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어서 대화에 귀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는 당신이 낯 붉히기 충분한 이야기여서, 언뜻 당신을 올려다보자니 예상이 빗겨나갈 일은 없었다. 손에서도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도 그에서 비롯됐겠고, 랑은 기어코 당신이 불퉁스런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너무나도 투명한 당신의 반응에 웃음지어지고 말았다. 웃음소리라도 안 낸게 다행이다.) 앗, 네! 어머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만 아주머니라고 부를게요- 현민이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요. (짓궂은 소리를 하면서 살풋 웃는게 당신에게는 얄미워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늦게까지 있어서... 실례했습니다아. (이번에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인사 후에는, 아마 더 대화가 길어졌다가는 괴로운 건 당신 뿐일 것 같아 바로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도 지금 가보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후리스 이야기가 언급되면 그건 랑도 부끄러울 것 같았다.)
(첫 인사부터 랑이 어떤 아이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더군다나 저 여인은 비뚠 구석 없이 구름마냥 몽실몽실한 아이가 자기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아주 흡족한 모양이다.) "현민이 넌 해열제 하나 먹어야 되겠다." (짐짓 걱정하는 어투지만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걸려있는데, 빨개지는 거 놀려먹는 건 이 아주머니도 랑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양이다. 의도치 않게 취미의 공통분모를 찾았다?) "실례는 무슨. 우리 집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얘. 아주머니가 많이는 못 준다만 이거라도 받아서 맛있는 거라도 사먹고 학용품도 좀 사렴." (그리고 자연스레 열리는 지갑. 신사임당 여섯 장이 덜컥 건네진다. 현민이 귀뜸한다.) ...안 받으면 네 소매에 쑤셔넣으려 하실 테니까 받아둬. (지금 가보겠다는 랑의 말에 현민의 어머니는 손목을 들어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금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러네, 벌써 시간이 꽤 늦었네.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니?" (하고는, 그녀는 현민에게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친구를 밤길에 혼자 보낼 생각은 아니지?" (어머니의 말에 현민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집까지 바래다줄 생각이었어요. (하며, 현민은 풀어놓았던 져지의 지퍼를 지익 올렸다. 그리고는 랑을 돌아보며, 아까 랑이 했던 말을 랑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같이 가. "그래야지. 바래다주고 오렴." (현민의 어머니는 랑이 입은 후리스를 잠깐 바라보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현민이네 집에는 언제든지 와도 괜찮으니까 언제든 부담없이 와~ 다음번엔 티라미수라도 준비해 놓을게." (하고 흐뭇하게 웃은 현민의 어머니는, 난 이제 방해하지 않을게~ 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방 쪽으로 사뿐사뿐 멀어진다. 현민은 랑에게 이제 가자는 듯 랑을 돌아보았다. 손은 여전히 꼬옥 잡은 채다.)
(해열제 이야기에 조그맣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어버리고 만다. 잘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졌다. 그리고 당신을 놀릴 방법을 한 가지 더 배우게 되었다. 다음번에는 해열제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놀릴 지도 모르겠다.) 고생은요, 하나도 안 했는- 으앗? (많이는 못 준다는 말이 맞지 않는 금액이다. 맛있는 거라고 사먹고 학용품도 좀 사기에는 큰 금액에 당황했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어찌 해야할 지를 몰라 당신이 귀뜸하기도 전에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받아두라는 귀뜸에 이 돈이 쓰일 방향은 정해졌다. 당신에게 온전히 돌아간다면 그게 베스트, 못해도 당신과 노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당신과의 다음을 생각해버려서 놀랐지만, 여기서 티내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현민이랑 맛있는 거 사먹을게요. (신사임당 여섯 장을 조심스레 받아쥐었다. 당신에게 다시 돌려주면 티가 날까 고민한다.) 네, 드렸어요. 원래도 이때 집 가서 괜찮아요! (걱정하실 필요없단 듯 방글방글 웃어보이고, 이어지는 대화는 끼어들 틈새도 없이 당신이 바래다주는 결론이 나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늦은 모양이다. 대신 랑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헤어지는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준비 안 하셔도 괜찮아요! 다음에는 제가 뭔가 들고 올게요. (그리고 안녕히계세요 까지. 분명 당신의 어머니의 시선이 후리스를 바라본 것 같은데,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때문에 랑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서 있었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마침 당신이 랑을 돌아보아서 타이밍좋게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안 피곤해? (피곤하면 안 바래다줘도 된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포석이다.)
(현민이네 어머니와 다음번에 대화할 때, 어쩌면 '그렇잖아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인데' 라는 걱정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용돈의 행방에 대해서는 현민에게 돌려주려 하면 거부하겠지만, 랑과 비슷한 생각인 '데이트 예산으로 써버리자' 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안 피곤해? 하고 랑이 말을 꺼내자, 현민은 랑을 빤히 마주보았다.) 딱 너 바래다주고 오면 꿀잠자기 좋을 만큼 피곤해.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도망가게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랑만의 착각일까?)
(쐐기를 박은 당신의 말에 랑은 졌다는 듯이 웃었다.) 응, 그럼 같이 가자. (랑은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갔다가 쉽게 멀어지고, 또 쉽게 다가갔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웃어주지만 누구에게나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지금 한 번 그것을 막았다. 랑은 당신의 끈기와 인내가 어디까지 닿을지 궁금했다.) 지금 나가면 깐쵸 있을까? 자고 있으려나~. (신발을 신으면서 깐쵸의 이야기를 한다. 거리두는게 느껴진다고 해도 착각이 아닐텐데, 랑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