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선배가 가진 비밀을 양손만큼 풀어도 제 비밀 하나 들을까 말까 할 걸요? 저도 언젠가는 하나 하나 다 얘기 해줄테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생긋 웃음 지은 그녀는 윤의 얼굴에 스쳐간 아쉬움을 보며 말했다. 언젠가 이 모든 소란에서 물러나 오롯히 둘만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나 되어야 할 수 있겠지만. 바라면 언젠가 때가 오게 될 테니 지금은 비밀로 해두자고, 그의 손길을 받으며 생각한다.
불안 어린 그녀의 말에 윤은 그 행동들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해야 하는 것, 필요한 일이라고. 그가 그렇게 하는 건 그녀가 했던 말을 지켜주기 위함일까. 아니면 또다른 일을 위해서일까. 그녀의 불안을 눈치챈 윤이 두고 갈 리 없다며 안심시키려는 듯 했다. 그녀는 윤에게 고분고분 손등을 내어주고, 입맞춤을 받은 후엔 그 손을 들어 윤의 얼굴 한켠을 살며시 감싸려 한다. 레이스 장갑 때문에 감촉이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능한만큼 감싸려 하며 중얼거렸다.
"선배의 의지로 가버리는 일은 없어도, 누군가의 개입으로 선배를 잃게 되는 일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불안한거에요."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분교에서 두권의 책을 잃은 후부터였다. 이제는 윤이 자기 발로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보다 망할 누군가, 예를 들면 그 재앙의 개입 혹은 또다른 신이라는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그를 잃게 되는 것이 불안했다. 이매의 죽음처럼, 어쩔 도리도 손 쓸 틈도 없이 윤을 잃게 되면 그녀는 견딜 수 없게 될 거다. 이번에야말로 망가지겠지.
"그렇게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어요?"
선배가 정말로 절 사랑한다면.
뒷말은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마음을 저당 잡아 그녀가 원하는대로 휘두르려는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그게 단순한 저당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르니까. 조금은 망설이며, 작게 덧붙이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결혼 해본 적도 없고, 그에 관한 생각도 해본 기억이 없지만 남들의 행복에서 비유해보면 이정도쯤 되리라 생각했다. 당신을 완전히 매구에게서 자유롭게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행복하다. 그와 함께 하고 있으니.
그는 점수 차감이 없으니 이 사람이 무슨 이유인가 싶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이러다 차감이라도 당하면 변명할 여지가 없기 떄문이다. 그는 주변을 두어번 둘러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로 한번, 중지로 한번. 그러자 철컥 하는 소리와 문이 잠기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콜로포터스 마법과 머플리아토다.
"모든 교수님께선 저보다 훨씬 유능하시니 금방 풀고 들어오시겠지만 임시 방편으로 두었습니다."
하고 운을 떼더니, 잠시 어떻게 해아할지 고민하다 도박수를 던진다. "아가, 편히 있어도 좋다. 적어도 자비롭고 학생을 위해 비밀을 지금까지 지켜주시는 교수님께서 고발치는 아니하겠지." 하고는, 이 순진하고 나이는 그보다 8살 많으나 정신연령이 8살 어린 당신이 혹시라도 변신이 풀리면 그의 품에 안겨있을까 고민하며 인근 푹신한 자리에 내려두려 했다. 그의 종잇장같은 몸으로는 안아 올릴 수도..없..나?
"묻고 싶은 것이야 많습니다. 가장 먼저 저는 적어도 아ㄱ, 아니, 이 자가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기 전까진 매임을 몰랐습니다. 교수님은 매구의 추종자임을 어찌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잠시 시선을 굴려 작은 매로 변한 당신을 내려다본다. 천문학의 힘인가 싶어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도, 추종자임을 알고 있다는 것도, 모두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걱정하는 건 마법부나 그 외의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사실대로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혹시나, 그에게 닿아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그를 어떻게 부추길지 모르니. 그녀의 생각이 틀린게 아니라면 그 재앙은 아직 윤에게서 이용 가치를 보고 있을 터였다.
영락한 신 따위에게 뺏길까보냐. 천천히 감고 뜨는 눈커풀 뒤로 진한 소유욕과 반항기가 스쳐지나간다.
고개를 내렸다 들어 다시 윤을 본 그녀는 시선을 굴려 그의 목에 둘러진 목줄을 보았다. 장식을 겸한 동그란 고리는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줄을 걸어 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존재와 윤의 말에 안심이 된 듯 그제야 옅게 미소짓는다.
"응. 선배가 약속해준다 했으니, 그거면 되요."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건, 아직까지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천히 변해온 것처럼 이것도 차츰 나아지게 될 거다. 언젠가는 고민 없이 그저 순수하게 믿는다, 고 할 수 있게 되겠지.
설령 그 믿음으로 인해 그녀마저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그와 함께라면 나락조차 천상이나 다름없을테니.
발목을 적시던 불안이 줄어 그만큼 기분이 나아진 그녀는 손을 들어 재차 윤의 목줄을 쓸어내리려 했다. 손끝으로 슥 쓸어, 가운데 걸린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부드럽게 당기며 작게 속삭였을터다.
"자리, 옮기지 않을래요? 안심시켜준 상을 주고 싶은데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풋풋한 유혹을 흘린 그녀의 얼굴은 시선을 마주한 눈매가 둥글게 휘고, 엷은 화장 덕분에 평소보다 붉게 반짝이는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