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그는 잠시 얌전하게 눈만 깜빡였다. 대략 껌뻑과 멀뚱 사이의 애매한 무표정으로 잠자코 있다, 한발 늦게 "아하―"하고 도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 그러니까 정말로 지금 막 전달받은 거라서 정리 중이라는 거죠? 너무 앞서가버렸네."
이런 상황이니 아직 안 움직인 게 당연한데 성질은 있는대로 내다니 윗분도 참 대단한 성깔이다. 장담하건대 그 인간은 소라가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한발 앞서 움직였더라도 트집 잡았을 게 뻔했다. 소라가 화내면서 들어온 것도 이해는 간다.
아직은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아닌 듯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그렇다면 당초의 목적이었던 몸풀고 머리 쉬기나 마저 해야겠다. "예, 그렇다면 그때 물어볼 것들을 미리 생각해봐야겠네요." 앉아있느라 뻣뻣하게 굳은 무릎을 풀어주고선, 그도 난간에 등 돌려 턱 몸을 기댄다. 조금 떨어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찌푸리듯 찡그린 웃음이 소라의 옆얼굴을 바로 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마냥 장난스럽게만 뵈는 낯이다.
"편안하진 않아도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진 명료하잖아요. 전 그게 좋네요."
그러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히니 시선이 마주 위를 향한다. 하늘 참 까맣다. 그런 잡생각이나 드는 게 완벽하게 평소와 같은 하루다.
뭘 해야 하는지 명료하다는 그 말에 대해서 소라는 조금 뜻밖이라는 듯이 체슬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사람마다 경찰이 되는 이유는 다 다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경우는 또 자신이 알기로는 처음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하는 일이 명료하다. 즉 확실하다라는 이유를 대는 경우는 잘 없었으니까. 사람마다 이유가 제각각일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끼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위에서 알아주면 얼마나 좋아요. 휴가 갔다오니까 벌써부터 빠졌냐라던가 그런 말을 저도 이제 듣기 싫어요. 물론 우리가 전원 익스퍼이긴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인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주질 않잖아요."
그게 영 불만이라는 듯이 소라는 괜히 등 뒤에 힘을 주어 난관에 살짝 매달린 후에 다리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조심조심하다가 두 발을 땅에 딛은 후 그녀는 완전히 안정적인 자세로 돌아왔다. 이어 체슬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체슬리 씨는... 우리가 만약 정말로 민간에게 공표된다면, 익스퍼가 만인에게 공개적이 된다면 어떤 사회가 될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바래요. 뭔가 이렇게 숨기면서 힘을 쓰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의 존재가 죄악이라는 느낌도 조금 들잖아요. 지금은."
만인에게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비밀로 한다. 그럼 자신들은 혼란만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적어도 소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는 듯 그 목소리가 꽤 단호했다. 이를테면...
"어떻게 보면 우리는 슈퍼 히어로와 마찬가지인데. 영화 속 히어로들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거나 비밀로 하진 않잖아요?"
"내 의지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살려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됐네요. 어딘가로부터 책임을 부여받아야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경찰 일이 그런 덴 제격이었으니까요."
이야기를 하며 골똘히 무언갈 회상이라도 하듯 턱을 짚으니 시선도 절로 내리깔린다. 하지만 정말로 깊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얌전하던 것도 잠시, 그는 금세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뭐, 그건 어렸을 때 그랬다는 거고 지금은 주관 있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 일에 자부심도 있고요."
그리고 소라가 난간에 매달리자 "어허, 고생이 많으시다지만 위험하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며 짐짓 엄한 척을 하는데, 상사에게 장난처럼 훈계하는 건 둘째치고 평소 행실 괴상한 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우스운 상황이다. 생각할 거리 많은 질문에 곧 입을 다물었지만 말이다.
존재가 죄악인 것만 같고, 영웅과 같은 존재라……. 진솔히 말하자면 그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위그드라실에 한정해서 자기 긍지를 신조로 삼는 것은 좋지만 대부분의 익스퍼들은 일반 시민에 불과하고,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말이다. 모든 사람은 무고한 동시 잠재적인 분란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익스퍼가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죄악이 아니고 영웅 또한 아니니 익스퍼는 모두와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세상 역시 그렇게 여겨준다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 세상 일은 바라는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운 법이다.
"솔직한 의견으로는, 적어도 꽤 한참은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것 같네요. 원래부터 인간은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습성이 있잖아요? 전 세계적으로 인종이랑 성별이나 장애여부로도 몇천 년씩 들볶고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익스퍼들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다. 익스퍼들 역시도 비익스퍼들을 배척하지 않을 거라고는 못하겠고. 인권의 영역에서부터 존재가 죄악이라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지만…… 사회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상당한 마찰이 수반되겠죠."
걱정이라도 하는지 엄한 목소리를 내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뒤로 넘어가지는 않게 어느정도 조절을 하고 있는 덕이었다. 허나 너무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의 말을 금방 들으면서 그녀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예성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는 듯, 그는 괜히 윙크를 하면서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며 쉿- 소리를 냈다.
뒤이은 그의 말에 그녀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스퍼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반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적어도 익스퍼가 위험한 이들만 있는게 아니고 사회에 큰 도움이 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한 일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팀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그에 대해서 완전히 공감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체슬리 씨의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어요. 사실 제가 이렇게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불안해하는 이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까지 일어난 세 번의 사건. 모두 다 익스퍼가 상당히 위험한 객체라는 것을 보여주기 딱 좋은 사건이기도 했고요. 기억이 지워졌기에 익스퍼가 아닌 이들은 모를 뿐이지. 만약 기억 조작이 없다면 익스퍼 관련으로 어떤 시위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싱크홀, 지하철 폭주, 그리고 콘서트 테러. 모두 다 규모가 보통 큰 것이 아닌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대형살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익스퍼가 공개가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우리들의 일은 더욱 험난해질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그 '신'이라는 작자가 지금 이 혼란을 유도하는 거라면, 더더욱 체포해서 더 이상 이런 사회 혼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할 수밖에 없고요. 하지만 자신이 범죄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과연 체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자신은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고, 그저 범죄자들이 자기 멋대로 한 것 뿐이라고 말을 해버리면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범죄자들은 '신'이 시켜서 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신'이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줬다라는 말만 하지 않았던가. 물론 중간에 '신'이 내린 힘이 어쩌고 하는 범죄자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범행을 지시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죄송하네요. 기껏 스카웃했는데 오자마자 이런 이들이 벌어지니 말이에요. 혹시 절 원망하나요? 이런 곳으로 스카웃해서?"
아무래도 관리 소장과 이 일이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책상에 말라죽은 식물이 이곳에서도 있었고 이곳을 관리하는 이는 소장뿐이니까. 무엇보다 피해자의 증언인 차량에 관리 소장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는 말. 관리 소장이 이것과 연관이 있다.
"요즘에도 이런 쌍팔년도 납치수법을 쓰다니...역겨운 자식들..."
화연은 주먹을 꽉 쥐고 놈들에게 분노했다. 반드시 그의 손으로 놈들을 감옥으로 보내리라 다시한번 다짐한다.
납치된 고등학생 일곱명은 팔에 링겔을 꽂고 있는 상태다. 넓은 창고 안에 누워있는으며 다들 눈에는 초점이 없다. 누군가는 웃거나 누군가는 헛소리를 한다.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마약 종류는 아닐것이라 추측한다. 링겔 안에는 그저 물이나 영양제가 있다.
"마약은 아닐꺼야. 진짜 마약이라면 괴로워하는 아이가 한명쯤은 나와야해."
마약을 처음 하는 이라면, 또는 이런 상황에서 강제로 주입되었다면 필이 한명 이상 끔찍한 환각을 봐야 정상이다.
[화연] 피해자들이 있는 곳을 조금 더 조사하기 위해서 그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피해자들을 구속하고 있는 잠금쇠는 딱 7인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리까지 합쳐서 피해자는 총 8명이나 그녀를 구속할 자금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를 납치하는 것은 어쩌면 계획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좀 더 구석을 뒤져봐도 자금쇠는 물론이며 링겔까지도 그 이상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안에 있는 것들은 식물을 키울 때 사용하는 영양제나 식물을 관리하는 장부나 기타 물건들 정도였다.
[퍼디난드] 그가 기억을 읽어보려고 하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고등학교 내부에서 이번 피해자 중 한명인 수형과 학교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명확하게 모든 대화가 다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단편적인 이야기는 들려오고 있었다.
-사실 말이야. 요즘 그런 고민을 전문적으로 상담해주는 톡이 있대. -응? 톡? 무슨 말이야? 나리야? -한번 들어가볼래? 알려줄게. 나도 소문으로 들은 거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더 읽어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파짓하는 느낌으로 기억을 읽는 것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리를 바라보면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파들파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리가 범인들과 연관되어 있을까? 한 사람분이 부족한 잠금쇠,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무엇인가를 더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나리의 태도. 무엇보다 기억을 읽는 것이 도중에 끊어졌으며 탐지기에 감지 중인 C급 익스파.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그저 전기 능력자이며 이 범죄를 저지를 동기도 방법도 없다.
[화연] 장부를 뒤적거리면 뭔가 처음 들어보는 듯한 희귀식물의 이름이 가득 적혀있다는 것을 그는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중에서 불법적인 것들은 없었다. 그저 모두 관리하기 힘들고, 정말로 구하기 힘든 식물만의 이름만이 가득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공간 안에 있는 식물들은 모두 그런 부류임은 분명해 보였다.
허나 그런 식물들이 왜 말라죽어있는 것이었을까? 얼핏 봐도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기록한 것을 보면 대충 관리를 했던 것은 아님은 분명해보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퍼디난드] "톡방...이요? 그거라면 인터넷에 있는 것을 봤어요. 그러니까... 어떤 익명 홈페이지에 올라온 것을 봤었어요. 아이디가 적혀있었고, 거기로 고민을 이야기하면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저도 받아봤는데 나름 괜찮았거든요."
그야말로 증거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말에 가까웠다. 익명 홈페이지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알 수 없었고 그 글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허나 그는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짜증나.]
무엇이 짜증이 난다는 것일까?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추궁받는 듯한 이 느낌이? 이내 그것을 이어가듯 나리는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제가 이런 질문이나 추궁을 받아야 하는거죠?! 전 납치당한 피해자인데! 우선 집으로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