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진은 눈을 깜빡입니다. ▼ 차가운 바람과 함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로 카리아가 날아갑니다. 홈런이네요. ▼ 대기권 너머까지 날아가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저 정도면 당분간 전투에 합류하기에는 무리일 듯합니다. ▼ …전투? ▼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됩니다. 그랑을 붙잡았다가 주먹에 맞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 보통 사람이라면 팔을 못 쓸 자세였는데 말이죠. 그걸 힘으로 이겨버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뚱아리인가 싶습니다. ▼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겠죠! 다행스럽게도 그랑은 소유진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
▷ 정정당당하게 기습한다. ▷ 그녀의 검을 가지고 협상을 시도한다. ▷ 정면으로 걸어가서 복수의 의미로 머리를 쳐버린다.
나무그늘 밑에 뉘인 시신은 가슴팍에 뻥 뚫린 구멍이나 옷에 말라붙은 핏자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눈을 제외하면 자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 한 마디로 어떻게 봐도 살해당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뜻이죠.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실제로 살해당한 게 맞는데. ▼ 반은 일단 강을 등진 채 앞으로 걸어갑니다. 저 멀리 보이는 강이 아스타니아의 남서쪽에 있는 것이니 이대로 북동쪽으로 쭉 올라간다면 아스타니아에 도착할테니까요. ▼ 실제로도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대략 20분정도 걷자 시야에 뽀얀 상아색의 성벽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 하지만 하나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지하 통로로 갈 때는 10분이면 됐는데 왜 돌아갈 때는 20분도 더 걸리는 걸까요? 통로에서 걷던 속도와 지금 걷는 속도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908 소유진의 손에 들린 검을 본 그랑의 얼굴이 얼굴개그 카드게임 만화 수준으로 가차 없이 구겨집니다. 그녀는 주먹을 쥔 채 뭔가 가늠하는 듯하다가 항복하는 사람처럼 양손을 들어 보입니다. ▼ "얼굴 반반해서 한 번 들어나 주는 거거든? 그 입에서 시답잖은 개소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협상이고 뭐고 끝이야." ▼ 아무래도 그녀는 검을 상당히 아끼는 모양입니다. 튼튼한 사복검이긴 하지만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뭔가 추억이라도 깃든 걸까요? ▼ 하지만 그건 지금 할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지금 상황에 물어봐야 하는 건 뭘까요? 잘 생각해 봅시다. ▼
어쩔 수 없습니다. 반에게 망자의 눈을 감겨준다 따위의 섬세함이나 윤리의식은 없으니까요. 시체를 뒤로하고 반은 터벅터벅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나갑니다. 분명히 10분 정도 걸었던 것 같은데 지금 가는 길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가 하는 생각은 분명 사소한 기분 탓이겠죠? 묘한 불쾌감을 가슴에 품고 반은 성벽의 문 앞까지 계속 걸어나갑니다.
>>911 반이 당당하게 성문 앞에 멈춰섰는데도 굳게 닫힌 성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문을 열어주고 임무는 괜찮았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꼬치꼬치 캐묻던 주제에 말입니다. ▼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묘한 불쾌감이었던 것이 짜증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성벽 위에 선 사람이 입가에 손을 모으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 "반 그란델리아 아르키베인 린나이어스 휘프노티우스 드 혈검 와이칼리버 케네시움 영웅님 맞으십니까?! 아스타니아 밖으로 나가신 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거기 계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작게 말씀하셔도 잘 들리니 걱정 마시고요!!" ▼ 하긴, 지하통로로 나갔으니 출입기록이 남을 리 없습니다. 저렇게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 ▼
>>912 "지금 그걸 말이라고…" ▼ 그랑이 다시금 얼굴을 일그러뜨립니다. 여태까지 한 행동으로 봐서는 저게 연기일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면 아까 있었던 일이라는 게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화날 상황이었다는 뜻일 겁니다. ▼ 소유진은 아까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봅니다. 저렇게 화난 반응을 보이는 것치고는 전투가 일어난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고, 피 냄새는 났지만 정작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습니다. 그랑의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었던 것도 특이한 점 중 하나입니다. ▼ 서쪽 대륙으로 물건을 보내는 날이니만큼 여기에는 사람이 매우 많았을 것이고, 아무리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수는 없는데 말이죠. ▼ "왜? 사람들 납치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자기 편이 다치는 건 마음이 아픈가 봐? 내로남불이 종교쟁이 특징이라 그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