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별 다를바 없는 평범한 오후.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다. 매일 무슨 할 일이 그렇게 있냐고 물어보면 사실 뭐라도 하는척하고 있는거지, 사실상 그렇게까지 할 일이 많지는 않다. 일하는 시간인데 놀고 있으면 눈치 보이니까. 그렇게 서류라도 훑어보고 있는 와중에 손목시계에 설정해둔 알람이 작게 울린다.
' 순찰 갈 시간이네. '
시간을 확인하고선 근무표를 확인하러 간다. 순찰은 2인 1조라서 파트너와 함께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근무표에 적힌 것을 보니 익숙한 이름이 있다. 오늘 순찰 파트너는 연우씨네. 최근에 나를 의도적으로 피해다니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딱 걸려버렸다. 저번 노래방때의 일이 있었으니까 좀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좀 슬픈 일이었는데.
" 연우씨, 순찰 나갈 시간이에요? "
파트너도 확인했으니 그녀의 책상 앞으로 가서 웃으면서 얘기했다. 혹시나 어색해할까봐 평소와 다른 없는 텐션으로.
사민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상대가 외국인인 이상 자기가 한국에 대해서는 더 잘 알테니 배짱 영업 하겠다 이 말이다. 이름은 얼른 사무실 올라가서 좌석에 적힌 이름을 보고 외워도 된다. 아니면 팀원 명단을 봐도 되는 문제고...
"허억, 네에? 저, 저는... 따로 공부하고 있는게 있어서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넷플X스라고 들어보셨나. 사민 인생 20년간 자기주도적인 학습이란 거의 없었다. 사민은 입을 에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체슬리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조금... 재수없을지도... 강적일지도... 나보다 유능할지도... 잘못 걸리면 힘들지도...' 왠만하면 좋게좋게 사람을 표현하는 편인 사민도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잡담 상대를 잘못 그런게 아닌가 싶다. 이러다가 음료 다 먹고 나갈때는 외국어 스터디 하나 결성해서 의도치 않게 끌려다니게 생겼다.
사민은 잽싸게 자리를 옮겨 자리에 앉았다.
"..."
직장인들끼리 보통 무슨 말을 하더라... 사교성이 썩 좋지 않은 탓에 항상 대화 주제를 찾는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보니 아일랜드 경찰들은 보통 무슨 일을 해요? 막 비밀요원처럼 정장 빼 입고 킹스맨처럼 전화 부스에서 총 탕탕?"
업무에 관해서 깐깐하기 그지없는 그녀였기에 당연히, 이번 스케쥴은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미 준비도 다 끝나있습니다. 그저, 그저 말이죠.. 이번 파트너가 말이죠? 이게 딱히 피하는건 아닌데요?
'아무리 그래도 실례겠지..'
티는 안내려고 해도 노래방 이후로 계속 슬쩍 슬쩍 피했고,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챘을 시점. 그녀도 딱히 안좋은 의미가 있어서 피하는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부끄러울 뿐이지. 차라리 필름이 완전 끊겨서 기억이 안났으면 좋았을텐데.. 하며 그녀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러네요, 슬슬 움직여볼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애초에 부끄러워 한다고 남한테 티내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속에서는 엄청난 갈등과 고뇌가 뒤섞여있으니 피했던거라고.. 변명을 하고 있는 마음속의 그녀였습니다.
"-.. ㅇ.... 흠흠."
그러다간, 그녀는 잠깐 생각난게 있어서 당신을 부르려 했으나 허공으로 뭐라뭐라 말로 형성되지 못한 자음을 몇개 뱉더니 헛기침을 했습니다. 왜 이러냐면 일단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여기서 또 선배라고 부르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건데. 하지만 이름으로 부르는건 좀 그렇고. 가불기(?)에 걸린거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건 말그대로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이니까. 이상향이라는 것은 결국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꿈꾸는 곳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은 더이상 이상향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밥 먹으면서 이런 생각까지 해야하는건가? 콜라를 한번 쭉 빨아먹는다.
" 그럼요. 저번에도 들었듯이 우리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괴물에 불과하니까요. "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때 일을 생각할때마다 가슴 한쪽이 쓰라린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찰이고, 경찰들은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직업일텐데. 그래도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때처럼 임팩트가 크지는 않다.
" 그렇게 잘라도 두께는 그대로인데 ... 그게 다 들어가네요? "
내가 예상한걸론 위에서부터 조금씩 덜어서 그걸 썰어먹을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그녀는 그 두꺼운 햄버거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것도 한번에 .. 지금 내가 보내는 시선은 비단 나만 그러고 있는게 아니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보내고 있을거다. 아무리 조각이라지만 두께가 있는데 저게 한번에 들어가다니.
" ... 키라씨는 경찰 안하셨어도 왠지 돈 많이 버셨을것 같네요. "
요즘 먹방이라는 컨텐츠가 레드 오션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 실력(?)이라면 순식간에 업계 최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정말 나쁜 애들은 없으니까요. 악마 같아도, 사실 장난의 수위를 조절 못하는 것뿐이고. "
크면서 실수는 한번씩 하기 마련이고 그 실수를 바로 잡아서 두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게 만든다면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많은 동생들을 돌봐오면서 짓궂은 장난도 수없이 많이 당했고, 애들이 하는 생각이 거기서 거기인지 1년마다 똑같은 장난은 되풀이 되곤 했다. 이젠 눈감고도 피할 지경이라 애들은 재미 없어했지만 ... 간혹 나 대신 피해를 입는 애들이 존재하곤한다.
" 그래도 제가 돌본 애들은 엄청 나쁘다고 말할 애들은 없었는걸요. 다들 착하게 잘 자라주었으니까. "
이젠 내가 아니라 또 다른 큰아이들이 꼬맹이들을 돌보고 있겠지. 원장님과 자원봉사자분들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기 때문에 ... 가족들만 해줄 수 있는 일도 분명 존재한다.
" ... 벌써 반이나. "
내가 두입 정도 먹을때 저 거대한 햄버거 탑은 반절이 없어져있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반절을 날려버렸다고해도 믿을 정도의 속도. 난생 처음으로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생각보다 멀쩡히 대답해서 슬슬 그 부끄러움이 다 없어졌나 싶었다. 그녀 입장에선 많이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별 생각 없었고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는데. 그래서 피해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도 부담스러울것 같거든.
" 오늘 순찰 루트는 좀 넓어서 순찰차를 타고 이동할 것 같아요. 제가 운전할테니까 챙겨입고 1층 주차장에서 만나요. "
사실 맡은 일이 있으니까 다른 서들처럼 관할구역이 넓거나 하지는 않은듯했다. 그래도 순찰은 보통 순찰차를 타고 이루어지니까, 차키를 받아서 일지를 미리 적어두기 위해서 먼저 움직이려고 했다.
" 불렀어요? "
그렇게 되돌아가려는중에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서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고서 그녀를 바라본다.
조금 서운한거야 어쩔 수 없었지만 이해 가능한 수준이니까. 굳이 사과하지 않았더라도 넘어갔겠지만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사과하니 이젠 뭐가 됐던 괜찮았다. 평소엔 틈이 없는 그녀였으니까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본 것도 나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내가 칵테일을 만들어준게 원인이니까 어느정도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기도 하고.
" 차키 수령하고 ... 일지 작성하고 ... "
키 수납함에 들어가있는 차키를 수령하고, 그 아래에 일지를 작성한다. 순찰차는 공동의 재산이니까 사적운행은 엄연히 금지되어있다. 순찰 시간에도 마실거 사러 잠깐 들르는 정도만 어느정도 허락되는 정도. 그렇게 일지를 다쓰고 차키를 빙빙 돌리면서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연우씨를 손짓으로 부르면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자연스럽게 탑승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괜찮네요. "
반쯤 장난섞인 어조로 얘기하고선 안전벨트를 연결하고 시동을 걸었다. 돈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경찰차도 꽤 최신기종인지 시동을 걸때의 진동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 전에 타왔던 것들과는 다른 승차감에 만족하면서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순찰을 시작한다.
뭐 원래부터 사람이 나쁘지 않은건 알고 있었으니. 그녀는 간단히 괜찮다고 말해주는 당신을 생각하며 주차장에 서있었습니다. 뭐라도 사와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묶고있던 찰나에 당신이 내려왔죠. 자신을 부르는 손짓에 그녀는 따라 타며 혹시라도 잊은게 없는가 다시 한번 가볍게 체크했습니다.
"읏."
그러나 타자마자 들려온 당신의 농담에 다소 당황한듯 했지만, 그녀는 곧 그러면 다시 안부를거라면서 툴툴 댔습니다. 아아- 아닌데. 또 풀어진거 같네요. 정신 차립시다.
"아.. 그 날, 인가요."
그녀는 순찰이니만큼 주변을 살피다가 당신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들어가긴 했는데, 어머니한테 조금 주의를 받은 정도..?"
그래도 여자애인데 술에 취해서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던가 하는 가벼운 꾸중이었지만. 아무래도 평소에 그런적이 없으므로 다소 놀라셨던거 같기도 합니다.
다시 안부른다는 소리에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운전중이니만큼 전방주시를 해야해서 바라보진 못했지만 입가에 가득한 미소 정도는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때보단 좀 더 친해진 느낌이랄까. 한번에 훅 다가가는 것보단 이렇게 조금씩 다가가는게 그녀 입장에서도 더 좋을지 모른다.
" 혼자 보낸게 걱정이었는데 잘 들어갔다니 다행이네요. 바래다줄까했는데 그 사이에 없어져버리셔서. "
나도 술을 조금 마신 상태라서 시야가 좁아져있었는지 찾았을때는 이미 없어진 뒤였다. 내가 너무 늦게 찾은걸수도 있고 그녀가 그냥 빨리 집에 가버린걸수도 있고. 전화를 해보려고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녀의 번호가 나에게는 없었다. 애초에 출동할땐 무전기가 있으니까 핸드폰 번호 같은건 없어도 되고.
" 그래도 그런 모습도 새로워서 좋았어요. 평소엔 어디 숨어있는 느낌이라. "
빨간 신호에 멈춰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뭔가 거리를 두는 느낌이 강해서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조금 더 쉬워졌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녀 입장에선 정말 부끄러운 일이 되었겠지만.
앗, 정말? 하고 속아버리기에는… 사민의 표정이 너무 솔직했다.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잠시동안 사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도 깜짝 않고 동그랗게 뜬 눈길이 삐질삐질 땀 흐를까 말까 한 옆얼굴에 닿았다. '사실 아니지?' 그런 의미가 여실하게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담 되는 눈빛을 거두고 픽 웃어버린다.
"그럼 나도 너 천씨라고 부를까? '여어, 천씨', 하고?"
장난으로 해본 소린데 꽤 괜찮은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사민의 배짱 영업에 속았느냐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기겠다. 그는 주머니에 손 꽂고선 잽싸게 자리로 가는 사민의 뒤를 잽싸게 따라붙어 추궁을 해댔다. "무슨 공부 하는데? 좋은 거 너만 알려고 그래?" 쓸데없이 집요해서 짜증난다……. 사민은 정말로 잡담 상대로 잘못 걸리고 말았다. 진담도 장난처럼 해대니 이 짓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별하기도 힘들었다.
테이블에는 조금 전까지 그가 마시다 만 커피 한 잔이 덜렁 놓여있었다. 그는 뒤따라 자리에 앉고는 제 몫의 마실것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양은 대략 반 정도가 남아 있길래 뚜껑 열고 커피를 들이키려고 했는데, 사민이 하는 말을 듣자 마시려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아─ 그게 뭐야. 대충 비슷한 거 하긴 했는데 킹스맨이랑은 다르지."
색 옅은 눈썹이 좁혀들며 아래로 처졌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선 휘휘 손을 휘저었다.
"이건 물론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고 보통은 다른 나라들이랑 크게 다른 건 없어. 대충 동네 돌고, 단속하고, 술 취한 사람 집에 데려다주고, 접수된 신고 처리하고, 뭐 그런 게 가장 기본이고. 부서 따라서 더 자세하게 할 일 나뉘는 거지."
"학교에 다닐때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자주 들었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서 들은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물론 친한 사람이 없었던것도 문제였지만, 보통은 그럴 일이 없는게 일이라는것이니. 그녀는 '그 사람'조차 굳이 이름으로 부르라고 말은 안했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습니다. 어쩌다보니 부르게는 됐었지만.. 잠시 딴 생각을 할뻔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당신을 흘끔~ 봤습니다.
"유.... 진씨는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이유같은게 있나요?"
부르기 싫다는 뜻은 아니었고. 그냥 궁금했기에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뭐 언제나 그렇듯 평안한 마을입니다. 요근래 있었던 사건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바래다.. 준다니, 너무 그러면 위험하지 않아요?"
그녀는 당신의 말에 답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였습니다. 친절한게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녀는 '그러다가 장기가 위험해요' 라며 말했는데. 표정을 보니 농담하는게 아닌거 같습니다. 자기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의미인거 같네요.
"그래서 술을 먹인거네요.."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당신을 향해 흐응-..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물론 연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