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그래도 시민들의 존경으로 먹고사는 직업인데 그런 취급은 좀 슬프지 않나 싶어요~ "
물론 우리도 나라의 녹을 먹고사는 입장이긴 하지만 공무원을 할거였으면 경찰보다 쉽고 덜 위험한 직별로 갔을 것이다. 굳이 경찰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명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메리트가 있어보였으니까, 라고 말할 수 있겠지. 시민들을 보호하고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응원이 되어주곤 했다.
" 애초에 그걸 베어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네요. "
입이 위아래로 저만큼 찢어질 수 있는 인간은 귀신말고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나랑 같은 인간이 저걸 한입에 다 넣는걸 보고 있으면 경외감 이전에 그로테스크함을 먼저 느끼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 확실히 일반적이지 않은 친구들도 분명 있으니까요. "
가령 그 녀석처럼 말이야. 풀어진 웃음을 보이는 키라씨의 얼굴을 잠깐 보고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떠올린다. 나랑 똑같이 자랐음에도 가는 길은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린 그 녀석. 나와 받아들이는 방법이 달랐던걸까 아니면 애초에 우리는 방향이 서로 달랐는데 눈치채지 못했던걸까.
" 키라씨는 아이들 좋아하시나요? 갓난아기부터 고등학생까지 가릴 것 없이. 저는 정말 좋아하거든요. "
고등학생은 아이들이라고 칭하기엔 좀 덩치가 있는 것 같지만 ... 나에게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나 다름없다. 물론 걔네들한테 이런 얘기해주면 으윽, 하면서 표정을 잔뜩 찡그리겠지만. 그래도 나랑 보고지낸 세월이 길어서 정말 친동생 같은 아이들이다. 그래서 미아가 된 아이들을 보면 걔네들이 겹쳐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희 팀 사람들에게 동생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네요. "
굉장히 많아서 프레젠테이션 발표 같은 분위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 음, 햄버거를 그렇게 쌓아두고 먹는 사람을 보는게 그리 쉬운 편은 아니잖아요? "
그러니까 처음 보는 일이라는거다. 지금 주변 사람들 시선도 대놓고는 아니지만 놀라운 시선이지 않은가.
" 사회에선 생각보다 이름으로 부를 일이 적으니까요. 직급이 있으니까 직급으로 부르는게 더 편할테고. "
사회는 학교와 다르게 누군가를 사귀는 목적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런게 더 적은게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나같이 이름을 불러달라고하는 특이 케이스도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그렇게 부탁하는 것은 아니다. 유우카는 날 선배님이라고 부르니까. 근데 그건 정말 맞는 호칭이라서 그런거고..
" 일단 서로 동갑인데 선배님이라는 호칭은 안어울릴뿐더러 저는 연우씨랑 친해지고 싶으니까요? "
종국에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편하게 대하게 되겠지만 .. 동갑인 사람과 먼저 친해지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다. 어린 사람은 어린대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조금은 불편할테니까. 그리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게 조금 오기를 불러일으킨 것도 있었고. 하지만 이런건 비밀이다.
" 나중에 그렇게 부르는게 익숙해질때쯤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
신호가 바뀌자 다시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킨다. 예전에 보육원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데려오기 위해 봉고차를 운전했던 경험 덕분인지 이 정도 차는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내가 어릴땐 그냥 걸어다녔는데, 보육원이 좀 외진 곳에 있다보니 위험할까봐 일부러 중고차까지 구입해가면서 셔틀을 마련했었다.
" 일반적인 사람은 저한테 털끝도 못건드릴테니까요. "
시선만 스쳐도 없어질테니까.
" 그리고, 연우씨가 구해주실거 아닌가요? "
장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엑,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동공으로 답했다.
친해지고 싶다는 말에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습니다. 다행히 마침 신호가 바뀌어서 당신이 앞을 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들켰다면 큰일이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컨트롤 하며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그냥 사람이 좋든, 예의상 하는 말이든 하겠죠.. 그럼요. 기대하지마
"호칭까지야 그렇다쳐도 친해지고 싶다니.. 보통 동갑이라고 그렇게 말 안한다구요?"
그녀는 진정시킨 마음을 가다듬으며 농담조로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생각한대로 혹시 피곤하거나 하면 자신이 운전해도 되니까 힘들때 말해달라고 덧붙이는것도 잊지 않고.
"달라진다니.."
더 친해지길 원한다는 뜻인지. 그녀는 이것은 잘 모르겠어서 말 끝을 흐렸습니다. 그야 사교성 있다는 사람들의 샘플은 많이 봤습니다만. 그거랑은 또 다른 느낌에 당신의 얼굴을 조금 빤히 쳐다보게 됐는데. 표정을 읽을 수 없어 결국 한숨을 쉴 뿐이었죠.
"제가 같은편일수도 있죠."
둘이서 협공- 이라거나.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표정을 컨트롤 했습니다.
"권유한거잖아요~ 아- 무섭네요. 혹시 더 마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농담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진짜 무서웠습니다. 대체 어떤 추태를 부렸을지..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는 농담을 그만두고는 마침 눈에 들어온 카페에 시선이 돌아갔습니다.
나라고 모든 사람들한테 친해지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오면서 사람 보는 눈만 늘었는지 내가 거리감을 느껴버리면 상대방이 다가오기 힘들어할때도 많았으니까. 어릴때부터 겪어온 무언의 차별 같은 것들은 사람을 자연스레 눈치만 보게 만들고, 한번 더 거리를 재게 만들곤 했지만 ..
"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을수도 있고 .. 여러가지 뜻이 있죠? "
지금도 이름 부르는거 어색해하시고 계시잖아요. 큭큭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얘기한 나는 우회전하면서 슬쩍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이 마주쳐서 금방 다시 전방을 보긴 했지만. 좀 더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있을수도 있고 그녀가 지금의 태도에서 약간은 벗어났을수도 있다. 물론 아닐수도 있겠지만.
" 강제로 먹인건 아니잖아요 ... 애초에 거기서 더 먹으려고했으면 제가 뺏었을꺼에요? "
그래도 정말로 다른 모습을 봤고 그게 좀 귀여웠다는 뜻에서 불만은 없다. 먹였다, 라는 오해를 받는건 좀 그렇긴 하지만 ... 장난식으로 얘기하시는게 아닐까? 라곤 생각하지만 진심이 아니기만 빌 뿐이다.
" 그래요 그럼. "
자연스럽게 카페 앞에 주차를 한다. 경찰차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나는 앞에 두었던 가면을 쓰고선 차에서 내렸다. 근데 이 카페 ...
흑흑, 그렇게 되어버리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거잖아. 그리고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솔직히 견디기 어려웠다. 어릴적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자기가 싫어하는 상대방이 아니면 그 누구도 미움 받는다는 사실을 즐기기는 어렵지 않을까.
" 사실 그렇게 섞으면 도수가 많이 낮아지기는 하는데 ... 보드카가 도수가 좀 높았나봐요. "
애초에 보드카와 오렌지 주스를 1:2 로 섞는 칵테일이다. 일반적인 40도 정도의 보드카를 사용한다면 만들었을때의 도수는 한잔에 13도 정도. 그러니까 소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해지는거다. 하지만 잔의 크기가 다르니까 그것도 좀 치명적일 수도 있었나 ... ?
" 저도 괜시리 긴장하죠. 뭐라도 잘못했나? 하면서. 경찰이라고 잘못을 안하는게 아니잖아요? 물론 안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무언가 내가 모르는 일에 연루되었을수도 있고. "
비번일때 사복을 입고서 돌아다니다가 경찰차를 만나면 흠칫하는 경우가 많곤했다. 물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이면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지만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하게 되더라.
" 다른 지역에선 못봤는데 ... 아직 청해시 안에만 있는 프랜차이즈인가보네요. "
가면을 써서 얼굴이 좀 답답하긴 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를 바라보고 물었다.
" 뭐 드실래요? 저는 유자에이드 마실껀데. "
조금 쌀쌀한 날씨지만 목이 좀 말라서 시원한걸 주문하기로 마음 먹었다. 연우씨가 고르는 것까지 같이 주문하고, 결제까지 한 나는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한낮이지만 점심시간은 아니라 한가한 카페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천씨...? 천씨....?? 사민은 밥빙기톤으로 되물었다. 당장이라더 어이, 형씨라고 할 것 같은 저 불량한 발음은 무엇인가. 혹시 한국어를 범죄 영화로 배우셨나? 사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눈을 연신 끔뻑였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가 뭐였냐, 이 사람의 성조차도 외우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대충 맥심... 뭐 이런거였던 것 같은데.
"...편한대로 불러주세요. 후배라든지, 사민씨라든지, 후배라든지, 사민씨라든지..."
조금 울적해진 사민은 받아든 블루베리 요거트 스무디를 빨대로 쪽쪽 빨았다. 당이 얹어지고 나서야 여유가 생긴다. 한층 뻔뻔해진, 그러나 조금은 초조해보이는 얼굴로 사민이 나섰다. "4인 스터디 같은건데 인원이 다차서 선배님은 못 들어오셔요. 월정액 내고 강의...같은 걸 듣는건데 이름을 까먹었어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일단 당X마켓에서 4인팟을 꾸렸으니 4인은 맞고, 주로 보는 것도 미국 드라마니까 영어 강의라 할 수 있겠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접혀든 눈썹을 보며, 드물게 사민은 제 말을 다시 검토했다. 흐음... 잠깐, 아일랜드인 입장에서는 대충 사무라이 옷 입고 하이얏 칼 휘두르냐는 소리로 들렸으려나? 오마이갓, 리틀 히틀러 이즈 히얼... 잠시 고민하던 사민이 품에서 턱, 커피랑 곁들이면 맛있는 과자를 올려놓고 스윽 밀었다. 모종의 죄책감이 뇌물로 발현된 형태라 볼 수 있다. 그래봤자 탕비실에서 슬쩍 집어온 과자였지만.
"허억, 그러면... 진짜 양복 입고 총쏘고 그랬던거예요?"
대충 듣기로는 평화수호대 뭐시기... 한국의 특수부대 같은 곳에서 근무했다고 들었다. 과연 지존 간지나는 직업이 아닐 수가 없다. 위험성으로 따지자면 결코 절대 네버 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기도 했지만 제3자 입장에서는 궁금한 소재였다. 사민은 의자를 끌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요원들을 위한 최첨단 무기 그런 거 없나요? 립스틱에서 레이저 빔이 나온다거나... 넷플X스에서 많이 봤거든요."
일단, 최첨단 무기는 사민에게도 있다. 사민의 주머니에 큐브의 형태로 얌전히 자리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상처받을거란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렇게 대꾸했습니다. 왜이러죠 아까부터 너무 풀어져 있는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던 그녀는 도수 이야기에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아마도 분명 그렇게 쎄진 않았을겁니다. 하지만 이미 보드카를 마시면서 그녀의 주량이 한계였던게 문제였죠.
"원래라면 이미 한계치였으니까 주더라도 안 마셨을거에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보드카를 마시면 숙취가 없길래 평소처럼 시킨건데 회식자리에서 너무 생각이 짧았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흐음- 그런가요. 저는 그런적 없어서요. 혹시라도 잘못한게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동료끼리니까 한번은 봐드릴게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또 농담을 하면서 메뉴판을 바라봤습니다. 오늘은 조금 단걸 먹어볼까요..
"저는 다른 지역도 잘 안나가니까요.. 음."
물끄럼-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메뉴판에서 떠나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에 향해있었죠. 그야 뭐.. 전부터 생각한거지만 눈에 띄네요.
"이건 패션인가요?"
그녀는 담담하게 따뜻한 바닐라 라떼가 좋겠다고 말하고는 또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서 가면을 살짝- 톡하고 만져보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신경쓰이긴 하죠.. 특이하니까.
이건 비단 연우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미움을 받아도 되는 사람은 아직까지 평생에 한명뿐이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때 발버둥칠 힘을 전부 다 써버린 탓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발버둥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미움 받는다면 그 화살을 그저 맞기만 할뿐이다.
" 그래도 그날 되게 귀여웠으니까요. 다신 보기 힘들테니까 비밀로 해둘께요? "
물론 다 같이 있는 장소였지만 제일 가까이에 있던건 나였으니까 내가 제일 잘봤을테다. 조금은 침울해질 것 같은 감정을 환기하고자 활짝 웃으며 얘기하고선 유자에이드와 바닐라라떼를 주문한다.
" 그렇게 연우씨한테 얘기하면 바로 수갑 차는거 아니에요? "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친다. 그러다 가면을 바라보는 시선에 멋쩍게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가면, 눈에 띄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시선은 가면으로 향할테고 안쪽의 얼굴엔 시선이 분산될테다. 원래는 머리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답답해보일까 싶어서 머리는 차마 가리지는 못했다.
" 그냥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요. 알아볼까봐. "
가면을 건드리는 손을 굳이 피하지 않고 그녀의 뒤쪽으로 보이는 길거리로 시선을 돌린다. 언제곤 이 가면을 벗을 날이 오겠지.
" 농땡이 피우는건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 시간 내에만 들어가면 되는거 아닐까요? "
누구의 이름이 나와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선배라고 말을 하는 유우카의 말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소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소라는 스카웃을 할 때 자신이 체크했었던 서류들을 떠올렸다. 유우카의 경찰 경력과 연우의 경찰 경력을 머릿속으로 비교하자 혼란은 더더욱 커졌다. 눈앞의 그녀가 연우보다 조금 더 경력이 길었던가? 아니었던가?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던 소라는 이내 아무렴 어때. 라는 결론을 내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누가 선배건, 후배건 그건 그리 중요한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한 팀이라는 사실. 그 뿐이었으니까. 애초에 경력도 계급도 이곳에선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따지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사실 노래를 듣는다고 해도 우리들은 스테이지 쪽이 아니라 스테이지가 있는 공간의 문 밖에서 경비를 서야하니, 어쩌면 안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아. 이럴 때 아이돌 노래도 즉석으로 듣고 그러는건데."
말을 마치며 소라는 허공 위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에 그 바깥쪽을 손으로 콕 찍었다. 정말로 운이 나쁘면 노랫소리 하나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아쉬운 것인지 괜히 눈을 감고 한숨을 약하게 한 번 더 내쉬다가 다시 눈을 뜨며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거로 보니 유우카 씨는 가끔은 태어난 모국에 돌아가고 싶을 때 있어요? 별 건 아니고... 두 사건을 무사히 해결한 공을 인정받아서 위에서 길게 휴가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우리 팀은 이 나라가 아니라 해외에서 온 분들도 많으시니... 휴가를 조금 유동적으로 길게 끌어올까 싶거든요."
물론 그 잠깐 사이에 당이 떨어졌다고 얼굴색이 급격히 나빠질 만큼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달콤한 뭔가를 입에 집어넣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건 없었다. 빨대로 한 모금 더 마신 에이드는 그새 연해져 있었다. 시간이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꼬리가 밟힐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그의 말대로 표정 관리를 너무 안 한 건지도 모른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데서 혼자 있을 때야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던 펑펑 울어제끼던 거리낌이 없겠지만, 지금은 밖인 데다가 일행도 있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은 괜찮다는 뜻을 담아 미소지어 보이고는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어느새 케이크는 절반도 남지 않았다.
음, 이제 괜찮아. 그만한 가치도 없는 일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여기선 참아 줘. 현직 경찰이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다 쫓겨날 순 없는 노릇이잖아?"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상대가 진지하게 담배를 피우려 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답답하겠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거의 얼음이 녹은 물밖에 남지 않은 에이드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상대가 물꼬를 트길 기다렸다. 불확실한 정보일지라도, 단순한 추측에 불과해도 상관 없었다. 그녀는 상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정리하자면, 복수의 조력자를 데리고 있는 흑막이 모종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고, 이전의 두 사건은 그 과정에서 뻗어나온 가지라는 거지."
상대의 말이 끝나자 빨대로 잔을 휘저으며 말했다. 범죄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건 범죄의 역사에 있어서 생각보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몇몇 케이스에 대해 이미 들어본 바 있었고. 요컨대, 신神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그 킹메이커에게 한정된 표현이지, 별도의 종교적 대상이나 익스파 자체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란 소리였다. 이걸 한시름 놓았다고 해야 할까.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같은 유형의 범죄가 발생할 거란 소리잖아. 적어도 우리가 그 킹메이커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거나 그자의 계획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까진."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살짝만.
"이렇게 되면 미리 사건이 일어나는 걸 막기도 힘들겠네. 정보가 너무 없어."
상대의 말에 의하면 기억은 이미 지워진 상태. 지금까지 발생한 사건의 공통점을 꼽아 보면 사회적 을의 위치에 속한 B급 익스퍼들에게 접근해 현혹하고 랭크업 시켰다는 것 정도지만, 그래봤자 고작 두 건일 뿐이었다. 사회적 을을 노리고 있다고 하기에도, B급 익스퍼를 노리고 있다고 하기에도 아직 데이터가 부족했다. 설령 교집합을 어찌어찌 찾아낸다 하더라도, 누가 범죄를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고 누가 아닌지를 분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일히 생각을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말이지.
...잠깐, 정말 그럴 수 없나? 상대를 향한 그녀의 눈빛이 일순 묘해졌다면 백 퍼센트 기분 탓이다.
"그나저나,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설마, 내 생각을 읽은 거야, 자기? 세상에! 짐짓 호들갑스럽게 말했지만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진짜 읽었다 하더라도... 음, 딱히 절대로 못 말할 얘기는 아니니까.
그건 조금 아쉬울지도... 콘서트는 2시간을 가볍게 넘는 경우도 있던데, 긴 시간 하염없이 경비만 서고 있어서야 큰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대로 근무를 서는 것이지,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니까. 하고, 조금은 재미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휴가... 벌써요...?"
위그드라실 팀은 생긴지 얼마 안되었을텐데, 한국의 윗분들은 관대하신걸까. 창립 이래로 이런저런 뒤숭숭한 일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특히 저번같은 경우는 많은 인명이 달려있었으니 일부러 배려해주시는 걸지도...
"저는, 좋아요... 그리고 아마 다른 분들도..."
정말 휴가가 생긴다면 일본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사라지는 일을 겪고 나서, 본가에 거둬져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다. 도장에서 검술을 계승하고 계신 할아버지는 어릴적 마냥 무섭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집처럼 드나들던 도장에는 거목이 한 그루 우두커니 버티고 있는데 봄이면 벚꽃을 흩날리던게 참으로 고왔다. 할아버지는 경찰이 되어 칼을 휘두르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하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