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마디쯤 얹어도 좋은 중얼거림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시련이란 피하려 할수록 당사자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법이다. 그녀가 굳이 지금 태클을 걸지 않아도, 막상 때가 닥치면 일은 일어나고 말 것이다. 그걸 그렇게 쉽게 피해갈 수 있었으면 오늘날과 같은 학원 생활은 있지도 않았겠지. 만약 또 그런 상황이 일어났을 때라는 가정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고, 조금 과장해서 이 자리와 관계 자체가 없었을거다. 그랬을 지도 모르지. 아마.
마지막 깐족 잽을 맞은 발렌타인이 보여준 반응은 그녀의 예상보다 심히 만족스러웠다. 여기서 끝내지 말고 더 장난쳐볼까, 싶어질 만큼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농간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 장난은 치지 않은 채 귀갓길 동행을 묻기만 하고, 흔쾌히 돌아온 수락과 도중의 용무에 대한 답변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가는 길에 당과점을 지나가니까, 복잡할 것도 없겠네요."
협의가 되었으면 어서 가자며 그녀가 앞장을 섰다. 예의 묵직한 가방을 내려 반대쪽 어깨에 메고서 당과점과 마차 타러 가는 방향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뗀다. 한 손은 가방끈을, 한 손은 겉옷 주머니에 꽂고 흔들흔들 걷는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일개 머글로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옷차림도 마법사 사회보단 머글 사회에 가까웠으니. 그런 모습으로 발렌타인에게 맞춰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을 한 건 걷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고보니 학기 초에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죠. 그 땐 이렇게까지 엮일 줄 몰랐는데 말예요. 이런게 살아봐야 아는 거, 뭐 그런 걸까나요."
그녀의 말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냥 그런 지나가는 흐름의 말이었다. 조금 전에 할 말이 있다더니 그게 이건 걸까? 발렌타인보다 앞서가지도 뒤쳐지지도 않게 걷고 있었을테니 시선만 돌려도 그녀의 얼굴은 보였을 것이다. 똑바로 앞을 향한 얼굴엔 평소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을거고.
레오는 조금 건성으로 답하며 머리를 부비적댈 뿐 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안정감이 있었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얼마전에는 수업이랍시고 다시 그 가증스러운 사람을 봐야 했으니까. 그 자리를 바로 뜨는 것이 정답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도 별로 생각하고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이니까.
" 기다리는거.. 어렵지는 않지만.. "
레오는 뭔가 더 할말이 있는듯 우물우물 하는듯 싶더니 아무것도 아냐 하고 일축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고싶은 말이라면 있었지만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레오는 슬며시 눈을 뜨고 눈치를 보듯 고개를 들었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키웠다.
" 기다릴게. 그리고 네가 시키는것도 잘 할게. 대신에 하나만. 지금보다 더 자주 만나면 안돼? 나 힘들어서 그래.. "
눈치를 볼 사람이 너무나 많다. 친구들에게도 안들키게 해야하고 그 가증스러운 사람의 얼굴은 또 봐야하고 어쩌면 이 모든걸 이미 알고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같이 있는다면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앞장서는 당신의 보폭을 따라하듯 그가 성큼 한걸음 빨리 걷는다. 무겁다면 들어줄까? 하고 얘기하려다 그는 자신의 체력을 깨닫곤 그만두기로 한다. 넘어지는 꼴을 보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참 자유롭거니 따위의 생각을 하더니 당신의 말에 흘끔 시선을 돌린다. 미묘하기 가라앉은 당신의 표정이 내포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후회가 아니길 바란다. 후회하기엔 우린 이미 먼 길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그랬지. 그때 받은 어둠의 마법 방어술 책은 잘 쓰고 있네."
그의 말에는 한치 거짓도 없다. 그는 그 당시 얻게 된 교재에 그가 공부한 모든 것을 적어내렸다. 적어도 그가 이 책을 후배 한명에게 넘겨주면 족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빼곡하고, 정확하며, 가히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어긋난 열망의 집합체를 굳이 언급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는 이게 고작 할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대화의 서두를 떼본다.
"이런 관계 말고도 많은 게 변했지. 그렇지 않나?"
라온은 여전히 평화롭다. 가짜 매구가 체포 되었어도, 10명의 학생을 잃고 유가족이 되었어도, 며칠 전 시체가 기어들어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아무것도 모르는듯 활기차게 살아간다. 그 속이 썩어있어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당신을 다시금 흘끔 쳐다본다. 당신은 어떨까. 이 대화를 바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을 원한 것일까. 이젠 무슨 말을 해도 그는 장난만 아니라면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게 변했어."
그도 변했다. 많은것을 만나고 겪은 결과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당과점을 향한다. 손은 다소곳하게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 같고, 잰걸음의 소리는 없다.
아, 그 책, 듣고보니 그 때 그런 일도 있었지, 라고 그녀는 떠올렸다. 먼저 꺼낸 화두였지만 그저 그런 때도 있었지 정도였기에 책에 대해서는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 뒤로 신경 쓴 적은 없지만 잘 쓰고 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넌지시 흘린다.
"다행이네요. 나름 도움이 된 듯 해서."
그렇게만 말하고 그 책으로 무얼 했는지까지는 파고들지 않았다. 냉정히 말해, 관심 없었다. 그저 고이 교과서로 쓰이는지 흡사 마도서에 가까워지는지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고 본인이 잘 쓰고 있다니 잘 됐네, 그 이상으로는 생각이 닿지 못 했다. 여기서 더 유감스러운 건 발렌타인이 기껏 꺼낸 서두 역시 비슷하게 닿았다는 점이었다.
"그런가요."
무미건조한 대답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온다. 표정은 여전히 눅눅하고, 기분 탓인가 시선이 앞이 아닌 살짝 아래로 향한 듯 하다. 그녀는 걸음을 계속 옮기며 꾸욱, 하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보일만큼 힘주어 가방끈을 한번 쥐었다 놓았다. 주머니에 감춰진 다른 손도 그랬을까. 헐렁한 겉옷은 제법 꼼꼼히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어 자잘한 움직임은 겉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 겉보기엔 가방끈을 조금 고쳐 쥔 듯한 행동만 내보인 채 너무 짧았던 대답의 뒤를 잇는다.
"선배가 보기에 변한 것 같다면 그건 변한게 맞겠죠. 확실히, 제가 보기에도 변했다 느껴지는 주변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도 변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해야겠네요. 숨기고 있던게 드러난 걸 변했다고는 안 하니까요."
마치, 무지와 무지한 척은 전혀 다른 의미인 것처럼.
그녀의 억양은 좀전과 비슷하면서 담담했다. 표정처럼 가라앉아 바닥 가까이를 유영하듯이. 그나마 나은 점을 찾자면 아직까지는 후회의 기색 같은게 대놓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일까. 그러는 와중에도 걸음은 계속 이어져 어느새 당과점의 근처까지 다다른다.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비켜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일 보고 오세요. 전 딱히 살게 없어서요."
그러곤 다녀오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벽에 등을 대고 발렌타인을 기다렸겠지. 그대로 흘러갔다면 말이다.
나름 도움이 되었을까. 적어도 앞으로 공부할 후배에겐 도움이 되리라. 그는 무미건조한 대답에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떠올린다. 음, 그건 아니었다. 근래의 사건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심란할 거란 추측은 된다. 너무 많은게 변했다. 평범하던 학생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누군가는 생사를 넘어야 하고, 누군가는 불신하며, 누군가는 위험한 삶을 산다. 우리의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이어지는 말에 그는 잠시 시선을 굴린다. 눈만 살짝 들어 허공을 본다. 가을 하늘은 쾌청하고 겨울날의 찬바람이 미리 분다. 북부 출신임을 증명하듯 웅크리는 일 하나 없이 그는 담담히 걷는다. 당신은 어땠을 지. 그렇지만 그의 감은 어쩐지 당신은 이런것에 흔들릴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다. 드러난 걸 변했다고 하지 않는다라. 그럴까.
"사람이 변하든, 아니면 숨기고 있던 것이 드러났다고 하든 본질은 변하지 않지."
그는 당신을 흘끔 쳐다본다. 담담하고 표정마저 가라앉은 모습에도 동요 하나 없이 당신을 향한 시선을 고정한다. 후회의 기색이 드러나지 않는 점은 다행이나 그 모습이 언제까지 갈지. 매구는 대담해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MA는 이 상황을 지켜본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 상황에서 당신의 마음은 심란할까, 아니면 모습 그대로 담담할까. 어느쪽이든 그가 길을 같이 걸어줄 수는 없다. 동업하는 입장에서 같은 운명을 끌어안는단 보장은 없다. 다만 길을 제시해서 나은 길을 가도록 도울 것이다. 참 뭣같은 오지랖이 아닌가. 그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자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 실수나 잘못은 없네. 본질은 가장 빨리 눈치챌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멀어진 것이 있다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겠지. 뭘 그리 고민하나? 자신이 자신인 것에 족하면 되는 일인데."
그는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하라는 양 얄밉게 입을 뚝 닫아버리곤 당과점에 "그럼 잠시 다녀오지." 하곤 쏙 들어가버린다. 과거 이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지팡이를 손보고 오는 날이다. 그는 그동안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 흡연 욕구는 있었지만 아무튼간에 피우진 않았다. 짧은 시간이 흐른다. 그는 그동안 당과점에서 미리 봐둔 지렁이 젤리와 감초 사탕 한 병, 과일 맛이 나는 사탕과 판 초콜릿 두개를 집어든다. 계산을 하고, 전부 종이봉투에 담는다. 이윽고 그는 밖으로 나섰다. …종이봉투가 제법 불룩하다. 이 초콜릿 귀신이 설마 판 초콜릿 두개로 만족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