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엘레이스는 기계장치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성질과 능력은 천사에 가깝기에, 분해해봤자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예전에 카리아와 엘레이스의 허락 하에 팔 하나를 분해했는데 그냥 평범한 부품만 나왔고 정작 해체된 팔도 재조립 하기 전에 돌아와 있었죠. 카리아가 엘레이스의 분해를 거절하는 건 그냥 기분상의 이유입니다. 개조도 '이렇게 개조한다'고 하고 실제로 시술하면 엘레이스가 기억해두고 그대로 신체를 구축해두는 느낌입니다.
여기도 전쟁통이니까 남이 들으면 복장 터질 소리기는 하지만, 내 삶에서 이렇게 여유로운건 처음이다. 그래서 처음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하루종일 누워있거나 거리를 돌아다니곤 했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적응해서 지리도 파악하고 할 수 있는게 많아졌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생긴 너무나도 많은 시간은 도통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안올때가 간혹 있다.
벌써부터 배가 아파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세계는 무언가 잘못되도 많이 잘못되어 있다. 근원력 자체도 이상했고 그들이 가지고있는 마법적 지식도 이상하고 그들의 필요에 의해 소환된 이들도 잘못되어있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더욱 더 묵직해 지는 느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의 원주민은 나에게 그들이 가진 도서를 읽을 수 있도록 허락 해 주었다.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었는데.. 그건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 도로 가져가 버렸다. 다시 읽고싶은 책이었는데..
>>361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함께 순찰을 담당하고 있는 천무월이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품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 아스타니아의 수호대장은 이번 겨우내내 같은 업무만을 부탁해왔습니다. 아스타니아 성벽 위를 순찰하면서 수상한 무언가를 발견하면 알려달라는 것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은 여태 수상한 것은커녕 쥐 한 마리조차 발견한 적이 없습니다. ▼ 오늘도 허탕인가~ 싶던 그때, 티스아흐의 한쪽 귀가 쫑긋 섭니다. 천무월도 무언가를 발견한 듯 표정을 바꾸고 난간에 바짝 기대고 섰습니다. ▼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빛이 반짝거립니다. 티스아흐는 저런 빛을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알시온에 또 한 명의 영웅이 소환된 겁니다. ▼
>>363 카리아는 땀 하나 흐르지 않은 이마를 습관적으로 닦으며 일어납니다. 아스타니아의 유일한 병원인 이곳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 소환 이후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도 지금은 전쟁 중인 상황. 눈 깜빡하는 사이에 사람이 죽고 다치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 방금 맡은 오늘의 마지막 환자도 조금만 처치가 늦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침대에 누운 환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고 있지만요. ▼ 이 환자를 더 지켜볼 수도 있고, 교대 시간이니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364 소유진이 옮기고 있는 짐은 삼초 로지스틱스를 통해 서쪽 대륙으로 배송될 물품입니다. 삼천 젠토가 펼친 결계 탓에 서쪽 대륙으로 물건을 전송하는 건 제한된 방법으로만 가능해졌고, 그게 바로 소유진이 지금 이 무거운 짐을 직접 들어서 옮기고 있는 이유입니다. ▼ 알시온에서 여태 지내는 동안 자주 해왔던 일이지만… 소유진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평소보다 짐이 몇 배는 무겁습니다. 거기다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
>>365 얄랜즈의 귀에 무언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상자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 서쪽 대륙으로 물품을 배송하는 날이 오늘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자를 옮기고 있는 건 십중팔구 소유진이겠고요. ▼ 도와줘야 하나 싶던 그때 얄랜즈는 무언가 이상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방금 그 소리, 소유진이 낸 게 아닙니다. ▼
본래 내가 하던 것은 사령의 구제이다. 즉 엘레이스의 병기들을 이용해 길잃은 어린양들을 신이 있는 저 하늘로 보내는 일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사람의 치료와 구조 역시 우리의 일이었다. 사령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다. 그건 슬프고 싫었기에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덕분에 여기서도 생명에겐 잘 통하지도 않는 탄환을 갈기며 싸우는 것만이 아닌 병원에서 사람을 위한 치유를 할 수 있었다.
허나 걱정이 없진 않았다. 우리의 세계와 이 세계는 규칙이 다르다. 원리와 사회도 다르다. 인물도 역사도 다르다. 신성력이 제대로 잘 통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걱정이 없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알아. 엘레이스. 그래도 조금만 더."
그림자에서 슬며시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건드린 엘레이스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교대시간인 것은 알았지만 아직 피로는 괜찮았다. 자신의 한계는 알았다. 남들보다 튼튼하고 지치지 않는- 시체이기에 할 수 있는 무리 정도는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366 소환된 직후 벨이 제일 처음 했던 생각은 피엘레와 에스벨이 거래를 하고 자신의 신변을 에스벨 쪽으로 넘긴 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 벨의 손이 두툼한 책 표지를 쓸어내립니다. 알시온 사람들은 벨의 목숨을 위협하진 않았지만 대신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부탁해왔습니다. 이곳의 마법을 배워두면 원래 세계로 돌아간 다음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면서요. ▼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아무런 제한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끝나고, 벨은 다시 쥐꼬리만한 근원력을 가진 시절로 돌아가야 할 텐데. 정말 괜찮을까요? ▼
>>367, 368 셀리니아는 상당히 오래간만에 수호대장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의뢰 때 입은 부상 때문이라기엔 상당히 긴 휴가였죠. ▼ 둥그런 모양의 3층짜리 수호대 건물 내부로 들어오자 방한을 위해서 벽에 가득 걸어둔 가죽이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매년 건물에 마법을 거는 것보다 가죽에 마법을 걸어두고 오래도록 쓰는 쪽이 더 편하다던가요. ▼ 재잘거리던 소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나선 계단을 오르자 수호대장의 방이 드러납니다. 안에는 수호대장 말고도 다른 손님이 있었는데, 머리카락이나 기다란 키로 보았을 때 아무래도 반인 모양입니다. 그도 이유를 모른 채 그냥 불려온 모양인지 가만히 서있을 뿐입니다. ▼
>>383 그런 초조한 마음을 숨기듯 그는 실내를 나왔다. 계속 정체되어있는 공기만 마시고 있다가는 언젠가 병에 걸릴지도 몰랐다. 내가 뭐가 좋아서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위해 싸워야 하는거지. 이 곳에 소환 된 이세계의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불린 사람들만 소환 되었다고 하던데 소환자는 분명 소환의 조건을 잘못 설정한게 분명했다.
"영웅은 무슨.."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 그 뭐시기 대장이라는 양반한테 가면 뭔가 일을 주겠지. 그 양반은 언제나 바빠보였으니까. 아니면 지나가다가 시간을 보낼 일을 발견 할 수도 있을테고. 그대로 걸어가며 부감하듯 주변을 바라보았다.
>>383 그런 초조한 마음을 숨기듯 그는 실내를 나왔다. 계속 정체되어있는 공기만 마시고 있다가는 언젠가 병에 걸릴지도 몰랐다. 내가 뭐가 좋아서 이런 곳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위해 싸워야 하는거지. 이 곳에 소환 된 이세계의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불린 사람들만 소환 되었다고 하던데 소환자는 분명 소환의 조건을 잘못 설정한게 분명했다.
"영웅은 무슨.."
중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 그 뭐시기 대장이라는 양반한테 가면 뭔가 일을 주겠지. 그 양반은 언제나 바빠보였으니까. 아니면 지나가다가 시간을 보낼 일을 발견 할 수도 있을테고. 그대로 걸어가며 부감하듯 주변을 바라보았다.
>>373 "잠깐…!" ▼ 천무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티스아흐는 성벽을 박차고 뛰어오릅니다. 천무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릅니다. ▼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할퀴며 지나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습니다. 멜링피스에 비하면 이 정도 추위는 천국이나 마찬가집니다! ▼ 천무월은 아닌 모양이지만요.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티스아흐의 뒤를 겨우 따라가고 있습니다. ▼ "보고도 안 하고 그렇게 뛰쳐나가면 어떻게 해." ▼
>>379 침대 옆에는 환자의 간략한 개인정보가 쓰여 있습니다. 이름, 에드거. 나이, 22세. 영웅이라는 표시가 없는걸 보아하니 평범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 그런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친 걸까요? 의문을 해소시켜주려는 듯 그가 천천히 눈을 뜨나 싶더니, 몸을 벌떡 일으키며 카리아의 팔을 붙잡습니다. ▼ "위험해요!" ▼
붙잡힌 팔에도 아무런 낯의 변화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엘레이스의 기계팔 몇 개가 그림자에서 튀어 나와 카리아를 붙잡은 에드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려 하였다. 이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카리아도 몰랐다.
"진정하고, 다친 이유에 대해서 말해줬으면 해."
그러면서 에드가가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면, 바이올린을 들어 몇 음 연주한다. 여기와서 들은 곡 중 아무거나. 정식 성가가 아니면 위력은 약해지지만 마음과 신앙, 선의가 들었다면 카리아가 연주하는 대다수의 음악은 특수한 능력을 지닌다. 마음에 평안을 주는 건 간단했다. 물론, 감정이 얼만큼 강하냐에 따라 좀 달라지긴 했다.
>>380, 381 소유진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자 얄랜즈의 시야가 변합니다. 주위 다른 것은 뿌옇게 흐려지고 오직 상자 내부만이 선명히 눈에 들어옵니다. ▼ 원래 서쪽 대륙으로 배송되는 물품은 유품이나 편지, 선물, 식료품 같은 것들입니다. 얄랜즈는 그런 평범한 물건들 사이에서 무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 카리아가 사용하는 베네딕트와 닮은 검은 무언가. 거슬리는 소리는 이것에 달린 기다란 판이 회전하며 상자를 긁는 소리였습니다. ▼ 얄랜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3차 아스타니아 방어전 당시 본 적 있으니까요. 이건 침략자들이 사용하는 소형 공중 병기입니다. ▼
>>388 벨의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사람들은 활기찬 듯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아이와 노약자가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대신 말해주고 있습니다. ▼ 사실 말이 좋아서 전쟁이지 지금 알시온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건 말도 안 통하는 괴물에게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느라 발악하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영웅 소환은 수세에 몰린 그들 나름의 최후의 발악이었겠고요. ▼ 기분 전환을 위해 밖에 나온 것이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바닥에 깔린 흙과 자갈을 훑던 벨의 시선이 바람을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멈춥니다. ▼ 이 시간에 동쪽을 보면 늘 티스아흐와 천무월이 성벽 위에서 투닥거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도 없는 걸까요? ▼
아주 오랜시간 여러가지 일을 해왔던 셀리니아에게 부상은 그저 움직이기에 조금 걸리적거리는 것일 뿐,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의뢰에서 입었던 부상 역시 그랬다. 충분히 견딜만 했고, 고통역시 익숙한 탓에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어진 긴 공백은 셀리니아가 아스타니아의 또다른 타인을 돕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오늘 역시 평소처럼 외출을 위해 준비하던 셀리니아는, 수호대장의 호출에 주저없이 수호대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둥근 모양에 알수없는 어색함을 느끼며, 건물 내부에 가득한 가죽을 눈에 담은 셀리니아는 마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셀리니아는 궁금증을 안고 계단을 올라 수호대장의 방 앞에 잠시 멈춰섰다.
" 실례합니다. "
이후 천천히 안으로 들어선 셀리니아는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눈가를 덮어가린 얇고 불투명한 천 아래, 둥글게 휘어진 입술에 작은 반가움과 함께 큰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담겼다.
그 일기토에서 내가 죽고 나보다 훨씬 실력이 출중했던 그가 귀족측에서 어떤 영웅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생각하다가 공허한 웃음을 짓고 의미없는 가정이라 생각하며 성벽위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기간은 두 사람이 그 위에서 아이처럼 놀던데 오늘은 없었다. 타이밍이 안 맞은거겠지. 하고 성벽에서 눈을 돌리고 다시 걸어가려다가 혀를 차고는 원래 가던 장소와는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간다.
진짜 가기 싫네.
그들이 성벽 위에 없고 주변에 사람이 적은 걸 보면 어떤 상황인이 간단히 추론할 수 있었다. 차라리 멍청했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살면서 그런 말은 별로 들어 본 기억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언제 한 번에 평생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