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을 향해 걷고 있긴 했지만 실상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는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바닥에 나타난 발자국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에 멈춰 둘러보자 딱 봐도 사람의 것이 아닌 발자국이 그 주변에 제법 찍혀있었다. 그 흔적에 그녀는 불현듯 언젠가 있었던 괴형 트롤을 떠올렸다.
설마.
잘못 말하면 사람 잡는다는 그 말을 입안으로만 되내이며 길을 찾아본다. 오래 볼 것도 없이 나타난 두 갈래의 길을 보고, 그녀는 아주 잠깐 고민한 듯 싶다. 양쪽을 한번씩 보고 바로 걸음을 옮겼으니.
당신이 사람이 되자 그는 혹여나 들킬까 주변을 둘러보다, 할미란 말에 고개를 돌린다. ..칼 교수가 말했던 자가 아닐까 싶던 자. 할미를 찾아가라던 혜향 교수. 공격해야 할까. 그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으니 당신의 손을..잡아도 되는 걸까. 허락한다면 손을 잡고 앞으로 소리없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죽 앞으로 나아가려 했을 것이다.
"대화 좀 하지."
공격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안 통하면? 러빗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는 수밖에..
그녀의 부름에 누가 나타나기는 커녕 오히려 잠든 학생들끼리 잠꼬대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밖에서는 지들 찾겠다고 난리인 걸 알긴 하나. 이러고 있는데 알 턱이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숙였던 몸을 일으킨다. 손을 댄 학생도 제대로 숨을 쉬고 있었으니, 최소한 살아는 있다. 그렇다면 깨워야지.
"아쿠아멘ㅌ, 아니지. 아쿠아 에럭토."
허리춤의 지팡이를 뽑아 학생들의 위를 향해 들고 주문을 외운다. 일일히 깨우고 다니기 귀찮으니 한번에 물을 끼얹어서 깨울 심산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수고값이라는게 그녀의 명분이었다.
보통은 자다가 찬물을 맞으면 바로 깨기 마련인데, 이것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깼다가 다시 잔다. 다시 잔다고? 뭔데 이게?
"마법인지 약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 잘 자는 놈들인건지..."
지팡이를 까딱까딱 흔들며 중얼거린 그녀. 찬물로 안 된다면 또다른 충격으로 깨워야 하나 싶다. 또다른 충격... 스윽 지팡이를 드는 모습이 또 뭔가 마법을 날리려는 듯 하다. 마침 푹 젖었으니 여기에 전격을 흘린다면, 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덤덤한 표정 위로 드러나지만 누구 하나 말릴 사람은 없다. 그대로 지팡이를 든 그녀가 주문을 외우려고 입술을 열었지만 나온 건 에휴, 하는 한숨 뿐이었다.
"귀찮네 진짜."
들었던 지팡이를 내리고 좀전에 맥을 짚었던 학생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멱살을 잡아올린다. 난 분명히 말했다, 라고 중얼거리곤 남은 손을 쫙 펴 학생의 뺨을 후려갈긴다. 미리 물을 뿌려논 덕이랄지, 맞닿는 순간 제법 찰진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레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호랑이다. 학원에 호랑이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어봤는데. 레오는 그 붉은 눈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 해보자 이거지..? "
그리곤 잠깐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생각하고 집중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변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 그 둘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지, 변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변해서 어떤 모습이 될지. 변신을 마치면 그 호랑이처럼 짐승이 되어 검은색의 윤기나는 털을 날리고 밝게 빛나는 노란 눈의 흑표범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레오는 낮게 울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어나와 펠리체의 옆에 섰다. 몸을 살짝 낮추고 금방이라도 뛰어들듯한 자세를 취하고있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듯 귀를 쫑긋 하곤 바닥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제법 세차게 때렸는데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되려 얼얼해진 제 손을 흔들며 잡아들었던 학생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일단은 사람이니까 살살 다뤄주는거다.
물을 뿌려도 안 일어나, 때려도 안 일어나. 이 골칫덩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앞에 왠 호랑이가 나타났다. 눈이 붉은게 예사 호랑이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재수없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호랑이를 응시하다가,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여기 있어봤자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걷기 귀찮은데 거 등에 태워주면 안 되나."
앞서가는 호랑이 들으라는 듯 말하고 터벅터벅 걷는다. 어지간히도 스쳤는지 다리가 따끔따끔한 걸 보니 돌아가면 다리에 머트랩 용액 발라야겠다, 같은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괜히 망토를 여며 목을 가린다. 초랭이고 뭐고 일단 들키면 맞지 않겠는가. 그냥 맞겠는가? 처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초랭이가 무슨 짓이라도 했는지.."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이후 들려온 첫질문의 대답엔 흠, 하도 소리 한번 내고 진짜 주인이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는 양 눈을 의미심장하게 휜다.
"보기좋게 꾀에 넘어갔다. 그 말이라면 어쩔 수 없으나 해를 끼쳤다기엔 원내 학생이 심히 불안해 하는지라."
그는 당신의 손을 괜히 만지작대다 깍지를 끼려 한다. 원내 학생이 불안해 하는 건 둘째치고, 특별한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임페리오 소리에 표정이 단번에 굳어진다. 트롤이 오자 지팡이를 꺼내야할까 고민하던 그는 공격할 일이 없다 하자 천천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다시금 질문하기로 했다.
"보기엔 제법 이 일이 흥미가 없어보이는데. 어쩌다가 이리 휘말렸는지. 그래, 학생은 뒷전으로 두지."
혹시라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지 물으러 왔소. 대처도 제대로 없고 애꿎은 학생만 죽어가는 패악질은 이제 지긋지긋해."
짐승이 되면 좋은 점 중 하나는 오감이 예민해진다는 것이었다.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며, 맡아지지 않던 것들이 맡아진다. 레오는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고 조금씩 풍겨오는 역겨운 트롤냄새에 으르릉, 하고 낮게 울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던 레오는 펠리체의 말을 들었는지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 타고 싶으면 타도돼 '
바닥에 끼적끼적 글씨를 적고 레오는 몸을 낮춰 바닥에 엎드렸다. 흐아암- 하고 하품을 하곤 선택은 온전히 네 몫이라는듯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