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손을 흔들었다. 어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남을 꽃으로 불러버리는 일 말이다. 다시금 보면 달맞이꽃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하지만 석곡도 잘 어울리겠다 싶고? 흰꽃이 어울리는 느낌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을 하며 잠시간 빤히 본 것을 깨닫고 몸을 슬쩍 뒤로 뺐다. 그러고보면 되게 소녀같은 모습인데 어째서 팬지가 아니라 석곡이었으려나.
" 지한이구나. 나보다 연상일까? 나는 열여섯이거든. 누나라고 불러야 해요? "
고민은 멈추고 재잘거렸다. 여기서 나보다 어린 쪽이 드물다는 건 알고 있어서 하는 질문이었다. 키는 작지만, 내가 올려다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작지만. 연상일 가능성도 높았다.
" 응. 맞아요. "
잊고 있던 목적을 떠올리고 다리를 흔들었다. 허수아비를 가지러 갈까 고민했다. 내가 이름 붙이길, 꽃밟기라는 기술을 연습할 생각이었다. 허공에 꽃을 피워서 발판 삼는 거. 허공답보는 로망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흰꽃이 어울린다니. 영광인 걸까. 개인적으론 블랙 릴리같은 거나 블랙 로즈같은 걸 생각했던 지한주는 먼산만 봅니다.(대체?)
"연상일까요 아닐까요" 맞혀 보시겠습니까? 같은 짖궂은 말을 하네요. 은근히 그런 면도 있단 말이죠. 연상인지 동갑인지 모를 지한은 그렇게 말하다가도 연상..인 편이죠. 라고 사실대로 말했겠지만. 그래도 누나라고 부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라고 말을 재빠르게 잇네요.
"아. 그러면 이쪽에 있는 편입니다." 허수아비를 보면서 저쪽에서 가져오시면 된다고 하고는 자신은 잠깐 쉴 거라면서 자판기를 보다가. 한 잔 하시겠습니까? 라는 이유없는 호의군요.
흰 꽃잎 흩날리며 창을 휘두르는 모습은 좋지 않을까. 달도 없는 까만 밤에는 특히 말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하게 짓궃은 모습을 보이는 지한이 누나에게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아서 곧 연상인 편이라고 대답해주었다. 호칭은 편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 누나라고 부르는 건 최소한의 예의에요.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다보니 잘 못하거든.. "
부모님과도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말을 편하게 하는 편이었다. 저번에 어머니라고 불렀더니 소름끼친다고 질색하셨다. 보통 만나는 사람들도 또래인데다가 한두 살 연상이어서 그런지 존댓말이 입에 잘 안 붙었다. 선생님들에게는 어떻게 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 고마워! "
알고 있었지만, 감사인사는 상식이다. 자판기를 통한 권유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두면 나중에 식을 거 같고, 수련이 끝난 뒤 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으로 시원한 음료를 들이키는 게 좋았다.
"연상으로 보이다니. 놀랍네요" 농담에 가까운 말인 모양입니다. 지한은 누나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는 것에.. 그래요.. 라고 작게 중얼거립니다. 누나라고 불리는 게 틀린 건 아니지만. 어색하잖아요. 왜 다들 나보다 큰 겁니까.. 누나라고 불리면 좀 어색하게. 라고 속으로 한탄해도 키는.. 솔직히 더 커봐야 1센치.. 2센치..가 한계 아니야?
"천만의 말씀입니다." 간단하게 받고는 그럼 구경은 쳐내지 않으실 건가요? 라고 물으며 이온음료를 뽑아와서는 주위에 자리를 잡습니다. 수련하는 거 구경할 생각 만만이군요. 아니 뭐 보이는 걸 안 보려 하는 것보다는 대놓고 구경이 더 낫지 않나요?
얼마나 연상인지는 몰라도 아마 한 살에서 두 살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이 다 큰 키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키가 작다는 게 얼마나 슬픈지 나도 알고 있었다. 작년까지 160을 찍지 못했던 사람으로써 제대로 알고 있었다.
" 응? 응. 그건 상관 없는데. 재밌진 않을 거얼. "
꺼내온 허수아비를 앞에 두고, 양팔을 교차로 하여 쭉쭉 뻗어 몸을 풀면서 대답했다. 일단 해둔 말이었다. 나도 남 수련하는 거 보면서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샌들도 벗어 던지고 씩 웃으면서 아주 가볍게 뛰어올랐다. 하늘로 쭉 뻗은 다리를 아래로 내려쳐 허수아비를 가격하고 그 반동으로 다시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자세를 잡아 허공에 꽃을 피웠다. 아주 잠깐 고정되는 그걸 딛고 허수아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 ...으음 잘 안되네.. "
방향이 어긋나는 것을 보고 인상이 써졌다. 아무래도 공중에서 움직임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간단히 수긍했다.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괜한 게 아니었고 불구경이 속담으로 남은 것도 이유가 있었다. 본인이야 어떻든 남들이 보며 하는 판단은 다르지. 그러며 다리를 휘두르다 멈춰서 허수아비의 양 어깨에 발을 대고 섰다. 어쩐다. 고민이네. 지한 누나가 말을 걸어온 건 그 쯤이다.
" 으응. 발판이 불안정해서 말이에요. 익숙하지도 않고. "
땅에 내려선 뒤 허공에 꽃을 피웠다. 허공에 뿌리내린 듯 움직이지 않는 연꽃이었다. 줄기도 없이 덩그러니 떠있던 연꽃은 곧 파스스하고 사라졌다. 내 발은 크지 않았고 발판으로 삼기 충분한 크기였지만 아무래도, 안정감이 없었다.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었고 나 자신도 허공에서 방향을 비트는 건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허공에서도 어느 정도 움직임이 보장되면 편리할 거 같아서 시도하고 있는데 힘드네에 "
가볍지만 높게 뛰어올라 다시 피운 꽃 위에 섰다. 한 발로 균형을 잡고 있다가 꽃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섰다. 좀 더 크게 피워볼까?
허허. 노인같은 웃음소리를 내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허수아비를 올려찼다. 쭉 뻗은 다리가 허수아비를 타격하고, 그 중심에서부터 분홍빛 꽃잎이 펑하고 터지듯 주변에 퍼졌다. 이게 무슨 효과가 있냐고? 시야를 가려 이후 행동에 제약을 두는 데에 좋다. 추가적인 데미지도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의념을 둘러 치는거니 그냥 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런건 익숙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 여러송이를 피워서 하는 것도 좋긴 하겠다. 의견 고마워. "
그러면 안정감이 올라갈 것 같긴 했다. 대신 좀 느리려나? 하나를 피워내는 것과 여러개를 피워내는 건 다르고. 그래도 시도해볼 만한 일이긴 했다.
" 그치? 아 예측은 괜찮아. 기본적으로 아까 했던 것처럼, 꽃이나 꽃잎으로 적의 시야나 감각을 방해하는 거 잘하거든. "
빠른 기동성을 살리는 전투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에는 교란을 특기로 삼는 경우도 있고, 나는 거기에 살짝 발을 걸쳤다. 간파 당했다면 그것대로 페이크를 줄 수도 있다. 현실은 이론이 아니지만.
원래 스킬 이펙트라는 건 양날의 검이다. 게임하면서 화려한 이펙트 때문에 공격 패턴을 못 보고 죽은 경우는 누구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과거 친구들과 게임할 때 파티원 이펙트를 끄지 않아서 눈갱을 당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건 현실이라 아군 이펙트 해제도 못한다. 심지어 후각까지 영향을 받으니 조심해야 했다.
" 어차피 두곳 다 찾아갈 생각이었으니까. 협업 해주면 나야 고맙지! "
그만큼 두 배로 까일 가능성이 아른거리지만 괜찮다. 꽃이 먼저 펴야 열매가 맺으니, 결과를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게 고통스러워도 말이다! ..하는 생각은 지한 누나가 떨면서 덧붙인 말에 급격하게 기운을 잃었다.
" ..맞아? 폭력? 교육을 받는데? "
어느 정도이길래 헌터 교육생이 몸을 떨 정도인거지. 내 눈도 저절로 떨렸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실전위주 교육이라면 정말로 두들겨 패면서 가르칠 수도 있지?
서 윤. 십육세 나이로 교관에게 굴려져서 사망. 이러면 학교 이미지에 좋은 건 없을테니 복수도 하고 가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의뢰나 게이트 사건 같은 게 아니라 교관들이 죽인거면 진짜 큰일이긴 하겠다. 진짜 죽도록 아프게 맞았던 것 같은 누나를 보면서 조금,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 대체.. 대체? "
그야말로 후드려 맞은 건가. 사람을 샌드백으로 삼는 무서운 교관이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싫었는데. 으으 하고 질린 음성을 내다가 하나 궁금해진 것이 있어서 물음을 던졌다.
"커리큘럼 확인해보면 시험기간엔 죽을 것 같은 구성입니다." 복수를 하고 간다는 것에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꾸준히 공부해두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말하며 지한은 공부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책도 아직 다 못 읽었는데.. 시험이 다가올지도. 인가.
"의뢰도 구해야겠고.." 호박머리도 깨야지.. 라는 생각이 튀는 것은 윤의 질문에 다시 돌아옵니다.얻은 것.. 있었죠. 그렇죠?
"있었습니다." 약점을 보호하는 것이라던가.(약점 보호 F) 맞고 나서 의념 활용학이나 게이트학 수업 덜 들어서 고생 굴러가며 습득했던 것..(의념 공진 F)(MVP=태호 및 다른 레스주들)이라던가요.. 라는 말을 합니다. 얻은 게 있었으니 다행이지 맞고 얻지도 못했으면 매우 슬펐을 것이다...
공부머리가 좋은 게 아닌 미소년은 시험기간 일주일 전부터 교과서에 머리를 박는게 보통이었다. 시험 점수는 나쁘지 않게 나왔지만 시험 뒤에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는 게 문제지.. 수학 문제는 이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작년에 뭘 배웠더라. 지한 누나가 의뢰를 구해야겠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얻는 게 있었다고 하자 웃음이 났다.
" 그러면 괜찮겠는 걸.. "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러면 좋다. 괜찮다. 얻는 것 없이 쳐맞기만 하는 건 물론 싫다. 아프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일단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 하루 종일 얻어 맞는 걸로 확실히 얻는 게 생긴다면, 나쁘지 않아. 응, 꽤 괜찮아! "
아픔 정도는 견디면 된다. 죽지 않는 한 겪고 회복하면 된다. 죽음의 문턱이 내 앞에서 인사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얻는 게 있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강해지고, 훌륭하게 한 사람의 영웅이 될 수 있다면! ..조금 흥분한 듯 하여 숨을 가라앉혔다.
양 손바닥을 마주대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살짝 터트려, 벚꽃 봉오리 하나 터지듯 맑고 자그마한 소리가 났다. 나는 영성도 높은 편이 아니니까 힘낼 수 밖에. 복습 열심히 해야겠지..
" 고마워 누나. 누나도 힘내! "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인사했다. 근데 방금 뽑은 것처럼 시원한 것 치고 아까까지 음료수 뽑는 건 보지 못했다. 냉기나, 유지 관련 의념을 지닌걸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에 허수아비가 너덜너덜해질 때 까지 얼마나 걸릴까? 익숙한 꽃내음이 코를 간지른다. 내 눈을 닮은 분홍빛 꽃잎이 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