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쉬는 시간에는 자리에 있었다. 아침 일찍 등교하니 그날 하루 시간표에 교과서나 노트 등은 미리 자리에 준비해둘 수 있다. 그러니 다들 의자에서 일어나는 쉬는 시간에 일어날 이유는 그다지 없었다. 화장실이나 매점에 갈 일이 생기면 모를까. 그런 랑이 드물게 쉬는 시간에 창가에 붙었다. 운동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그곳에서 당신을 찾았다.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서, 축구부 사이에 있는 모습을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 동안 눈에 담았다. 이따 방과후에 만나면 찾았다고 얘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빨갛다. 오늘 하루동안의 당신이다.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짐작해보지만, 그때는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듯 한데. 오히려 덤덤해보였다. 대뜸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부터 쭉. 이것도 방과후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깐쵸는 같이 안 가? (당신이 오후 훈련을 끝내고서 교실에 왔을 때만해도 그대로 교실에서 있을 줄 알았는데, 당신의 집 대문 앞에 서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어졌으니, 도서관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공부를 하지만, 공부 때문은 아니니까. 그래서 당신을 따랐고, 오는 동안에는 ‘그렇게 집에 초대하고 싶었어?’ 하고 웃었다. 아침에 사라졌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깐쵸도 귀여웠다. 랑은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에 반응했다가 깐쵸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실례하겠습니다아. (조금 말끝을 끌면서 대문을 지나쳐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쳐 들어가면 마당이 딸린 이층집. 랑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집 외관을 눈에 담았다.) 나 너네 집에서 살고 싶어- (비오는 날 바로 문을 열고 나서면 빗방울이 반겨줄테고, 집 안에서도 마당에 떨어지는 비를 구경하기는 즐거울 것 같다. 하필 랑은 높은 층에 살아서 비를 보러 가려면 엘리베이터부터 잡아야 하고, 심지어 깐쵸도 없다.)
(물구나무를 선 채로 정수리로 콩콩콩 땅을 찍으며 뜀박질하면서 돌아다니는 귀신 이야기랑,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을 위한 교실 이용 안전수칙 같은 걸 듣고 어떻게 교실에 남아있냐고. 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따졌다간 이 당돌한 애가 또 얼마나 사람을 놀려먹을지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현민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생각해보니 세탁기 돌려놔야 되는데 깜빡했다고.' 라는 허접한 변명을 늘어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운동부라 빨랫감은 많이 나오는 편이었고, 엄밀히 말해 거짓말도 아니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주택은 모던하거나 값비싸 보이진 않았지만, 퍽 안락하고 아늑해보이는 집이다.)
그야 여기가 깐쵸 집이 아니니까. 쟤 집은 집앞 슈퍼에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돌려보면 작은 슈퍼의 옆 창고에 한가득 쌓여있는 상자들 중에 딱 고양이 드나들 사이즈의 입구가 뚫린 깐쵸 상자가 있다. 현민의 어깨에서 내려온 깐쵸는 바로 떠나지 않고 현민과 랑의 다리 주변을 맴돌다가, 랑의 발목에 몸을 부비며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현민은 그걸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깐쵸는 작별인사라도 하는 마냥 꼬리를 흔들어주고는 슈퍼마켓으로 멀어져 간다.) 뭐지, 얘 낯 되게 가리는데. (그렇게 말해놓고 한 박자 뒤에, 뭐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리감이 훅 좁혀지는 그 모습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가 않게 느껴지는 바람에, 현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하며 대문을 닫고 현관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랑의 이어지는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뭣. (귀까지 빨개졌다. 현민은 도어락에 손을 뻗다 말고 감색이 된 얼굴로 랑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부채질을 한번 하고는 다시 도어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언제든지 와. 공부 가르쳐 준다고 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쌍수 들고 환영하실 테니까. (삑삐빅삑삑삑. 삐리리릭. 현관 불이 켜진다. 타일이 깔려 신발 몇 켤레쯤이 놓인 현관과 헤링본 패턴으로 나무타일이 수놓이고 로코코 패턴 양탄자와 나무 가구들이 놓인 거실이 두 사람을 반긴다. 집에 확실히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게 맞는 듯.)
앗. (정말 그 과자 박스가 깐쵸의 집이었구나, 랑은 웃어버렸다. 깐쵸도, 깐쵸의 집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나와서 저 집 옆에 무릎을 모아 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산에 튕기는 빗소리를 듣고 싶다.) 거짓말, 깐쵸가 이렇게 애교가 많은데. (발목에 닿아오는 고양이의 털이 간지러웠다. 찬 공기 속에서 닿아오는 고양이의 체온도 간지러웠다. 소리내어 웃으며, 이유가 어찌 되었든 당신의 집에 온 걸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와아. (오늘 본 당신 중에 제일 빨갛다. 문을 열다 멈춘 당신을 보고 있자니, 새빨갛게 익어서는 마주보고 있었다. 손부채질을 하는 당신의 손과 얼굴색이 너무 달라서 랑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손발이 원래 차갑지는 않았지만, 바깥에 있다보면 차갑게 시리는 건 누구나 그렇다. 주먹 한번 쥐어보고, 온기가 머물긴 하지만 이 정도면 당신의 얼굴보다야는 당연 시원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쭉 손을 뻗었다. 당신의 얼굴에 톡 닿을 때까지. 새삼 자신의 손이 하얗게 보였다.) 너 얼굴 터지겠다- (작은 웃음소리.) 아침에는 안 그랬잖아.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물어보고 있었다. 데이트 신청에 비하면 방금까지 있었던 일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도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텐데.) 나 이러다 과외 선생님 되겠다. 나도 내 공부할 시간은 있어야지! 그러다 너 못 알려주게 돼~. (도어락 열리는 소리. 랑은 당신을 보고 있다 문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손을 떼어낸다.) 한 번 더 실례하겠습니다아. (이번에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외관도 그랬지만, 안쪽도 꼭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조용한 집안에 귀로 신경이 쓰인다.) 너 방은 어디야? 가서 기다릴게. 세탁기 돌려야 한다며. (신발을 벗으며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현민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는데, 사실 깐쵸가 랑과 마주치고 나서 현민이 있는 쪽으로 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만... 현민과 랑이 깐쵸가 보기에 상당히 스스럼없는 사이였고, 그래서 깐쵸도 랑에 대한 경계를 빠르게 푼 것이었다. 더군다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현민보다 랑이 훨씬 덜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복도에서 마주친 그 일 덕에 랑에게는 친구가 둘 생겼다. 시꺼멓고 부끄럼 많이 타는 남정네 하나, 눈치좋은 털복숭이 고양이 하나.) 그러니까- (뭐라 말을 하려던 현민의 말문이 막힌다. 랑의 손이 다가오자, 현민은 눈을 꾹 감았지만, 그래도 랑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뺨이 따뜻하다. 새삼 그의 가무잡잡한 피부색과 랑의 손등 색깔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얼굴 터지겠다며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에야 그는 겨우 눈을 떴다.) 나 이런 거 처음이라고. (얼굴의 열기는 가실 줄을 모른다. 몰?루로 일관할 수가 없어서 대답을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긴 했는데 대답할 만한 말이 이것밖엔 없다.) 뭐, 얼굴 빨개져서 싫냐? (하고 툭툭대는 소리를 낸 다음에 현민은 현관문을 열고는, 신발을 가지런히 한켠으로 벗어놓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한 가족이 살 만한 집인데 신발은 의외로 몇 켤레 나와있지 않다.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구두 한 켤레와 슬리퍼 두 켤레, 현민의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 샌들, 운동화 두 켤레 정도.) -말만 그렇게 하라는 거지. 너도 네 공부 해도 돼. (무마하려고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는데, 말하고 보니 네 좋은 대로 여기서 머물러도 좋아- 라는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나마 랑이 빨랫감 쪽으로 화제를 돌려줘서 살았다. 집의 어둠 속에 귀를 기울여보면 뭔가 특별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냥 일가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평화로운 집일 뿐이다.) 내 방은 2층 복도 오른쪽 첫번째 문인데... 너 스위치 어딨는지 모르잖아. 방까진 데려다줄게. (현민은 현관 옆의 스위치를 눌러 거실과 계단 전등을 켠 다음,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 랑에게 별생각없이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걸까?)
(따뜻하게 열이 오른 뺨. 그 뺨을 쥔 손은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도어락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을 때 떨어져버린다.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도 떨어졌을 것에다. 랑의 손이 당신의 뺨에 닿아있는 동안, 닿아있기 때문에 정말 터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가? 반 친구 집에 데려온 거? (처음이라는 것에 대해 짐작할만 한게 너무 많았다. 당장 지금 랑이 당신의 집에 오게 된 것부터, 내일 데이트 신청을 승낙한 결과 둘이 데이트를 하게 된다는 것도 있었고, 아니면 그저 여자아이가 당신을 놀려먹는 것 뿐일 수도 있겠다.)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가지런히 한 켠에 벗어진 당신의 신발. 랑은 그 옆에 신발 뒷축을 꾸기며 벗은데다, 서로 방향이 어긋나 놓여있는 자신의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신발들도.) 나만 난장판이네~. 집 들어오시다 놀라겠다. (당신 말고, 다른 가족 구성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학교가 편해. 오늘은 민폐 끼칠거지만! (늦게까지 있겠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앞서 말했던 10시까지는 있을 생각인게 분명했다.) 아무거나 눌러봐도 되는데. (스위치 눌리는 소리. 랑은 불이 밝혀진 거실을 보았다가 이어서 계단을 보았다. 계단에 발을 올리고 있는 당신이 이쪽으로 손을 뻗어놓았다. 랑은 손이 있으니 잡았다. 익숙하다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손을 잡고서는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이 앞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걸 기다리는 듯 하다.)
(랑의 손은 서늘해서 조금 더 머물러줬으면 했지만, 랑의 손이 뺨 위에 얹혀있으니 이상하게 뺨의 열도 도무지 가시지 않을 것 같은 생소한 감각의 충돌. 그래, 처음인 게 너무 많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이 만남은 그에게 너무 많은 처음을 안겨주어 버렸으니.) 다른... .... 이렇게 빨리 친하게 지내게 된 거. 나도 싫진 않은데... 그, 조금, 익숙하지가 않다고. (기껏 얼굴에 열기가 좀 가시나 했는데 또다, 또. 정말이지 이게 웬 때아닌 열병인가 싶다. 현민은 가볍게 손부채질을 했다.) 우리 어머닌 그렇게 까탈스러운 분 아니니 괜찮아. (하고 가볍게 말하다가, 랑이 덧붙인 말에 현민은 눈을 깜빡이다가 랑에게서 시선을 뗐다.) 어─... 그렇구나. (왠지 괜시리 폐를 끼쳐버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시작부터 참 자신만 곤혹스러운 건 아니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만 했었다. 이 충돌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차가운 얼음 하나가 식도에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주체모르고 날뛰던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랑의 손을 좀더 차분히 꼭 잡아줄 수 있었다.) 계단이 좀 가파르니까 발조심. 너 잘 고꾸라진다며. (기억하고 있었다.) (현민은 차분히 랑의 손을 잡고, 계단 위로 조심스레 이끌었다. 그리고 계단이 꺾이는 코너의 모서리 뒤편에, 계단을 오르는 입장에선 스위치를 못 보고 지나치기 딱 좋은 위치에 설치돼 있는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딸깍 하자 복도 불이 켜진다. 오른쪽 첫 번째 방이라고 했던가? 현민은 방문을 열었다.)
(정갈한 현관과는 달리 십대 소년답게 난잡스러운 방이었다. 침대 위에 놓인 남색 담요는 널부러진 꼴을 겨우 면한 수준이었고, 책상 위는 정리정돈은 됐는데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책장에는 만화책과 이런저런 잡지-음악, 축구, 남성 패션이 주된 주제였다-와 체육보건에 관계된 전문도서들이 꽂혀 있었는데, 분류별로는 정리돼 있었지만 순서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책상에는 필기구들을 정리해두는 통과, 잡동사니를 담아둔 다용도 케이스, 그리고 흔히들 007 가방이라고 부르는 서류가방만한 하드케이스와 책상에 세워두는 거울이 놓여 있었다. 아마 저 하드케이스에 피어싱들을 보관해두었으려나? 책상 밑에는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운동 훈련과 관계있는 것 같은 낯선 도구 몇 개가 쑤셔박혀 있었다. 벽의 옷걸이에는 항공자켓과 파카, 블루종, 트레이닝복 바지 같은 것과 축구공이 든 케이스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방 한 편을 온통 뒤덮은 건즈 앤 로지스 로고가 인쇄된 배너와, 그 아래 스탠드에 떡하니 기대어져 있는 맵시넘치는 기타 두 대였다. 한 대는 일렉트릭이고, 한 대는 통기타.) (현민은 가방을 벗어다가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자연스럽게 배너 밑단을 슥 들어서 그 기타 두 대를 덮어버린 뒤에, 그 옆에 있던 앉은뱅이 책상을 탁 펼쳐서는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나 세탁기 돌리고 방석 좀 가져올게. 뭐 만화책 같은 거... 네가 관심있는 장르가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심심하면 읽고 있던가.
(일단 눈에 띄는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고, 그의 방에 다른 것은 없나 찾아볼 수도 있다.)
(작아진 목소리를 놓친 랑은 웃었다. 이렇게 빨리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니 랑은 생각했다. 당신에게 특별히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담요를 두르고서 교실 밖으로 나서 당신과 마주친 그 때, 그 자리에 당신이 아닌 누군가 있었더라도 랑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을테다. 당신이 있었기에 이렇게 된 거라는 결론이다.) 계속 안 익숙해지면 계속 부끄러워 하는 거야?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난 좋아! (당신을 놀리면서,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손부채질을 한다.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혀보겠다며 손부채질을 하는 당신을 따라서.) 나 오는 거 알고는 계셔? (난데없는 손님이니까. 정말 갑작스러운 손님이고, 늦은 시간까지 있을 손님. 말을 잇다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는 당신을 보았다.) 응- 학교에 다 있으니까. (학교가 더 편하다는 이유.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 하나. 자신에게 다가올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다. 당신에게는 훌쩍 다가가다 못해 집에도 초대받았는데 이러자니 못됐다 싶다. 그렇지만 못됐다한들 말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고꾸라지는 정도는 아닌데-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을 뿐인 랑은, 당신의 설명에 놀란 듯 하다가 금방 웃었다. 웃기만 했을까. 조금 들뜬 듯 하다. 넘어지지 말라고 잡은 손인데 그 손을 살짝이나마 흔들거렸다. 그렇다고 계단을 오르는데 부주의했던 건 아니라 넘어진다거나 휘청이는 일은 없었다.) (복도에 불이 켜지고, 당신은 방문을 열었다. 랑은 당신이 방 안에 들어가면 그때 따라 들어갔다.)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말하면서 가방도 내려놓고, 외투와 교복 자켓도 벗어두었다. 외투는 방 안에 있는 옷걸이에 걸어두었고, 교복 자켓은 자리에 앉으면서 무릎 위에 덮었다. 평소라면 양반다리를 하고 앉더라도 아무렇지 않았을텐데, 오늘 아침 치맛자락을 들었을 때의 당신이 어땠는지 생각나서. 가방에서 먼저 필기도구랑, 당신이 교실에 찾아오기 전까지 교실에서 펼쳐두고 있던 과목의 교과서와 프린트물 등을 꺼냈다. 이제 공부를 하면서 당신을 기다리면 되는데, 방 안에 구경할게 너무 많았다. 축구공이 든 케이스나, 운동을 할 때 쓰려나 싶은 처음 보는 도구들도 신기했고, 서류 가방만한 케이스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특히 기타에 시선이 꽂혔다. 배너에 덮혀버리기는 했지만, 기타 두대를 보았다. 책장에도 음악 잡지가 있었다.) (만화책보다는 잡지에 관심이 갔다. 랑은 책장에서 제일 바깥쪽에 있는 음악 잡지를 꺼내들었다가,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다시 앉은뱅이 책상 앞에 교복 자켓을 무릎에 덮고서 앉았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 아마도 공부를 하고 있을 모양이다.)
(랑과 현민이 부딪힌 두 순간, 어디서부터 떨어져나온 것인지 모르겠는데 무언가 조그맣고 반짝이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톡 떨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끄럼많고 순진한 소년은 그것이 무슨 귀중한 것이라도 되는 마냥 조심스레 집어올려 받쳐들었다. 반짝이면서 동시에 따스한 그것은 자신이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기에, 그게 뭔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익살스럽게 손부채질을 따라하는 당신에게 불그레한 얼굴로 >:( 하고 인상 찌푸린 표정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가 집에 온다고 말씀은 드렸어. (랑의 질문에, 현민의 대답. 이어지는 학교에 다 있다는 말에 현민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폐 끼치는 쪽은 내가 되었나, 싶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랑의 손을 마주잡은 손은 꼬옥 쥔다.) 너 어저께도 거의 고꾸라지고 있었잖아. (랑과 이 소년의 실질적인 첫만남의 그 순간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잡고 있을래- 라고 하듯, 그것은 랑이 흔드는 대로 흔들릴지언정 랑이 계단을 다 올라올 때까지는 놔주지 않았다. 랑이 계단을 다 올라온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놓아주고, 방의 불을 켜고 가방을 침대발치에 두고 기타를 덮은 다음 앉은뱅이 책상을 펴주고, 그는 방문 밖으로 돌아섰다.) 금방 올게. (달카닥 문이 닫힌다. 실제로, 방문 밖을 나서고,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소리와 삑삑삑 하는 세탁기 단추를 누르면 으레 나는 기계적 신호음 소리, 유리나 도기 잔 같은 게 부드럽게 부딪는 쨍글 소리 같은 부드러운 생활소음이 아래층을 걸어다니는 인기척과 함께 지나가고 그가 다시 계단을 걸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기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왔어. (다시 달카닥 문이 열린다. 그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는데, 우유 두 잔과 아이스크림 얹힌 크로플 4개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