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가 아니었다. 그는 당신의 말에 가만히, 아주 가만히 당신을 쳐다봤다. 한방에 보낸다는 말을 어떻게 못들은 척 할까. 그의 남은 명이 다하는 건 하늘의 뜻이겠지만, 적어도 라온에서 비명횡사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동맹 아닌 동맹을 맺은 사람의 손에 죽고 싶은 일은 더 없다. 그는 얄미워도 꾹 참았다. 업보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참지 않으면 업보는 몇배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업보를 잠시 미뤄두고 크루시오를 맞았던 날을 떠올린다. 글쎄,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대체 누가 창시한 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격 참 고약한 사람이다. 덕분에 연이 생기긴 했지만 이제 그만 맞고 싶다. 그는 짧은 탄식과 납득이 되는듯한 모습에 역시 운동을 조금 더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이 봐도 그럴 정도가 아닌가.
"말도 안 돼. 내가 어린 자네보다 체력이 못할 리가 없지 않나."
못하다. 그는 저 멀리 숲에서 신비한 동물과 함께 사는 메타포마구스 지팡이 세공사가 어린아이로 변해도 이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그걸 알 가능성은 적으니 그는 일단 부정하기로 했다. 몸통박치기 몇번만 해도 이기겠다는 당신의 말에 참 얄밉다 생각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당신의 깐족거림에 지금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지라면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게 쓰러질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얄미울 수 있을까? 만약 깐족거림이 정규 수업에 있었더라면 이미 당신은 조기졸업 하여 대학원에 있을 것이다.
"아. 젠장."
그는 결국 또 젠장, 하고 욕짓거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른다고 할 걸! 반짝거리는 금안을 마주한 그가 시선을 굴리려다 애써 참는다. 이대로 시선마저 굴려버리면 그의 완패다. 먼저 들어서 권한 건 맞지만, 그냥 준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쓴 것도 맞지만, 인정하면 평생 놀림 받을 것이 뻔하다! 놀림은 예삿일이다. 그가 지금 유달리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감 선생처럼 뜬금없이 어디선가 폭탄같은 발언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다 "이 학교는 교수도 그렇고 학생도 그렇고.." 하며 혼잣말을 한번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자네도 나도 학생이라서 더는 말 못해주네." 하고 은근하게 말하는 것이 드라마의 중요한 순간에서 카페베네로 끊듯 잔인하다. 이윽고 아예 선을 그어 드라마가 중단되듯 "자네가 이겼네. 이제 끝!" 하며 패배 선언을 한 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버렸다. 앞으로 넘어온 앞머리가 풍성하게 흔들리자 그는 손을 들어 대충 쓸어넘긴다. 귀에 꽂는 머리도 몇 있어 이제 다른쪽 눈도 좀 드러나는 것 같다.
한방 언급에 별다른 대꾸가 돌아오지 않는 건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부정하거나 했다면 과연 그럴까요, 라며 냅다 들어서 내던지는 시늉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겉보기엔 그 여름날보다 체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보였으니 지금의 그녀라면 잠깐이나마 들어서 어깨에 들쳐메는게 가능할 것이다. 절벽에서처럼 놀란 소리를 또 들을 수 있을지 모를 기회가 날아간 것에 아쉬운 듯 아닌 듯 싱긋 웃는 얼굴로 속내를 감춘다. 그건 못 해도 이건 할 수 있겠는 걸, 싶은게 생기기도 했으니.
"그럼 이 다음에 또 어린 모습이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선배를 찾아가서 한번 들이받아볼게요. 그러면 알 수 있겠죠?"
웃으며 하는 말은 진심 그 자체였으니, 정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발렌타인은 필시 사방을 경계하고 다녀야 할 것이었다. 언제 쪼그매진 그녀가 튀어나와 들이닥칠지 모를테니 말이다.
연이은 깐족거림에 발렌타인이 또다시 험한 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적당한 만족감을 얻었다. 이 정도면 아까 자신을 놀래킨 업은 돌려줬다는 느낌일까.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좀 아쉬운게, 그의 패배 선언이 그녀의 장난기를 건드려버렸다. 이 좋은 구실을 그냥 넘겨버린다고? 어림도 없지, 같은 느낌.
"그런 거라면야, 음,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이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깐족거림이 사라진 말투로 말했다. 그 잠깐 사이는 정말로 깐족거림을 끝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쪽의 위장은 배웠기 때문에 특기다. 잘 안 쓸 뿐이지. 아무튼 그렇게 더는 말 안 할 것처럼 행동을 하다가 돌연 눈을 반짝 뜨더니, 틈을 노려 잽을 치듯 말했다.
"학생에게는 말 못 할 '뭔가'를 했다는 건 알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요. 응. 그것만 확실히 알았으면 됐어요."
처음부터 그걸 노린 듯 목적은 달성했다는 것처럼 말한 그녀. 소리도 없이 히죽이는 얼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불안을 불러오는 듯 하다. 어쩌면 그것도 노렸을지도? 진실은 그녀의 웃는 얼굴 뒤에 있을테지만 그녀는 그걸 파해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대화 주제를 돌려버리려 했다.
"그러고보니 선배, 이제 돌아가려는 길이라고 했죠? 저도 용건은 마쳤으니 돌아갈까 하는데 동행하실래요? 만난 김에 할 얘기, 라고 할까, 할 말도 있긴 해서."
이후에 용건이 있다면 그냥 혼자 가겠다는 말을 냉큼 덧붙이고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런 그녀의 말이나 행동에선 어떤 강요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뭐라 대답할지 지켜볼 뿐.
그는 오싹한 감을 멀리 치워내기로 한다. 이대로 계속 오싹한 감과 함께 한다면 모든 일에 경계하게 될 지도 모른다. 싱긋 웃는 얼굴에 불안함이 치솟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위해 속으로 약초의 효능을 떠올리기로 했다. 맨드레이크..잎은 애니마구스가 되기 위한 재료로 쓰이고, 노래를 들으면 그걸 습득한다. 비명소리 대신 노래를 가르치면 조금 더 안전한 방식으로 수확하고 재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식물을 식물로 대하지 않고 인간을 대하듯 해야 하는데, 맨드레이크의 경우 적응이 쉬운 편이다. 이는 맨드레이크의 생김새와 연관이 있으며 인간과 닮은 존재에게 인간의 사회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의 표본으로……. 그는 그렇게 논문 내용을 상기하다 불현듯 과거 학생이 패대기 친 맨드레이크처럼 들이받혀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과 함께 떠오르는 이상한 상상을 부정한다.
"기숙사에 칩거해서 나오지 말아야겠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어디선가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당찬 1학년 소녀가 선글라스를 쓰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녀는 어려진 당신을 발견하곤 귀엽다! 선배한테 보여드려야지! 해서 당신의 앞에 그를 대령할 것이다. 그가 빗자루를 타고 도망친다 해도. 어딜 가도 진퇴양난인 인생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이 깐족거림이 잠시 멎는다니 다행…이지 않았다. 속았다. 그는 제대로 한 방 먹은 양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말을 연신 더듬듯 "아니, 그게." 하며 어버버 거리더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제대로 카운터 당했으니 더이상 뭐라 말도 못하겠다. 어쩜 저렇게 사람 놀리는 것에 고단수인지!
"자네만 괜찮다면야."
그는 오는 대화를 거절하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혼자 가라 하고 그는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많은 변화다. 이젠 어떤 대화가 와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이 놀라운 변화가 과연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인지, 아니면 감 사감처럼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흥미를 충족시킬 것인지는 알기 어렵겠지만. 그는 별 말을 덧붙이지 않더니 그는 익숙하게, 늘 그렇듯 손을 모아낸다. 꼭 영정을 들듯 애매한 손 위치를 뒤로 그가 당신을 흘끔 바라본다. 이제 덧붙일 말이 떠오른 듯 싶었다.
"다만 당과점에 잠시 들렸다 갈 예정인데, 그 점은 감안해주면 하는 군."
가서 살 것도 이미 정한 눈치다. 그는 초콜릿 귀신이니 일단 초콜릿을, 그리고 선물할 감초 사탕, 달링을 위한 지렁이 젤리..오늘도 손 가볍게 돌아가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