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인상을 찌푸려도 랑은 속없이 구김없이 웃었다. 웃음소리까지 내면서 살풋 눈을 접었다. 당신이 표정을 찌푸린대도 그 얼굴에 머무는 붉은 빛이 화났다고는 생각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신을 따라한 손부채질은 멈추었다.) (당신의 대답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10시까지 있어도 괜찮겠구나- 한 것이다.) 안 고꾸라졌다니까. (균형을 잃었을 뿐이야- 하고 툴툴거렸다. 그렇다기에는 무릎에 붙은 반창고의 존재감이 확실했다. 지금 서로 맞잡고 있는 손에도 한두개 쯤은 반창고가 붙어있다. 그래도 거의 다 나아가는데,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을 지도 모른다.) 늦게 와도 뭐라 안 해~.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면 되니까. 그리고 생각대로 공부를 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일찍 당신이 돌아왔다. 펼쳐진 노트는 정리를 하다 말았기에 윗부분은 채워져있었으나 아랫부분은 텅 비어있었다. 채워진 부분은 아기자기 알록달록하게 꾸며진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이어리를 꾸미는지 정리노트를 만드는지 모를 것만도 같다. 랑은 그 아랫부분을 채우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다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화들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당신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마냥.) 뛰어갔다 왔어? 진짜 금방 왔네- (당신이 쟁반을 내려놓을 수 있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들을 한 쪽으로 밀어냈다.) 뛰어서... 카페 다녀온 거야? (쟁반 위에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는 하는 농담이다. 맛있어보인다거나 얼른 먹자는 말은 없었지만 시선이 계속 머무르는게 어쩐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랑은 우유도 흰 우유를 좋아했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질 않으니 당신이 그 취향을 알 리 없고, 랑 또한 당신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취향에 꼭 맞는 음식이 쟁반 위에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일까.)
(장난을 치는 게 놀림받는다는 자각은 있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랑이 장난치는 모습이 곤혹스럽게도 '귀엽다' 고 다가온 탓에, 그래서 현민은 더 인상을 쓰는지도 몰랐다. 물론 현민이 그걸 대놓고 입밖에 낼 만큼 느끼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그는 그런 능숙한 플러팅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 어찌됐건 10시까지 있어도 괜찮은 건 맞다. 안 고꾸라졌다니까- 하는 말에 현민은 아 그러셔? 라고 눈으로 말하며 랑의 무릎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앗! 그러나 좀전에 랑이 치마 끝자락을 걷어올리는 장면이 떠올라버리는 바람에 반사 데미지를 입었다! 잽싸게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린 현민의 얼굴이 약간 더 빨개졌다.)
뭐... 혼자 오래 두기 싫어서. (현민은 쟁반을 내려놓으며 무덤덤하게 말하다, 본인의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다. 귓바퀴가 빨개진다.) 손님을 혼자 내버려둘 순 없잖아. 그렇지? (하고 현민은 랑을 마주보고 탁자 반대편에 마주앉았다. 쟁반 위에 딱 랑의 취향의 음식이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어머니가 사둔 다과가 크로플일 뿐이었고, 즐겨 사먹는 아이스크림이 그 기본 삼색 아이스크림-딸기, 바닐라, 초콜릿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그 홈아이스크림일 뿐이었으며, 맛보다는 건강상의 이유로 흰 우유를 선호하는 가풍이 있었던 것뿐이다. 기분좋은 우연이다.) 아무튼, 그러면 공부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아까 현민의 방을 설명할 때 서술하는 것을 깜빡했지만, 이 방 한가운데서 두번째로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무뚝뚝하고 무덤덤하며 중2병의 잔재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방의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침대 머리맡의 커다란 베이지색 곰인형이었다.)
(랑은 당신의 귓바퀴가 빨갛게 오르는 것을 보고 대답을 일부러 미뤄두었다. 반대편에 마주 앉은 당신이 그렇지 않냐 물어올 때도 눈을 깜빡이고 말 뿐이다. 그렇게 당신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빨개진 거 알아? (대답은 하지 않고 검지로 자신의 귀를 가리킨다. 당신의 귀를 가리킬 수는 없으니, 너 여기 빨개졌어- 하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치, 손님이 사고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서야 답을 한다. 사고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랑은 침대쪽으로 몸을 틀어서 무언가를 가리킨다. 커다란 곰인형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저 인형을 안아본다거나! (안아보고 싶다는 뜻이랑 다를 바 없다. 랑은 이 말이 나 저 인형 안아봤어- 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말을 덧붙였다.) 걱정마, 아직 안아보지는 않았어. (진실이었다. 랑은 방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곰인형을 발견했을 때, 안아볼까 하는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고민에서 그쳤다. 당신이 허락해준 범위는 책장 뿐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곰인형에게 시선을 뺏길 수 밖에서는 없어서, 책장에 음악 잡지를 다시 꽂아두고 책상 앞으로 돌아오기 전. 그때 곰인형을 한번 쿡 찔러보기는 했다.) 아니, 공부 전에 다른 거부터 해야지. 학생의 실력 파악! (그렇게 대답한 랑은 쟁반 위에 있던 우유 한 잔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우유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가방을 뒤적거린다.) 쨘. (공부할 때 쓴다기보다는, 다용도로 쓰이는 연습장으로 보이는 노트 한 권이 나왔다. 그것을 당신에게로 건넨다.) 일단 국영수만. 열심히 만들었다? (펼쳐보면 문제들이 나열되어 있을 것이다. 세 과목이 각각 스무문제씩 내어져있는 시험지였다. 다만 시험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모든 장마다 문제 왼편으로 여백을 남겨두고 무언가 적혀있단 점이다. ‘현민이 화이팅!’, ‘앞으로 10문제 남았어!’ 라는 응원도 있고, 웃는 표정 그림, 꽃 모양 그림 등으로 낙서가 꾸며져 있기도 했다. 훈련으로 수업을 빠지고는 하는 당신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 싶은 개념 등에 대해 적은 힌트까지.) 너 이거 다 풀어야 돼.
...당연히 알지. ( >:( 표정. 어설프게 둘러댈 여지도 없어서 현민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자신도 뜨겁다 느낄 만큼 귓바퀴가 화끈화끈거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 보기에 변화가 없을 리가 없다.) 아니, 내 말은...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냐는, (그리고 현민의 뺨까지 빨개졌다. 앗차 기타까진 숨겼는데 제일 중요한 걸 못 숨겼구나. 열일곱 살이나 먹은 사내놈이 뭔가를 끌어안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잔다는 따위의 나약한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TMI를 덧붙이자면, 현민은 랑이 기타를 못 본 걸로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손빠르게 행동한 탓에 랑이 정말로 기타를 못 봤다고 생각하고 있다.) ......... (빨개진 얼굴로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안아보지는 않았어- 하는 랑의 말에 말없이 머리맡으로 척척척 다가가 곰인형을 집어들고는 랑에게 내민다. 랑이 그걸 받아안으면 랑에게 안겨줄 것이고, 랑이 받아안지 않으면 적당히 침대 옆의 빈 자리에 놓아둘 것이다. 껴안기 좋지만 비스듬하게 안으면 뭔가 먹는 걸 방해받지는 않을 정도의 적당한 사이즈의 곰인형에서는 현민에게서 나는 우드 계열의 향에 섬유유연제의 플로럴한 향이 옅게 섞여서 나고 있다.) -어, 그래. 고마워. (하고 랑이 내민 문제집을 현민은 받아들고 펼쳐보았다. 왠지 내용보다도 필적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잠깐 랑의 작고 하얀 손을 한번 곁눈질해 보고, 노트 위로 시선을 올린다. ......중증이다. 현민은 글자의 모양이 아니라 글자가 담고 있는 내용에 주의를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랑이 직접 웃고, 꽃을 내미는 것 같은, 글자 위에 묻어있는 생생한 감정들이 시판 문제집에 정해진 폰트로 인쇄한 활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움직이고 있어서... 현민은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심박수가 서서히 에스컬레이트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됐다.) 알았어. (이걸 다 풀라는 랑의 말에, 현민은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구나- 이번에는 내가 놀려서 그런 거 아니다? (너 혼자 갑자기 빨갛게 변했어. 그 의미를 담아 말한 랑은 쿡쿡 작게 소리내며 웃었다. 이번에 빨갛게 변한다면 그건 놀려서 빨갛게 변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장미꽃보다 네가 더 빨갛겠다. (사과나 토마토를 제끼고서 장미가 생각난 이유는 그 가시 때문이다. 당신이 툭툭대거나 찌푸린 표정을 짓고는 하는게 장미의 가시가 생각났다. 뺨까지 빨갛게 오른 당신이 또 표정을 찌푸린다면 랑은 생각할 것이다. 정말 장미꽃이라고.) 와아~. (당신이 내민 곰인형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랑은 내밀어진 곰인형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곰인형은 무언가 익숙한 향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무슨 향기인지 기억하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 곰인형에 파묻힐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가, 인형이 푹신하다거나 기분좋단 이야기를 하려 당신을 보았을 때. 그때 바로 떠올렸다.) 여기서 너랑 똑같은 향기 나- (넘어지려던 것을 잡아줬던 당신의 품에 부딪혔었다. 그때 풍겼던 향기를 기억한다.) 그래도 나름 시험이니까 제한 시간도 있다? 1시간 동안이야! (랑은 한쪽으로 밀어냈던 책과 노트 등을 다시 앞으로 가져온다. 당신이 문제를 푸는 1시간 동안 마저 정리노트를 만들 것이다. 당신이 대답을 하고서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폰에서 타이머를 찾아 1시간 동안 흘러가게 두었다. 당신이 시간을 보고서 문제마다 시간 분배를 할 수 있도록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이제 노트를 만들면 되는데, 크로플에 시선이 계속 가는게 문제다. 어쩔 수 없는게 6시가 지난 시간이다. 저녁 시간대에 취향에 맞은 음식이 눈 앞에 있다니. 그렇지만 준비해준 당신은 문제를 풀고 있는데, 방해되게 앞에서 먼저 먹기도 좀 그랬다. 그러다가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결국 랑은 조용히 먹기를 택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이럴 때에는 작은 소리 하나조차도 왜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랑은 조심스레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서 행복해했다.)
(이 소년이 붉은 얼굴을 하고 가시를 톡톡 세우는 장미라면, 랑은 어린 왕자가 되는 걸까.) 빨개져서 싫냐? (붉은 얼굴을 하고 그는 툴툴대면서 랑에게 인형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랑이 한 마디 얹어서 던진 말에...) ............ (온 얼굴이 잘 익은 감색이 됐다. 이젠 툴툴대지도 못하고 화난 표정도 못 짓고 온 얼굴이 갈피를 잃어선 얼굴 표정이 주체가 안 된다. 현민이 결론적으로 내린 궁여지책은 두 손바닥을 들어올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손까지 빨개질 정도라 얼굴이 안 보인다는 걸 빼곤 별 차이가 없었지만. 한동안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현민은 손가락 한편을 빠끔 벌려서 그 틈으로 랑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그... 향기...면, 냄새가 이상한 건 아니지? (뭐가 부끄럽다고 그러는지. 온 몸의 향기는 처음에 고꾸라지려던 랑을 받아줬을 때 이미 다 내어줬는데 말이다. 현민이 어떤 심경인지도 모르고, 소년의 삶이 파편화되어 숲 냄새로 묻어있는 곰인형은 향기롭기만 하다.)
(...결국 현민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문제집으로 주의를 돌리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다만 문제는, 문제집도 워낙에 귀여웠던 탓에 기껏 가다듬은 안색과 마음이 또 흔들려버리고 만 것일까.) 맘껏 먹어. 손님 대접하려고 가져온 건데... (문제에 집중하면서, 현민은 목이 타는지 우유를 몇 모금 마셨고, 이따금 그가 풀기에는 어렵되 못 풀 것 같지도 않은 문제가 나와서 문제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면 이따금 포크를 들어 크로플과 아이스크림을 잘라먹기도 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크로플을 먼저 먹었다.) (알람 소리가 먼저 울렸다.) 뭐야, 1시간이 벌써 지났어? (아무래도 그가 문제를 다 푸는 것보다 시간이 다 가는 게 더 빨랐던 모양이다. 기본 개념을 알고 있는지 체크하는 간단한 문제라고 해도 1시간 동안 60문제, 문제당 1분이라는 시간은 평일 수업을 3교시에서 6~7교시밖에 듣지 못하는 축구부에게는 벅찬 것이었나 보다.)
(전체적으로 수업을 중간중간 빼먹은 티가 난다...는 느낌일까. 기본적인 이론에 대해 묻는 문제는 다 맞췄는데, 이따금 엉뚱한 부분에서 오답이 나오기도 했고, 기존 교육과정을 응용한 심화 교육과정 문제는 거의 틀렸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국어 문제는 17개가 정답이었고, 중간중간 심화과정 문제 중에서 자신이 모르는 이론이나 공식인데도 불구하고 랑의 메모에서 힌트를 얻어서 해결해낸 문제가 보인다는 점일까.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수학 과목은 시간이 모자라서 그런가 11번까지밖에 풀지 못했다.)
너 아까도 그 말 했었는데. (현관문 앞에서의 일이다. 붉힌 얼굴이 터질 것 같다하니 당신이 얼굴 빨개져서 싫냐고 툴툴거렸다. 랑은 그때 싫다고 한 적 없다 대답했었다. 이번에도 같다.) 싫다고 한 적 없다니까~. (당신이 안겨주었던 인형에 포옥 기댔다. 그럼 다시 당신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문득 당신을 바라보면, 이번에는 유달리 심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손까지 붉게 달아오른 당신을 보며 랑은 눈을 깜빡였다. 곰인형은 여전히 당신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고, 당신이 손 틈새로 바라보면 웃었다. 틈새로 보이는 시선을 꼭 맞추고서 찡긋 웃는다.) 응- 향기 좋아. 안 이상하니까 안 부끄러워도 돼. (랑은 당신이 혼자서도 곧잘 붉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무언가 말을 얹으면 파장이 더 큰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랑은 당신이 가라앉을 동안 안고 있던 곰인형을 자신의 왼쪽 옆자리에 앉혀두었다. ) 으악, 들켰다~. (나름 조심한다고 조심한 거였는데, 랑은 조그맣게 웃고서 조심하기를 그만뒀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크로플 하나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우유도 반 잔이 사라졌다. 그동안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리 노트도 꼼꼼히 만들어가고 있었고, 당신을 위한 문제집을 만드느라 쓴 시간만큼 밀린 부분까지 다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마침 1시간이 지났다는 알림이 울릴 때였다. 랑은 타이머를 껐다.) 응, 벌써 지났습니다~. 이제는 채점 시간이야!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냈다. 동그라미와 선을 거침없이도 그린다. 다만 못 푼 문제들은 건들지 않았다. 어려워서 풀지 못한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못 풀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채점을 끝낸 시험지 노트를 다시 돌려주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답싹 당신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서 앉는다.) 못 푼 문제들 중에 진짜 몰라서 못 풀겠는 거 있어? (원래 랑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곰인형만 덩그러니 앉아있다. 지금 랑은 곰인형에 묻어있던 당신의 향을 조금 가져온 채 당신의 옆자리에 있다. 랑은 시험지 노트를 제일 처음 틀린 문제가 있는 장으로 넘겼다.) 우선은 틀린 거 같이 풀어보자. 그래도 국어는 3문제 밖에 없어!
그...... 그랬었다.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비단 등교길에서부터 지금까지가 아니라, 랑이, 네가 모퉁이를 돌다가 내게로 고꾸라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숨이 붙어있을 뿐,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금씩 가라앉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날들에 신선할 정도로 새롭고 자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네가 그것을 친절하게 지적해준 덕분에 도무지 어떻게 손에서 얼굴을 떼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열이 오른 머리로 공부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성적이 형편없거나 하면 절반 정도는 열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열을 식히기 위해 현민은 아이스크림이 반쯤 녹은 크로플로 시선을 돌렸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하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가 남아있다.) 둘 중 뭐 먹을래? (포크는 집어들지 않고 있다가, 마침 랑이 되돌려주는 시험지를 받아든다. 그러다 랑이 불쑥 옆에 붙어앉자 흠칫 놀란다. 본인 딴에는 흠칫하지 않으려고 애깨나 쓴 것 같지만 약간 움찔하는 게 랑에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향기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다행히 시험지로, 정확히는 폰트가 아닌 컨텍스트로 의식을 집중하자 훨씬 견딜 만했다.) 어. 그 쓰이는 공식이라거나 문법이라거나를 아예 모르니까. 국어는 좀 쫀심상하네. 나름 책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책장에 나름대로 전문 서적이 몇 권인가 있었으니 의외로 독해력도 괜찮은 모양이다. 예전부터 현민의 보잘것없는 학과성적 평균은 국어에 크게 기대고 있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