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왜? 깍지도 껴달라고 해줘? (잠깐, 아주 잠깐. 아까는 분명 분위기가 달랐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왔다. 다를 바 없이 짓궂은 소리를 하면서 웃었다. 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낯익게 들렸다. 하지만 손이 잡히는 기분이 이상해서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한 듯 하다. 조심스레 맞잡아주며 하는 당신의 말을 듣고 나면 더욱 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답하며 웃을 뿐이다.) 내일 많이 잡으면 되겠다- (뒤늦게 깐쵸가 사라졌음을 눈치챘다. 분명 당신의 어깨에 있었는데, 언제 사라졌을까 되짚어보려고 해도 아까 있었던 일에서는 깐쵸가 흐릿하다. 워낙 인상깊은 일이었어야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얻ㅎ 데이트 신청을 하던 당신만 선명하다. 포기하고서 주변을 살펴보면, 벌써 교문이 보일 만큼 와 있었다. 깐쵸를 더 찾아보려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이쪽을 보고 있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부끄럼타던 현민이 어디갔어~. 돌아오면 놀라겠다. (순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보니 처음으로 온전히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금은 괜찮으니까, 내일 잘 잡아줘! (놓은 손을 얼굴 옆까지 올리고, 옆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인다.) 손 놓치면 데이트 끝이다? 얄짤없이 앞으로는 쭉 도서관 데이트야. (공부 알려주기로 했었는데, 어쩌다 공부는 한 번도 가르쳐주지 못 하고 데이트부터 하게 되었는지. 데이트를 어떻게 하는 건지도, 당신과의 데이트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어서 내일이 궁금했다.)
몰라. (아까는 거칠게 툴툴대는 어조였다면 이번에는 느릿하게 받아주는 어조다. 아깐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것 같더니 이번엔 어째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주름투성이 셔츠 위로 다리미가 한 번 지지고 지나간 것마냥. 파우더리 냄새. 손, 따뜻하네. 정도가 현민이 할 수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그래도 되고. (아마, 급발진해서 온몸을 던져 그 뻣뻣하고 단단한 체념에 헤딩을 한 후유증이 아닐까. 멍해져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려나. 랑이 뒤늦게 깐쵸를 찾으려는 듯 고양이터럭만이 남아있는 어깨를 두리번거리자, 현민은 등뒤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는 시장 입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깐쵸 걔 시장 입구쯤 오면 어깨에서 내리더라. 하교길에 잘 찾아봐. (랑이 손을 놓자, 현민도 랑의 손을 가볍게 놓아주었다. 낯선 온기며, 낯선 향기가 손에 한가득 묻어있다. 제정신이 돌아올 오전 훈련때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려다가 뒤늦게 느껴지는 그 냄새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힐 것이라는 건 까마득하게 모르고.) 도서관 데이트는 오늘 실컷- 아 맞아 오늘 축구부 오후 훈련이지. 너 언제까지 있냐, 6시 넘어서도 있으면 찾아갈게. (하고 멍한 머리로 현민은 뒷생각없이 약속했다. 랑이 말마따나 부끄럼타는 현민이가 돼서 오후 늦게 도서관에 찾아갔다가 오늘 아침 빨개지지 않은 얼굴에 이자까지 쳐서 한가득 얼굴이 빨개지게 될 거란 것도 모르고. 교문이 저만치에서 차츰차츰 가까워왔다.)
>>147 코튼이나 베이비파우더 같은 그런 느낌의 향을 말하는 거였구나.. 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종류의 화장품이 나왔나 해서 엄마가 틴트를 보고 느낀 문화충격을 내가 느낄 차롄가 싶었어 덧붙이자면 현민이가 쓰는 데오도란트는 은은하게 스파이시한 편. 스킨과 섞여서 피톤치드 느낌이 있는 침엽수림 향이야
(모르겠다는 대답에 앞서 당신이 했던 모르겠다는 대답을 떠올렸다. 그때는 심통난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쪽은 똑같이 굴었다.) 그럼 누가 알아. 바보! (똑똑하다는 말을 취소하는 대신 바보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이번에도 산뜻 웃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되면 알려줘. (계속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 당신에게 공부를 알려주는 것보다야 당신이 알려주어야 할 것이 더 많아지겠다 싶다. 그래서 조금 웃었다.) 밤에는 깐쵸도 자러가야지. 다음에 또 보면 되니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교는 밤늦을 때 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 반가운 고양이가 있다면 인사는 마다하지 않겠지만.) 6시 넘어서 오는거면- 교실에 있을게. (학교 도서관은 6시에 닫는다. 그런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한 건 방과후에 바로 시간이 나서 같이 공부할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둘이 같이 앉아서 공부하기 편한 곳은 아무래도 도서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옆자리나 이쪽의 옆자리를 빌려야할 모양이다.) 나 진짜 늦게 가. 우리 반 문 맨날 내가 잠궜어. (방과후에 들썩이던 학교가 조용해지고, 푸른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다 점점 어두워질 때까지도 교실에 있었다. 그저 공부를 할 뿐이다. 가끔은 창가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운동장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 당신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오늘은 한 번 당신을 찾아볼까 싶어졌다. 차츰 가까워져 오던 교문은 이제 발앞에 있다.) 근데 그래도 돼? 피곤하겠다- 오전에는 훈련 없어? (아침에 운동장을 뛰고 있는 운동부 학생들을 본 기억이 있다. 어느 부인지도 모르겠지만.)
(바보! 하는 말이 장난스레 툭 치고 간다. 바보, 바보. 참 걸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바보가 된 것 같다고 그도 생각하던 참이다. 그래서 랑을 따라 현민은 웃었다. 랑의 입가에 걸리는 미소에 비교해보자면 이게 입꼬리가 움직이는 건지 마는 건지 싶었지만 어쨌건 현민의 기준에선 웃음이었다.) 교실? 아, 여섯 시면 도서관 문이 닫히나 보네. (랑을 만나겠다는 약속을 잡기 전까지 현민은 학교 도서관과는 별 연관 없는 삶을 살았기에 학교 도서관의 개폐장 시간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히도 머리가 바보가 된 만큼 다른 쪽으로 지능이 몰려간 건가, 현민은 어렵지 않게 도서관이 그 시간에 닫나-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피곤하면 우리 집에 가서 공부하지 뭐. (현민은 별생각없이 가볍게 말을 툭 던졌다. 지금은 딱히 자신의 말에 의미같은 걸 생각하는 골치아픈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래, 늦가을에 문득 맞닥뜨린 낯선 봄내음에, 취해버린 모양이다.) 운동부가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등교하는 이유가 있지, 오전 훈련 준비. 나같은 축구부 애들은 1~2교시는 빼먹고 3교시에 교실에 올라오잖아. (시답잖은 부활동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교문을 넘어가고 있다. 별로 눈에 띄는 사람 없이 한적한 교문이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 이상한 등교길도 슬슬 끝인 모양이다.)
뭐야, 바보 좋아하는 거야? 바보~. (여태 봐온 표정과 비교한다면, 당신이 웃은 건 이쪽도 계속 웃게 하기 충분한 이유였다. 눈웃음 지으며 당신과 눈을 맞추더니, 짓궂은 웃음소리도 내었다.) (당신의 추론은 정답이었고, 그래서 응- 하고 길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발이 교문을 밟았다. 학교에 들어섰지만 이른 시간에 등교했으니 학교는 아직 떠들썩하지 않다.) 그건 안 돼. 너희 집에서 10시까지 있을 수는 없잖아. (10시는 공부를 알려준단 이유가 있다한들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이다. 분명 폐가 될 만큼의 시간이었고, 당신이 그렇게나 오래 공부할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오전 훈련도 오후 훈련도 있다는데 더욱이 안 될 일이다.) 그럼- (오전 훈련이 있다는 당신은 교실로 올라가지 않겠지. 자신은 교실로 올라갈테니 같이 하는 등교길은 여기까지가 끝이라 생각했다.) 이따 교실에서 봐? 방과후에 도서관으로 가면 안 돼- (당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 하늘 색을 담은 눈동자가 오롯이 당신을 담고 있다가 웃으며 사라졌다. 그리고는, 이제는 홀로 타박타박 교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떠난다.)
일찍 와서 늦게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했지만 역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하는구나, 랑이... ( . .) 막레로 받을게, 새 스레로 와서 첫 일상이 너무 따끈따끈한 덕분에 며칠 동안 저녁이 푹신푹신 랑이 잔망스럽고 귀여워. 랑이가 가분좋다고 느낄 수 있는 애정표현 다 해주고 싶어
아니면 현민이 '우리 집에 있다 가던가' 라는 소리를 해버렸다가 진짜로 현민이 방에 가게 돼서 현민이 방 구경한다거나? (이러면 현민이 방에 떡하니 놓여있는 기타 두 대를 바로 보게 되겠네) 현민이네 방에 가면 볼 건 많을 거야 악세사리 관련 잡지라던가 현민이의 피어싱을 포함한 악세사리 컬렉션이라던가 꽤 펑크한 느낌의 방인데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생뚱맞은 곰인형이라던가 물론 시내에를 가도 현민이가 자주 가는 피어싱샵에 가게 되거나(랑이가 가던 샵과는 분위기가 좀 다른) 레코드샵 같은 데를 가거나 할 수 있겠지만 말야
>>170 시간순으로 따지면 3->2->1인데 차례대로 해보는 건 어떨까 3을 골라도 현민이는 단순히 '얘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거려나. 그러면 일단 우리 집에 데려온 것도 시간 뺏은 셈이니까...' 하는 생각에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가. 우리 집에선 그것갖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라는 군소리를 할 것도 같고
(결과적으로, 현민은 그 날 하루종일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말을 들었다. 오전 훈련 때부터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해서, 축구부 고문을 맡고 계신 체육선생님이 너 얼굴이 왜 그리 빨갛냐며 열을 재보거나, 같은 축구부 친구들이 '짜아식 썸이라도 진하게 타나보넼ㅋㅋㅋㅋ 누구냐? 누구냐?' 같은 소리를 해오지를 않나, 훈련 중에 잠깐 랑이가 있을 교실 쪽에 한눈을 팔다가 체육선생님 눈에 딱 걸리는 바람에 이놈 이거 어디 콩밭에 정신줄 놓고 온 거 맞네, 하고 기합을 받는다던가, 수업시간에도 생각이 조금만 랑이 쪽으로 튀어도 얼굴에 핏기가 떠오르는 통에 내가 난방을 너무 세게 틀었니? 하고 영어 선생님께 걱정어린 관심을 받는다거나... 온통 하루종일 빨간색으로 엉망진창인 날이었다. 뭐, 그 클라이맥스를 랑이 어떻게 장식해주었을지는 랑이 잘 알겠지.)
(아무튼 두 사람은 무사히 하교길에 올랐다.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축구부의 이야기꾼 친구가 학교괴담을 한가득 늘어놓아 버리는 통에, 여섯 시에 벌써 해가 져버린 교실의 침침한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꺼림칙했던 현민이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가도 돼. 우리 집에선 그것갖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비슷한 논지의 말을 했고, 그것을 랑이 납득했기 때문에 결국 공부 장소를 빈 교실에서 현민의 집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랑이 또 그걸 갖고 현민의 얼굴을 또 빨갛게 만들 만한 농담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돌아오는 길의 시장 어귀에서 흡사 무슨 버스 기다리고 있는 마냥 척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깐쵸를 어깨에 태우고, 랑은 원래 자신이 하교하던 길보다 좀 더 멀리 나아갔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엉겨붙어 있는 베드타운의 한켠에, 크지 않은 마당이 딸린 고만고만한 크기의 이층집이 있었다.)
아무튼... (현민은 어깨에서 깐쵸를 들어다 내려놓고는, 손을 들어 대문을 삐걱 열었다.) 뭐, 어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