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가 눈을 돌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럴 필요를 못 느꼈고, 지금은 섣불리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깐족댈 때와 달리 지금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를 이 기분을 들켜 타인에 의해 단정지어지는 걸 그녀가 원할 리가 있나. 그런 이유 때문에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도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글쎄요. 정말 본질은 변하지 않을까요."
화두가 바뀌어도 특별한 변화 없이 무던한 톤의 대화가 이어진다. 본질이라. 발렌타인이 언급한 그것에 그녀가 의문을 품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겠느냐며 질문 아닌 질문을 중얼거렸겠지. 터벅터벅. 가벼운 듯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사이 도착한 당과점에 쏙 들어가는 그를 보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통행인을 위해 조금 옆으로 자리를 비키며 방해가 되지 않을 곳에서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발렌타인을 기다리는 시간이 엄청 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찰나와 같이 짧은 것도 아니라, 들어가기 전 나눈 대화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낮게 감아버린다. 흐릿한 경계를 이룬 시야를 응시하면서, 그녀는 여러 생각을 했다. 뭐, 그렇다고 마냥 그러고 있진 않고 가방 속 내용물을 뒤적이며 뭔가를 하기도 했지만. 뭐가 됐든 발렌타인이 나왔을 땐 벽에 기대 기다리는 모습만 있었다.
"별로요.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네요."
실제로 기다린다는 실감은 없었으니 오래라는 표현을 쓰기도 애매했다.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 그녀는 그가 든 종이봉투를 보았다. 불룩한 모양새가 필시 초콜릿만 들은 건 아니겠지. 전부 그의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아닐 거란 확신 아닌 확신이 들어 피식 웃는다. 벽에 기댔던 몸을 움직여 걸음을 떼며 깐족 반 놀림 반 섞인 한마디를 흘린다.
"한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몸에서 그 향과 맛이 난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면 선배는 초콜릿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누구한테 그렇게 달콤해지려고 그러실려나?"
킥킥! 가라앉은 표정에 짖궂음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이 표정이 바뀌고 놀림의 여운이 담긴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덕분인지 낯빛이 좀전보다는 나아졌다. 이제 마차를 타기 위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잠시 끊겼던 대화의 다음을 그녀가 꺼냈다.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해볼까요. 선배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는 과연 그럴까 싶네요. 변화의 범주에 본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적어도 선배와 저는 그 예시에 가까운 사람을 곁에 두고 있지 않던가요."
그녀는 모른다. 백정탈이자 작은 매이며 홍마노라는 사람의 배경을. 하지만 그녀의 연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주 부분적,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기 때문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 말에 순순히 수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주지 않으면 곤란해요. 타인 같은 거 아무래도 좋으니까 저만 봐주길 원하거든요. 단순히 지금의 목표를 포기하는 걸 넘어서요. 그런데 말은 그리 해주겠다면서 하는 건 그대로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네요."
에휴. 짧지만 선명한 한숨이 뒤따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방금 한 말이 그 착잡한 표정의 원인인가보다. 다시 생각하니 짜증이라도 나는지 말만 잘한다느니, 잘생기면 다냐느니 하는 중얼거림이 희미하게나마 들렸을지도.
이이...나쁜 새로고침...ㅠㅠ 난 물론 괜찮아! 나보다 벨주가 스트레스 너무 심하게 받은 건 아닌가 걱정이라구? 텀 긴 건 처음부터 얘기하고 한 거니까 걱정 말고 오늘밤은 이만 쉬자~~ (토닥토닥) 답레는 벨주 편할 때 달아주면 돼 :3 나도 늘 저녁 늦게나 들고오잖아 ㅋㅋㅋ 괜찮아 괜찮아~~
본질이 변하는 경우가 있을까. 누군가의 신념과 자존심이 모조리 꺾이는 경우는 그가 알기로 단 두가지 상황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의 개입, 타인의 개입. 그는 더이상 얘기하지 않고 당과점으로 들어간다. 라온 거리는 평화롭다. 지각이라며 검은 정장을 입고 분주하게 거리를 뛰어가는,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중년의 여성 마법사, 친구와 함께 깔깔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학생, 여러 사람과 인물이 모두 모여 평화를 이룬다. 당과점 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사람 좋게 웃는 주인장과 어떤 사탕을 고를지 한참을 진열대에 서있는 학생. 세상은 이면을 들추기 전까지는 마냥 아름답다. 그는 밖으로 나섰고,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단 말에 "다행이군." 하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가 품에 안은 종이봉투 안에서는 감초사탕이 유리병을 탈출하고 싶어 간헐적으로 통통 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이외엔 라온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사그라든다.
"뭐?"
그는 당신을 휙 쳐다본다. 초콜릿이 되는 건 고사하고 누구에게 달콤해지냐니? 그의 눈이 잠시 흐려져 방황하다 뜻을 파악하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자네……!" 하고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또 휘말렸음을 깨닫곤 앓는 소리를 낸다. 달콤해지긴 싫다! 당분간 초콜릿은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하루에 한개..? 아니, 이것도 가혹하다. 그는 내면의 평화를 위해 다시금 맨드레이크와 사회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의 내용 일부를 속으로 외우곤 숨을 들이 마신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지만 본질을 어떻게 받아들였냐가 문제일 테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그는 사전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모종의 개입으로 인해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신의 말대로 백정을 떠올린다. 머글을 사랑하던 가문의 사랑스러운 아이. 선하고 조금은 무지한 아이나 태어난 이후 작은 사건을 겪고 손을 뻗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그 사람. 이윽고 다시금 손을 뻗는 자가 나타나자 함께 걷게 될 수 있는 사람. 과연 이 변화에 본질이 포함되었을까.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매구에 대해 전혀 모른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주길 바란다는 언급 때문이다. 그는 잠시간 고민하다 당신의 푸념에 작게 소리내 웃었다. ..웃었다고? 오늘 해는 서쪽에서 뜨지 않았다.
"자네가 말하는 본질에 대입하자면 인간이 변하는 순간은 두가지일세. 자의로 변하거나, 타의로 변하거나."
그는 허무를 보았다. MA를 만났다. 그리고 자의로 변하기를 택했다. 미쳐버린 신과 세상 밑에서 휘둘리느니 자신의 길을 악착같이 파헤치고자 했다. 반지를 가지고 떠나라 했으나 이젠 그것마저 싫다. 그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살고 난 뒤 그 작은 매가 반지를 가졌으면 한다. 수업을 듣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제법 이 세상을 좋아하는구나. 매구의 나이는 정확히 추측할 수 없으나 아마 그와 비슷한 일, 혹은 더 끔찍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내 감히 생각하건대 자의로 변할 확률은 희박하여 타인의 손길이 개입해야 한다고 보네. 당장 MA도 혼란을 사랑하지 않은가. 그 손길이 개입했을 확률도 미세하게나마 있겠지. 그런데 자네가 반려로 있는 것이 신이 개입한 일은 아니지 않나. 제 3자가 개입한 거지. 놀아나는게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있단 말입세."
그는 감초 사탕이 툭툭 뛰자 한팔로 안듯 자세를 고치더니 종이봉투 안에서 어느새 반쯤 열린 코르크 마개를 꾹 눌러 닫는다. 타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자신만 봐달라! 참 무섭고도 깜찍한 말이다. 그는 농담으로 툭 던진다. "아직 안 때렸지?" 하고는 슬슬 몸을 사리듯 다시 두 팔로 종이봉투를 끌어 안는다.
"자네가 노력하고 있음은 얼굴에서 다 보이네. 내 재밌는 사실을 몇가지 알려주도록 할까. 내가 며칠 전 칼 교수와 단 둘이서 면담을 했네. 그런데 어떤 예언을 받았게?"
그는 주변을 흘끔 둘러보고는 허리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를 찾아라. 와해는 못하더라도 착실하게 방해는 되어줄 테니. 혜향 교수는 내게 할미탈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했지. 이게 무슨 뜻일 것 같나?" 하며 허리를 세운다.
"자네의 연애가 꽃길이려면 혼자서 해결하긴 어려울 게야. 가끔은 도움을 청해보게. 이번에 그 움직이는 시체가 기어온 사건으로 인해 변화가 생겼을 지도 모르지. 난 할미라는 자를 단 한번 교내에서 마주했기에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한명은 불확실한, 다른 하나는 확실한 존재를 언급하고 있으니 말입세. 내 보기엔 첫만남 당시 보였던 행보 때문에 둘이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거든. 자네의 사랑을 위한 길 아닌가."
또다시 그녀의 깐족에 걸려든 발렌타인의 반응을 그녀가 놓칠 리가 없었다. 휙 돌아보았을 때 보이는 건 히죽 웃는 눈과 입이었을거고, 채 이어지지 못 한 말 뒤로 들리는 건 개구진 어린아이를 연상케 하는 웃음소리였을거다. 아, 이 맛에 깐족거리지. 웃음의 여운을 고스란히 흘리며 그녀는 다시 앞을 본다. 그리고 그 뒤에 한 말에 맞춰 천천히, 표정을 바꾸었을 것이다.
궁시렁궁시렁, 불만을 중얼거리며 뚱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힐끔 시선을 올리자 웃음의 근원지가 보인다. 저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데 이걸 웃어? 시선이 스윽 내려가 발렌타인의 옆구리로 향한다. 아까 말한 걸 그대로 해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와중, 그의 목소리가 들려와 일단 듣고 판단하기로 했다. 그녀는 언제 보았냐는 듯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걸음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 망할 재앙신."
발렌타인이 MA를 언급했을 때, 그녀가 툭 하고 짧게 내뱉었다.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는 그녀가 그 대상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를 희미하게 연상시킨다. 칫. 작게 혀를 차는 것까지 포함하면 좀더 선명해질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다시 시선을 주자 그가 종이봉투 속에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보인게 그것 뿐이고, 들은 건 다른 것이라. 눈을 가늘게 떠 흘겨보며 대꾸한다.
"누굴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선배도 '아직'이네요."
이 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눌려 있어 마치 이를 악 문 듯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손은 벌써 주먹을 쥐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언급한 건 그 외에도 더 있었다. 칼 교수와 면담을 해 예언을 받았다더니, 누가 들을 새라 허리를 숙여가며 소곤소곤 말하기까지 한다. 이 선배가 이렇게까지 행동적인 사람이었나. 문득 든 의문을 뒤로 재껴놓고 방금 들은 말에 대해 곱씹어본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발렌타인의 깐족에 또다시 눈을 흘기면서도 겉옷 주머니 속 주먹을 꺼내지는 않았다. 단지 잠시 째려보곤 제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지.
"확실히 그 둘은 동일인물일 거에요. 그는 좋아서 그러고 있는게 아닌 걸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예언을 들은 건 선배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라 들은 것도 선배인데, 왜 제가 그에게 도와달라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선배에요. 잊은 건 아니죠? 선배의 그 분 역시 그걸 갖고 있다는 걸."
그녀는 할미탈, 샤오첸 리와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자가 아마 그일 거라고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수족들에게 그녀는 경계의 대상이며 곱게 볼 수 없을테니까. 그리고 혜향 교수가 발렌타인에게 말했다는 점에서 샤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고 느꼈다. 이 감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으니 이건가보다 할 뿐이다.
"저는 그와 만난 적이 있어서 들은 건데, 그들이 받은 그건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게 아니래요. 그래서 싫어도 거기 있는건지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러한데 같은 걸 받은 다른 사람은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선배야말로 빠른 시일 내에 그를 만나보는게 좋을거 같네요."
늦기 전에.
짤막히 덧붙인 그녀가 돌연 걸음을 서두른다. 왜 그런가 보니 타이밍 좋게 빈 마차가 한대 남아있더란다. 누가 올 새라 먼저 마차를 잡고 발렌타인을 보며 어서 오라는 시선을 보낸다. 아직 할 말이 남은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